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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자무 Mar 08. 2021

몬트리올 01_성공한 덕후

Montréal, CA_The musician X


나는 동쪽으로 걷고 있었고 그는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 사이로 난 직선의 길을 걷던 우리는 한 점에서 만났다. 왓어챈스! 그는 말했다. 이틀 전에도 마주쳤던 그가 아닌가. 몬트리올이라는 도시에 간다면 혹시나 볼 수 있을까 했던 그 사람과 벌써 네 번째 마주치는 것이었다. 그는 운동하러 가는 중이라 했고 나는 씨네마 뒤 빠크Cinema du Parc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스타워즈를 보러 가느냐 했고, 자신은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 편이라며 씨네마 뒤 빠크를 들어보긴 했지만 가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니. 씨네마뒤빡은 서울로 치면 씨네큐브 같은 곳이었다. 나는 콜미바이유어네임을 보러 가고 있다고 대답했고 그는 제목이 흥미롭다고 했다. 영화관을 잘 가지 않는 편이라니.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를 세 번째로 마주쳤던 건 새벽 3시경의 24시 식당 누보 팔레Nouveau Palais였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를 즐긴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을 걷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지만 파티가 끝난 뒤 자꾸 치근덕대는 친구 때문에 짜증이 나 혼자 한적한 눈길을 30분을 넘게 걸어서 돌아오고 있었다. 플랫 메이트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텅 빈 집에 그냥 들어가긴 싫었다. 마침 그 시간에도 문을 여는 로컬 친구가 추천했던 햄버거 맛집이 생각나 그곳에 들렀다. 버거 포장을 하나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바에 앉아 와인을 하나 시키고 책을 읽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이 시간에 혼자 이 곳에 와서 와인과 함께 책을 읽는 남자라니. 그런데 뒤통수의 곱슬머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음식이 나와 가까이 가니 그 남자는 다름 아닌 그였다. 이런 날 이런 시간에 그를 보게 되다니, 너무 반가웠다. '하이 OO!'하고 말을 걸어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트레몽Outremont에서 여자친구와 아버지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며, 변호사인 아버지가 참여하신 책이 출간되어 그 책을 읽고 있던 중이라 했다. 아 여자친구가 있구나, 아버지가 변호사구나, 생각했다. 그다음 달에 있을 그의 밴드가 참여하는 음악 페스티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가려던 페스티벌이었는데 너의 밴드가 라인업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여서 기대가 된다고 했다. 그는 아직 라인업을 다 보지 않았지만 자신도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메러디스몽크Meredith Monk를 좋아해서 그녀의 공연 이력을 찾다가 발견한 페스티벌이라고 했는데 그는 메러디스몽크는 모른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음악 스타일을 목소리로 흉내 내자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과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로리앤더슨을 몰랐던 나에게 O superman 이라는 곡으로 유명하다며 휴대폰으로 보여주었다. 집에 가서 찾아보니 로리앤더슨이 기억이 났다. 친구가 공연을 보고 왔다고 메일에 쓴 적이 있는 뮤지션이었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만 하고 음악을 제대로 듣지 않았는데, 또 생각난 김에 여러 앨범을 애플뮤직 재생목록에 추가해놓았다.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콘스탄스 드종 Constance Dejong의 Modern love였는데 로리앤더슨의 음악과 콘스탄스드종의 책은 어쩐지 서로 닮았었다.



그를 몬트리올에서 처음 마주쳤던 것은 몬트리올 사람이라면 모두 알만한 카페에서 였다. 내가 있던 동네 마일엔드Mile End에는 스타벅스가 없었다. 대신 정통 이탈리안 스타일의 클럽소셜Club Social과 카페올림피코Cafe Olimpico가 있었다. 그곳은 그 지역 사람들이 루틴처럼 들르는 곳이었다. 몬트리올에서 김서방을 찾아야 할 때 둘 중 한 군데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그런 곳이었다. 날씨가 좋던 그 날 그는 카페의 야외 구역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몬트리올에 오기 전 그를 마주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상상은 했지만 정말 보게 되자 신기했다. 길을 걷다 샤이니의 키가 길을 물어와도, 버스 옆자리에 김반장이 타도, 배우 유준상과 중고카메라거래 전화를 할 때도 그렇게 호들갑을 떤 적은 없었는데(물론 나는 샤이니 김반장 유준상 엄청 좋아한다..), 그를 발견하고는 혼자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 연예인을 보면, 유명세에 지쳤을 그들을 배려한답시고 계속 쳐다본다거나 말을 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에게는 말을 걸어서 내가 팬이라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일상에서 말을 걸어본 적이 없어서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고, 야외 구역으로 가는 동안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걷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아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괜찮다 별 것 아니다, 생각하면서 팬이라고 한 마디 하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책을 보는 중에 말을 걸어 미안하다며 첫인사를 건넸고 그는 생각보다 따뜻하게 말을 이어가줬다. 토론토 출신이어서 한국인 친구가 많다는 것, 새 앨범 발매를 준비하고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다음에 자신을 또 보면 "하이, OO!"하고 인사를 하라고도 해줬다.



몬트리올에 오기 전, 나는 그들의 공연을 유럽에서 세 번 본 적이 있었다. 벨기에에 있던 시절 공연리뷰를 웹사이트에 기고하던 전남자친구 덕분에 두 번, 스페인의 프리마베라 페스티벌에서 한번. 전부 그들의 단독 공연은 아니었으며 우리는 둘 다 그들의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들만을 보러 공연장을 찾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연을 볼 때마다 그 밴드의 키보디스트인 그가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밴드의 보컬보다 특정 멤버가 눈길을 끄는 경우가 있는데 밴드 새비지스Savages의 베이시스트 Ayse Hassan나 쏜룩스Son Lux의 드러머Ian Chang같은 경우가 그렇다. 물론 주관적인 견해이고 공연을 같이 본 그와 나 둘이서만 서로 공감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구글링을 해도 이름이 한 번에 안 나올 만큼 존재감이 크지 않은 멤버인 그는 어째서인지 친구로 두고 싶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들의 노래 중에는 꿈을 주제로 한 곡이 있는데 공연을 볼 때 간주를 앨범 버전보다 세배는 길게 연주하던 그때 그렇게 느꼈다. 몽환적인 그 곡을 눈을 감고 연주하던 모습을 보는데 마치 그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모두 알 것 같았고,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들이 어떤 연주자 버전이 좋은지 추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몽환적인 그 곡이 내 뇌의 망상 파트를 두드렸던 것 같다. 집에 와 그 밴드를 구글링 하다 찾은 인터뷰 영상에서 그가 폴 매카트니의 Sitting in the backseat of my car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아이돌을 좋아하듯 한동안, 한 일주일 동안 정말 좋아했었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게 그런 것일까 생각했었다.



2017_D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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