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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May 06. 2021

삶 | 팀 스포츠에서 발견한 추진력

명인의 삶


✨무소속 5년

✨충정로역

✨삶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하는 운동을 꼽으라면 단연 피구를 들었다. 공을 던질 때, 그 공으로 누군가를 아웃시킬 때, 날아온 공을 거뜬히 받아낼 때, 또는 잽싸게 피할 때 쾌감을 느꼈다. 반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였기에 가끔은 만화 <피구왕 통키>처럼 피구대회는 왜 없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커가며 그런 판일랑 존재하지 않음을, 체육대회의 구색에 불과함을 알았다.


명인은 가장 좋아하는 운동으로 농구를 꼽는다. 구기 종목이자 팀 스포츠라는 면에서 둘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여성을 배제하느냐, 포용하느냐는 점에서 엄연히 다르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피구를 하며 자란 여성은 공을 멀리하지만, 축구나 농구를 하며 자란 남성은 공을 가까이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중요한 건 팀 스포츠였다. 팀으로 뭉쳐서 플레이해보고,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은 일에 함께라서 시너지를 내고, 설령 지더라도 서로에게 응원을 건넬 수 있는 과정.


때때로 일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철저히 혼자다. 아등바등 환경을 바꾸고, 뭔가를 배우고, 나를 알아가면서 나은 모습을 꿈꾸지만, 혼자서는 파편화된 일과 개인적인 삶에서 나아가기 어렵다. 농구로 표현하자면 어시스트, 즉 타인의 도움과 연대가 있어야만 추진력을 받아 점프할 수 있는 셈이다. 3월의 어느 날, 어느덧 삶에서 잊은 감각을 팀 스포츠로 일깨우는 명인을 만났다.






여성의 일과 삶을 기준에 두고 작업하는
‘1인 그래픽 디자이너’ 정명인입니다.




사진제공 명인


키워드 3개로 나를 표현해볼까요.

여성, 활달함, 자기 주도적이요.


삶의 분기점이었던 순간을 알려주실래요?

2015년, 인생 숙원 사업이던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반년 후 요요가 왔을 때 우울증이 극심했어요. 바닥까지 찍고 다시 ‘괜찮은 나’로 만들기 위해 숱하게 시도했던 기억이 나요. 커리어 관련 교육, 캐나다 어학연수, 아르바이트 등을 했지만 우울증으로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집중력에도 심한 문제가 생겨 2018년부터는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정말 좋아졌어요. 그동안 우울, 불안으로 보냈던 날들이 아까울 정도였죠. 이후로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커리어 관리도 시작하여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됐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이 시기를 통해 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 못하는 것 등 모든 걸 실험해볼 수 있었어요.

2016~2017년 즈음에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요요가 온 저의 몸을 긍정하려고 노력했어요. 다이어트할 때 운동 중독 수준으로 헬스장을 다녔기 때문에 질렸다고 할까요? 정확히는 운동 자체에 질렸다기보다 운동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날씬함에 대한 강박과 자기혐오 생각에 질렸던 것 같아요. 날씬하지 않은 저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준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운동을 시도했죠. 필라테스와 걷기, 자전거로 건강을 찾고 최근에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팀 스포츠까지 시도하게 됐어요. 내 몸의 쓰임을 알아가면서 운동 자체에 재미를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였어요.


지금도 우울증을 앓고 계신 건가요?

지금까지 2년 정도 약물치료와 상담을 받고 있어요. 제가 정신과에 가게 된 계기가 우울증 때문만은 아니에요. 책을 읽는데 제가 한 장도 채 못 넘기더라고요. 한참을 읽는데 내용도 머릿속에 다 들어오지 않고. 스스로 너무 심각하다고 여기다가, 요즘 집중력이 너무 떨어지는데 약을 먹으면 해결될까? 이러다 앞으로 아무 일도 못 하는 거 아냐? 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죠. 진단 결과를 보니 ADHD 증상이 있으면서 불안, 우울증이 큰 영향을 미쳤더라고요. 병원에서 명확하게 말해주니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고 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런 얘기가 외부로 공개돼도 괜찮아요. 그런 문제를 인지조차 못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얘기를 접하고 진찰이 필요한 분들은 병원에 가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요. 왜냐면 일상생활에서 남들이 10~20% 스트레스받는 걸 우울증을 겪거나 심리적으로 힘든 사람은 70~80% 정도로 더 크게 받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게 본업에 큰 지장을 주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밀어내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주변에서도, 심지어 저도 10~20대 초반에 그랬기 때문에 얼른 문제를 인지하고 넘어가는 게 좋아요. ‘이런 경험이 있는데 혹시 나도 그런 거 아닐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라도 문제 상황을 인지하길 바라요.


우울증 치료 약과 페미니즘으로 본인을 잘 알게 되셨다고요. 약은 몸을 통제하면서 마음, 정신을 통제하는 과정이라면 페미니즘은 머리를 통제하면서 몸을 통제하게 되는 과정 같아요. 순서는 다를지언정 결국 몸과 마음을 연결하려는 시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둘의 공통점은 저를 알아가는 계기가 된 점이죠. 우울증약은 정신적인 힘듦을 인지하고, 나에게 뭐가 맞는지, 괜찮은 상태가 어떤 건지, 어떻게 해야 괜찮은 상태가 유지되는지 알아가는 데 주효했어요. 상담받고 약물 치료하는 과정 모두요. 우울증 때문에 그동안 발휘하지 못한 재능이나 능력을 약 덕분에 발휘할 수 있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은 거죠.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는 것부터 시작해 제가 원하는 일을 완수해보는 경험이 쌓여갔어요. 그간 성취감이란 걸 느끼지 못했는데, 이런 감각이 성취감이구나, 나 이 정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동안 우울증 때문에 못 한 거였구나 하면서 저도 몰랐던 잠재력을 깨달았죠.

페미니즘은 제 상황에 맞는 선택들이 뭔지 알고, 찾아보고, 선택할 수 있게 해줬어요. 옷 사이즈를 예로 들면, 인터넷 쇼핑몰은 선택지가 한정적이에요, S, M. 여성복에는 L 사이즈가 없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맞는 사이즈가 없으니 일단 내 몸 치수를 재보고 맞는 옷을 찾아봐야겠다 해서 외국 사이트나 빅사이즈 쇼핑몰을 찾기 시작했죠. 국내보다 외국은 비교적 사이즈가 다양하니까요. 이전까지는 내가 아닌 외부,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페미니즘을 접한 후로는 일단 내 몸에 맞는지를 중요하게 봤어요. 기준이 내가 된 거예요. L조차 안 맞는 나에게 다른 선택지를 찾아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고 할까요? 더 많은데 단적으로 말하면 옷 사이즈 혹은 나에게 맞는 운동법 같은 게 있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화두 같아요.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변화한 점을 간과할 수 없죠.

특히 문화, 예술, 미디어 쪽으로 생각해보면 여성은 아주 한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졌잖아요? 가족의 일원으로 국민 엄마, 국민 여동생, 국민 언니로 칭해지듯이요. 획일적인 모습에서 나아가 한 사람으로 세세하게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그런 면에서 다양한 체형과 외모를 가진 여성이 많이 등장하길 바라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소비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사회가 보여주는 획일적인 모습은 나 같지 않으니까요. 물론 내가 그렇게 될 수도 없고요. 요즘 송은이, 이영자, 재재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여성들이 나와서 호감을 받고 있잖아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람들이 더 많이 노출됐으면 좋겠어요. 그걸 바라니까 주변에, SNS에 많이 말하고 화두를 던지고 있고요. 우리가 그런 사람을 찾고 소비하려고 해야 역으로 그런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거든요.


결국 외적으로 치우친 부분뿐만 아니라 서서히 그런 것들이 쌓여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랄까, 태도가 조금씩 바뀌는 듯해요.

내가 기준이 됐을 때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초가 된 것 같아요.






독립에 관해 여쭤보고 싶어요. 물리적인 독립, 정신적인 독립, 경제적인 독립 세 가지로 분류하셨더라고요. 명인님에게 제일 먼저여야 했던 건 어떤 독립인가요?

정신적인 독립이 제일 먼저였어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정신적으로 독립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봐왔어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자취하는 친구들 가운데 가족, 특히 엄마와 분리되지 않은 경우가 있더라고요. 정신적 독립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리적 독립 상황에 놓이는 거죠. 물리적으로 떨어져 지내면서도 엄마를 걱정하고 엄마가 하는 말에 큰 영향을 받는 등 계속 엄마를 염두에 두는 모습을 보면서 할 것도 못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분리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해요. 그게 안 되면 물리적이나 경제적으로 독립돼도 힘들죠. 물리적으로 독립됐음에도 경제적으로 지원받거나, 역으로 집에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고요.

장녀인 분들의 경우 유달리 엄마가 돈을 달라고 한다고 얘기해요. 아들 돈은 절대 못 쓰는데 딸 돈은 마치 비상금처럼 생각한다는 얘기도 떠돌 정도로요. 자녀, 특히 딸이 주는 돈은 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건 가족에게 자기 수입을 얘기하지 말라는 조언도 봤어요. 그게 엄마와 딸 사이에 서로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봐요. 정신적인 독립도 한쪽이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서로 그래야 하는 거죠. 참 어렵고 복잡한 문제 같아요. 과정이 지난하고 고통스럽잖아요.

저는 가족, 엄마와 정신적으로 분리하는 시기가 우울증 겪은 시기와 맞물렸거든요.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엄마가 저를 볼 때마다 살 빼라고 얘기하셨어요. 엄마와 정신적 독립을 해야만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데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더라고요. 제게 살 빼라는 얘기를 그만할 수 있게끔, 자식 인생을 본인 인생처럼 느끼지 않게끔 보여드릴 필요가 있었어요. 엄마가 무슨 말을 하건 내 인생을 살겠다는 마인드를 유지하고 제 방식대로 해나가기 시작했죠. 저는 막내로 태어났고 언니들과 나이 터울이 꽤 있는 편이에요. 9살, 7살 차이가 나기에 부모님 연세도 제 또래 부모님들보다 많은 축에 들어요. 가족 내에서 저는 늘 불완전한 존재로 ‘쟤는 뭐가 될지’ 하며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컸어요. 성인이나 독립된 개체로서 대우를 못 받고 자랐죠. 아무도 나를 독립된 존재로 봐주지 않으니까 독립이 더 간절했던 것 같아요(웃음).


세 자매 중에 제일 관심받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자매 가운데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문제 상황을 종종 일으키곤 했거든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보다는 ‘어휴, 어떡하려고 저러나’라는 분위기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랐죠. 우울증이 정신적인 독립과도 밀접하게 얽혀있어요. 독립은 독립대로, 정신질환은 정신질환대로 딱딱 나뉘지 않아요. 얽히고설켜 있죠. 가끔 ‘내가 태어난 이유는 여기서 이런 문제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남들은 평범하게 하는 것들인데 나는 독립되지 않은 상황을 책임지는 것 자체로 많은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요. 제 숙제이자 숙명이죠.


독립이 끊어내는 게 아니라 선을 명확하게 긋는 건데, 아는 사람일수록 더 힘들죠. 꼭 돈이 아니더라도 정서적인 도움을 다 포함해서요. 

너무 힘들어요. 혼자 해본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안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독립해보면서 어떻게 관계 맺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야 하는지, 내 안의 기준이 더 확실해지는 듯해요. 정신적 독립 다음으로 중요한 건 뭐예요?

그다음은 돈이겠죠? 정신적인 독립이 준비되었다면 내가 먹고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중요하죠. 힘들고 잘 안 되는 부분이라 지금도 도움받는 것들이 많아요(웃음). 그럴수록 행동으로 믿음을 줘야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어렵죠,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저는 독립하겠다는 마음이 강했던 터라 같이 살 때도 먹는 것 외에는 엄마 도움을 안 받았어요. 먹는 거야 엄마가 가족 몫을 만드시다 보니까 같이 먹게 되는데, 가끔 제가 따로 만들어 먹고 제 구역에 있는 건 스스로 빨래하고 청소했어요. 마치 내가 나가 살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하게끔 만든달까요? 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삶이 그려지지 않으면 혼자 살겠다고 얘기했을 때 안 된다고 하시기 쉬우니까요. 돈 벌고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내 앞가림하는 모습으로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왜 나를 못 믿어주는 거야?’라고 얘기하기보다, 그런 모습을 하나라도 보여줘야 가족이든 주변 사람이든 ‘쟤가 혼자서는 저렇게 살겠구나’가 되죠.


그 부분은 간과하기 쉬운 것 같아요. 저는 가족도 남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명인님도 가족이라고 선을 뭉개거나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고, 남에게 하듯 원칙을 지키고 행동으로 보인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가족일수록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이런 거예요. 남이 보면 제가 하는 행동들이 다 새롭고 제 행동을 눈여겨 봐주는 부분도 있어요. 반대로 가족이면 더 못 알아봐요. 이미 너무 익숙한 존재거든요. 내가 뭘 하든 그냥 집에 있다고 하는 거죠. 역할로서 딸인 거지 저에 대해 생각 안 해요. 그러니 단호한 모습으로 선을 지켜야만 말하고 싶은 거, 하고자 하는 걸 어필할 수 있는 듯해요. 그리고 한 번 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보여줘야 해요. 그런 면에서는 남보다 더 어려워요(웃음).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요.


정신적 독립을 해야겠다고 결정하신 게 우울증이 생기면서라고 하셨는데요. 어찌 보면 어릴 때부터 그게 차곡차곡 쌓여왔다가 이제 도저히 안 되니 나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맞아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가족과 분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저를 다 보여주고,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가족들도 어느 정도는 ‘그래, 나가면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은연중에 생각한 것 같아요. 독립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도 돈만 걱정하셨으니까요.


물리적 독립은 언제부터 준비하신 거예요?

집을 나오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취업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가끔 구직하다 보면 집이 회사와 가까운 걸 선호하더라고요. 따로 적혀있진 않은데 기왕이면 회사와 멀지 않은 사람이 좋다는 식이에요. 알바나 이전 회사에서 저를 그런 이유로 뽑았어요. 추측으로 집이 외곽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왠지 독립해야 운이 트일 것 같은 막연한 믿음 있잖아요(웃음)? 이 상황과 공간을 바꿔야 내 팔자가 바뀔 것 같은!


그거 뭔지 알 것 같아요. 중요하잖아요!

근거 없는 믿음이 자꾸 생기는 거죠. 물리적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부모님과 같이 사는 한 독립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을 택했어요. 계속 부모님이 어떡할 거냐고 닦달하시는 상황에서 알바 구했다고 거짓말했죠.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 다행히 독립하자마자 일을 구했어요. 지금 사는 곳은 청년주택이라고, 서울시 주거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요. 들어갈 때 대출 외에 부모님 도움을 받았는데 조금씩 돌려드리고 있죠.


명인님은 나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꼼꼼히 준비해왔고, 똑 부러지게 이것저것 해본 끝에 성취한 것들이 많으시네요. 그건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엄청 고생하셨겠다 싶어요.

제가 이렇다 할 대학이나 직장을 간 게 아니었고,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게 없다 보니까 지난한 과정을 거쳤나 싶기도 해요(웃음). 사회에서 원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취직 좋은 데 하고, 회사 몇 년 잘 다녀서 집 얻는 루트요. 평범한 삶! 그런데 평범한 삶도 무척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저와는 맞지 않다고 느껴요. 오히려 시행착오를 거친 이력이 저를 저답게 만들어주는 듯해요. 남들과는 다른 과정 덕분에.




사진제공 명인


푹 빠진 거로 농구를 꼽아주셨어요.

코로나19가 있기 전까지 농구에 엄청나게 빠져 있었어요. 농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도 너무 좋고, 그냥 순수하게 농구를 잘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개인 체력 단련부터 농구 스킬 트레이닝, 농구선수들 모니터링, 주중‧주말 가리지 않고 야외에서 농구 하기 등 엄청나게 시간을 할애했죠. 발목 인대가 파열되어 치료받고, 농구 하다 다치기를 반복하면서요(웃음). 코로나가 심해진 이후로 열정이 한풀 꺾이긴 했는데 저는 뭐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고 싶어 하는 열정맨이랍니다.


요즘은 어때요?

요즘은 농구 하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요. 농구단에 갓 들어갔을 때는 회사에 다니지 않아서 다음날 쉴 수 있었거든요. 스트레스 풀 겸 익사이팅 스포츠를 즐길 셈이라 괜찮았어요. 그런데 회사 다니면서는 부담스러우니 자꾸 몸을 사리게 되더라고요. 워낙 허리가 안 좋은데 농구하고 나면 그렇게 아파요. 격한 스포츠인 데다 점프를 많이 해야 하니까 허리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죠. 더욱이 운동하기 위해서 부가적인 체력 운동이 필요해요. 그걸 안 하면 농구 못해요.


운동에 올인하신 거네요! 주중, 주말할 거 없이 심취했다고 하실 정도면 하나에 푹 빠져 하시는 편인가 봐요.

제가 뭐 하나에 꽂히면 그걸 질릴 때까지 해야 하는 성향이에요. 엄마가 저를 보고 적당히 좀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잘 안 돼요. 그게 내 성향인걸(웃음). 재작년에는 한창 농구에 미쳐서 꾸준히 물리치료 받고, 골반 틀어진 거 잡고, 침 맞고, x-ray 찍고, ct 찍고 그랬어요. 병원비가 아주…. 그래서 농구단 사람들이 우리 프로 선수냐고, 선수도 아닌데 왜 이러냐고 맨날 그랬어요(웃음). 저를 비롯해 단원들도 열정이 어마어마했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말 그대로 정말 재밌어요. 게임 하는 게 재밌고, 하다 보면 더 잘하고 싶고, 골을 더 많이 넣고 싶어서 한 부가적인 일이 많았죠. 더 연습하는 것부터 체력 훈련을 받거나 팀원과 합을 맞춰보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좋은 경험이에요.

저는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데 단원들이 저와 비슷한 열정, 비슷한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거죠. 농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팀 스포츠잖아요? 시기적으로 아귀가 잘 맞았어요. 그때 열심히 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단원들이 “뭐에 하나 미쳐서 그렇게 한 거다, 회사 다니면서는 절대 그렇게 못 한다”고들 해요. 저 외에는 다들 회사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주중 야간에라도 나와서 한 거죠. 분명 상황이 달랐음에도 한마음으로 농구에 미쳐서 해봤다는 게 놀라워요. 저렇게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영향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액션 루트로써 운동을 고민하셨다고요. 우리가 몸을 쓰면서 할 수 있는 게 그리 흔치 않고, 팀을 꾸려 하는 스포츠에 여성은 주로 배제돼있던 시간이 길다 보니까 이제는 낯설어졌잖아요. 어릴 때 피구를 좋아한 기억이 떠올랐어요. 일각에서는 농구나 축구, 야구와 달리 공을 피하는 스포츠라서 여성들의 스포츠라고 부르는 것도 봤어요.

피구에 말이 많은 게, 하다 보면 공이 무서워서 피한 경험밖에 없다는 얘기가 많잖아요. 피구로 인해 팀 스포츠에 부정적인 관점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분을 많이 봤어요. 피구 말고도 재미난 스포츠가 훨씬 많은데 익사이팅 스포츠를 해볼 기회를 잃었다는 말까지요. 피구와 농구를 비교해보면 좀 달라요. 피구는 공으로 사람을 맞히는 게 규칙이니까 위험한 면이 있어요. 반면 농구는 사람을 맞히는 게 아니라 골을 넣는 거기 때문에 플레이하면서 다칠 수는 있어도 직접적으로 다치게 하는 행위는 없어요.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팀 스포츠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면, 축구나 농구처럼 구기 종목에 수요가 없는 부분이 이해되곤 해요. 상대적으로 남성들을 위한 축구단이나 농구단, 동아리는 많잖아요. 여성들은 스포츠 분야에 선택지가 별로 없는 와중에, 피구 때문에 더욱 거부감을 느끼고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게 있죠.

저는 꼭 농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팀 스포츠를 추천해요! 멤버들과 함께 도모해서 점수를 내는 게임이요. 찾아보면 원데이클래스 등 제법 많아요. 그래도 사람들이 농구 하면 좋으니까(웃음) 추천을 목적으로 떠올린 게 영상이에요. <여농처돌이>라는 유튜브 채널은 위캔즈라는 농구팀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이 합심한 결과물이에요. 10대 때 팀 스포츠를 제대도 접하지 못한 여성들이 지금에라도 쉽게 접근하면 좋겠다는 의도였어요. 여자 농구 수요가 늘어야 팀 스포츠를 즐기는 환경이 바뀔 것 같더라고요.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는 엘리트 체육 아니면 아예 안 하는 사람, 두 분류로 나뉘어요. 선택지가 둘밖에 없다는 게 싫었어요. 취미로 즐기는 저 같은 사람이 늘어야 시합할 수 있는 사람이 늘고 스포츠를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대개는 엘리트 체육을 경험한 사람뿐이에요. 그러니 우리 팀은 매번 지는 거죠(웃음). 선수 준비하던, 훈련받은 사람이니 아마추어가 이길 수가 있겠어요?


아마추어를 위한 판이 필요한 거군요.

네. 현재는 아마추어를 위한 판이 없으니 문제점을 고민해봤죠. 10대 때 팀 스포츠를 접하지 못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겼어요. 비록 팀 스포츠를 즐기지 않더라도 보는 사람이 늘면 좋아요. 그래야 스포츠 환경이 개선되거든요. 따져보면 엘리트 스포츠계에서 여성 선수들이 처한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아요. 성추행 성희롱 폭력 구타 등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어쩔 수 없이 그 환경에 적응해야 해요. 혐오적인 말을 듣거나, 외모 평가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운동선수인데 실력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받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에요?

단원이 된 후로 프로 선수들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어요. 영상도 찾아보고 플레이하는 방식을 익히곤 했는데요. 볼 때마다 외모 얘기를 정말 많이 하더라고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외모를 가꾸는 건 좋아요. 다만 그런 이야기를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조차 본인의 외모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런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습득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죠. 더불어 여성 스포츠에는 여성 혐오가 뿌리 깊게 깔려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여성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문화에서 여성 스포츠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요가 없을 수밖에요.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도, 하다가 그만둔 사람도 결국 폭력적인 환경을 못 견뎌서 나온 거거든요. 국가로 넓혀 봐도 한국 사회가 많은 여성 재원들을 놓치고 있다고 봐요. 저는 그저 농구가 좋아서 시작했고, 잘하든 못하든 농구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여겼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으로 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제 제 앞에는 대대적으로 이어져 온 여성 혐오 역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크게 자리하고 있죠.





사람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은데요. 영향받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꼽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영향을 받은 사람이 정말 많은데 놀랍게도 모두 여성이에요. 각자 하는 이야기는 달랐지만 모두 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본인들이 살아온 방식을 기준으로 조언해줬어요. 그럴 때면 이 험난한 가부장 사회에서 어떻게 버텨왔는지 등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덕분에 안도와 위로를 얻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받긴 했으나 가족 역시 남이고,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거든요. 특히나 언니들 이야기는 공감하기 힘들었어요. 이해되는 한편, 너무 불안했어요. 나는 언니들처럼 살 수 없는데,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려면 저런 삶밖에 없을까? 하던 차에 농구단, 독서 모임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죠. 두 그룹 모두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없고, 농구단은 퀴어 프렌들리한 사람들이에요. 문제를 인식하고 제가 느낀 분노를 같이 나눌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됐죠. 제가 불안하고 힘들 때 영향받은 사람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 그 처지를 견디고 나보다 한 발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었어요. 그들을 통해 영감을 받고 의지가 되고 그럼으로써 안도했던 듯해요.


‘이렇게는 살 수 없다’와 ‘이렇게 살아야겠다’라는 모델이 있었네요.

언니들이 소위 정석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제가 그 스트레스나 압박을 아주 많이 받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 하는 건가?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는 생각을 자주 했죠. 말 그대로 평범한 삶. 학교는 좋은 곳, 하다못해 4년제 대학 졸업해서 직장 3~4년 다니다가 결혼하고, 2년 뒤에 아기 낳고… 이런 루트 있죠? 언니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곁에서 봤으니 그 삶이 너무 힘든 걸 아는데, 저는 애초에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 없단 걸, 가는 길이 너무 다르단 걸 깨달았어요.


나중에 만난 농구단, 독서 모임 사람들을 통해 여러 겹의 여성에 대한 경험이 생기셨군요.

네, 연령대도 다양해서 20대부터 40대까지 있어요. 친밀해지면서는 집에 초대받아서, 그분들의 집, 공간, 일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안도했어요. 아주 멀지는 않지만 나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엿볼 수 있었던 거죠. 다들 결혼하지 않은 데다가 퀴어 여성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꽤 계세요. 혼자서 40대까지 사는 분, 파트너와 동거하는 분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에서 살짝 벗어나도 문제없다는 걸 크게 느꼈어요. 아,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도 문제없구나. 나도 나만의 루트대로 살아가도 되겠구나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시기별, 집단별로 제가 느낀 부분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달랐던 듯해요. 엄마나 가족들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지만, 페미니즘을 접한 뒤로 만난 여성들로부터 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명인님은 나에게 맞는 환경들을 잘 찾아가시는 것 같아요.

살려고, 불안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정석적인 삶을 사는 여성들만 봐왔으니까 다른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나 궁금하더라고요. 여자 구성원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여성상을 못 본 거죠. 그게 참 답답했어요.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계속 맨땅에 헤딩하듯 이곳저곳 다녔던 듯해요.





자주 사용하거나 좋아하는 단어로 ‘다양한’, ‘하실래요? 해보자!’는 것을 꼽아주셨어요.

제가 먼저 제안하고 해보자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경험을 나누면서 다양한 인사이트 얻기를 좋아해요(웃음). 자소서 쓸 때 ‘다양한’이라는 표현을 하도 써서 대체어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예요. 그리고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길 즐기기 때문에 만남과 일을 먼저 제안하는 편이에요.

이렇게 하다 보면 구멍이 생길 때가 많죠. 놀랍게도 제가 혼자 계획하고 짠 것 이상으로, 해보면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있어요. 누군가와 같이할 때 더 좋은 게 생각날 수 있고, 예상보다 더 나은 방향이 있을 수 있거든요. 무작정 지르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런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예 혼자 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봤자 그렇게 흘러가지 않으니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부딪치고 같이 계획을 세워나가는 게 훨씬 나았어요. 경험상 이 과정을 신뢰하는 편이에요.


문구류 브랜드 런칭하셨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무소속으로 생활하는 동안 어떤 이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구류 브랜드는 일종의 포트폴리오 쌓기용으로 만들어본 거였어요. 사업을 해보자고 쉽게 생각한 것도, 앞서 아빠의 사업을 도와드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갓 졸업했을 즈음 아빠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해봤어요. 은행 계좌 개설, 사업자등록증 발급을 위한 서류 작성, 전자세금계산서 발행, 종합소득세 같은 세무 처리 등 경험해본 게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사업자를 내고 문구 상품을 만들어서 조금씩 팔아보기도 하고, 플리마켓 나가서 판매해보기도 했어요.

하필 왜 문구류였느냐면, 제가 <불한당>이라는 영화를 좋아했어요. 덕질하면서 자체 디자인 굿즈를 팔았는데 반응이 좋았거든요. 그때 핸드폰 케이스, 마스킹테이프, 스티커를 만들었기에 문구류로 시작하면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죠. 제 선에서 꾸리기에 부담 없는 금액이자, 재고가 남아도 창고를 크게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점도요.


디자인과 제작, 판매까지 혼자서 다 하신 거예요?

혼자 다 해봤죠. 그래서 자소서를 쓸 때면 이런 경험도 해봤다고 어필해요. 다만 저 좋은 디자인만 해서 판매가 부진했어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원하는 디자인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고, 홍보가 잘 안 됐어요. 결과가 좋지 않아서 조금 의기소침했죠(웃음). 그래도 여러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사업자를 가지고 있으면 꼭 상품 판매가 아니더라도 디자인해서 외주 받는 일 등으로 실적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다양하다는 가치가 명인님에게 아주 중요하네요. 다양한 경험,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서 기울이시는 노력이 있나요?

그냥 해보는 거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냥 해보고, 궁금한 게 있다면 찾아가 보는 거예요. 두려움도 생기고 조금 귀찮고 생각이 많아져도, 무시하고 일단 해보거나 가봐요. 그렇게 접해보면서 주변에 같이 해보자고 권유하고. 일단 질러봐야 이후에 뻗어 나가는 경험이 생겨요.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농구도 하고, 여성주의 관련 모임도 가보고, 빌라선샤인에도 참여한 게 다 그렇죠.

저는 사람이 바뀌는 계기가 결국 사람, 환경, 교육이라고 봐요. 살다 보면 전환점이 필요할 때가 오는데, 그럴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환경을 바꾸거나, 좋은 교육을 받으면 효과가 나요. 제 기준으로 환경은 독립하면서 자연히 바뀌었고, 교육은 사람을 만나면 교육 면도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커뮤니티를 찾았어요. 사람을 만나면 배우는 게 있잖아요? 꼭 레슨이 아니더라도요.


삶을 통해서 배우기도 하니까요.

사람을 통해 그런 걸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빌라선샤인이나 새로운 모임에 참여하는 방법을 택했어요. 작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기대를 충족하고, 예상보다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어요.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게 참 많아요. 제가 들이는 노력이라면 이 부분 아닐까 싶어요.


삶의 만족도를 55점이라고 써주셨더라고요. 지금은 어때요?

만족도는 때때로 계속 변하는 거 같아요. 작년 말까지만 해도 물리적 독립, 경제적 독립을 모두 이루어서 80~90점 정도였다면, 21년 1분기에는 회사 다니면서 원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55점으로 훅 떨어졌어요. 그래서 원인을 제거했죠(웃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저를 지키기 위해 지난 3월에 퇴사했어요. 이제는 다시 80점으로 올라온 상태예요! 사실 경제적으로 조금 고민되는 부분도 있지만 스트레스받지 않는 선에서 제가 일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만족하고 있는 부분이랍니다.


무소속으로 보내는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막연한 목표와 주변의 시선 사이에서 저만의 중심을 찾아 나가는 과정인 거 같아요. 스스로 제일 잘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되묻고 시도해봐야 하니까요.


과거와 지금 무소속으로 지내는 기간이 있으신데요. 과거와 달리 지금 무소속이 되어서 변화한 점, 기대가 있으실까요?

확실히 그때보다 지금 자원이 많지 않나 싶어요. 예전에는 주변에 사람이 한정적이었고 경험도 적었거든요. 특히나 너무 불안했는데 이제는 인적, 물적 자원도 꽤 생겼고, 그 불안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터득했다고 할까요? 대책은 없지만, 예전보다는 긍정적이에요! 그때보다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고 제가 벌려놓은 것들이 많아서 앞으로 할 일들이 많거든요. 새로운 사람들과 뭔가 해볼 기회가 자주 생길 것 같아요.

더군다나 이제는 맥락을 정리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힘이 돼요. 이전까지는 파편처럼 흩어진 걸 어떻게 정리할지 몰랐어요. 한 게 정말 많아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간 배운 게 많고, 그걸 얼른 써보고 싶어요. 무소속의 나를 어떻게 정리할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맥락으로 나를 정리할 것인지. 앞으로는 한 맥락으로 저를 정리해서 PR하고 싶어요.


명인님의 이야기는 내 삶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 같네요.

온전히 나로서 지낼 수 있게끔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제가 퇴사 결정을 한 게 실은 소진될까 봐 두려운 거예요. 괜찮은 나로 올라오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라. 사람의 한계를 100% 기준으로 할 때 10~20%라도 남아있을 때 올라오는 것과 방전이 되었을 때 다시 10~20%로 끌어올리는 건 다르잖아요. 후자는 너무 힘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일단은 나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죠. 우울증을 크게 겪어봤기에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요. 그 상황을 상상하면 정신적으로 힘들까 봐, 시체처럼 살게 되는 순간이 올까 봐 두려워요. 그게 무서워서 회사를 관둔 거예요. 다소 대책 없이 질렀지만, 그간 해온 과정이 있으니 미래의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해요(웃음). 예전보다는 무소속인 지금이 많은 루트나 기회 같은 것들이 더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이드 프로젝트도 지금은 예전보다 인정받는 추세잖아요. 점점 자기만의 이야기, 색깔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니까 제가 하는 것들, 지금 보면 작고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언젠가 다 쓰이겠지 하면서 지내요. 그래서 예전과 달리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퇴사했어요. 하다 중단한 프로젝트들을 살려보면 앞으로의 먹거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 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있어요. 퇴사하겠다고 말한 당일에는 괜히 말했나 싶기도 하고, 왜 이러냐 대책 없다고 자책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저보다 저를 더 믿어줬어요. ‘잘할 거라고, 잘했다고.’ 어떤 분은 ‘괜찮아, 너를 지킨 거야’라고 얘기해주기도 하고요. 나조차도 나를 못 믿고 있는데 너는 잘할 거라는 얘기가 더 많은 거예요. 주변에서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내가 보여온 모습들이 그들에게 믿음을 줬구나,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게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당장 쪼들려도 뭔가 길이 있겠지 하면서요.






✨명인님을 더 알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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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사진 제공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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