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배신

by 천성식





Make your ego porous. Will is of little importance, complaining is nothing, fame is nothing. Openness, patience, receptivity, solitude is everything.



자아가 형성된 후 가장 많이 되뇐 릴케의 말이다.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의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의지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수긍했다. 내 학창 시절 우리나라 교육시장은 의지를 무엇보다 강조했으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직함을 가진 유명 강사들은 입을모아 의지만을 강조했다. 중학생 때부터 인강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성적은 곧 의지가 결정한다ㅡ는 주장이 대세였다. 교복을 입던 나는 의지만으로 되는 일일까?라고 의심했지만 선험자와 선생들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났다. 고등학교 입학식에서도 졸업식에서도 대학 입학식과 훈련병 입소식에서도 나는 저 말을 떠올렸다. 가장 생생했던 건 역시 군대가 아닐까? 그때보다 고생한 적은 아마도 없다. 비를 맞으며 각개전투를 하던 날에도 나는 의지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생각했다. 쓰러져가는 통나무들을 밟고 뛰어 지나가는 일이나, 소대별로 한 명씩 레펠 유격훈련을 지원하는 용기, 힘든 훈련 뒤에 급양 보조를 뽑을 때 손을 드는 일, 재미없고 지루한 정훈 교육 뒤에 이어지는 퀴즈쇼에서 가점을 얻는 알고리즘? 공군 훈련소는 가감점식으로 운영해서 훈련 등수가 낮으면 원하는 자대를 갈 수 없었다. 우리 소대는 뒤에서 3번째 소대였다. 그냥 뺑뺑이로 돌려진 랜덤 소대였는데. 평균 점수가 몇십 점인가 낮았다. 우리 소대 평균 점수면 수도권은 당연히 못 가고 지방 인기지역도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가장 극한의 순간에서 사람들은 의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나는 소대 대표, 대대 보급, 지원 청소와 특기대표를 모두 신청했다. 자면서도 꿈에서 제식 순서를 외웠고 특기학교에서는 점등시간이 끝난 화장실에서 체련복 속에 숨겨온 교본을 꺼내서 공부했다. 의지의 유무는 아니었을 것이다. 의지만으로 그걸 해서 좋은 결과를 봐야겠다, 고 생각했다기보단 이성적으로 구린 자대(집이랑 먼), 구린 특기(힘들고 보람 없는)를 받아서 고생할 나의 미래를 생각했다. 어떤 향상성(向上性) 따위에 대해서는 참 많이 생각했었다. 고백하자면 그 과정이 실제로 노력을 들이부어 무언가를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서, 그렇게 그런 일을 반복했다. 공부를 잘하진 않았지만 성적은 그럭저럭 나왔다. 나이를 먹고 생각해 보면 그저 또래보다 호기심이 많고 좋아하는 게 많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썼듯, 고등학교 2학년쯤에 서야 처음 공부 같은 공부를 했다. 그전까지는 밤 열한 시든 열두 시든 그냥 해볼 만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는 겉핥기 공부였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페이지를 넘기고 문제를 푸는 강한 의지력을 쓰는 일들을 처음 했었다. 물론 수험생활이 끝날 동안 두꺼운 1000제 같은 책들은 많이 풀지는 못했다. 나는 내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나와 같은 독서실을 다니는 친구들과 나는 의지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의지력의 높낮이라면 내가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친구보다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그 친구처럼 쉽게 성적을 내지도 못하는 걸까? 수험생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수험 자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문제해결능력, 창의력, 끈기 뭐 등등 이런 기본적인 능력에서 내가 열등하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내가 다 맞는 날은 그 친구도 무조건 다 맞았고 시험이 어려워 선방했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 친구는 나보다 한두 문제는 더 맞았다.



자기 계발서는 대개 별로다. 어떤 인사이트가 있을까 하여 뒤적이지만 별것 없는데도 어떻게든 책을 팔기 위해 편집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용적이지 않고 원론적이거나, 그저 연구결과만 답습하는데 그치거나, 다 아는 내용인 경우가 거의 9할 가깝다. 이쪽 분야도 계단식이라 한동안 비슷한 내용들만 답습하다가 갑자기 스텝 업하곤 한다. 어릴 때 나온 호아킴 데 포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는 정말로 원론적인 얘기뿐이었고, 그 뒤를 이은 론다 번의 시크릿은 장르도 불분명했다. 그 후 국내에는 황농문을 필두로 몰입이 포커스였고 엔젤라 더크워스의 GRIT이 아마 다음쯤 될 거다. 이듬해에 리처드 탈러가 노벨 경제학상을 타기 전까지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는 대부분 따분했다. "잘하는 사람이 잘해" 식의 책임도 없고 방법도 없는 얘기들이었다.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 없이 <잘하는 사람을 따라 해> 식이었는데 201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행동 심리, 즉 습관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 그들이 생산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에 드디어 학자들이 답을 내어준 것이다. 어떤 요소 때문에 잘났다고 늘어놓는 의미 없는 설명이 아니라, 일정 기준의 수행력만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 도전해 봄 직할 그런 실용적인 메시지. 웬디 우드, 러셀 폴드랙, 찰스 두히그, 스티븐 기즈, 제임스 클리어 같은 저자의 책들이 그런 책들이다.



생각하지 않고 하는 행동을 습관이라고 한다. 어떤 새로운 행동은 지겹고 귀찮아져서 그만두거나 익숙해져서 계속하거나 두 방향으로 흐른다. 어떤 성취에 필요한 모든 과정은 습관이 대부분을 수행한다. 하루에 습관은 무려 43%를 관장한다. (비슷한 비율로 인간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데만 43%를 쓴다) 작은 습관부터 큰 습관까지 결국 인간은 능동적으로 쓰는 시간과 큰 차이 없이 습관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는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큰데, 남은 의지력의 시간은 기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사람을 쉽게 피곤하게 만들고 원하는 바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발심과 보상심리에 지쳐 의지력의 시간은 확실한 기댓값을 주지 못하는 반면, 습관이 만든 생산성은 언제나 일정하다. 물론 나쁜 습관은 역의 관계겠지만 좋은 습관은 크게 에너지를 쓰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쁜 습관은 생각보다 광범위하다. 생각이 습관이 되면 이는 강박(compulsivity)이 되고 상태가 습관이 되면 이는 중독(addiction)이 되고, 정서가 습관이 되면 이는 공포증(phobia)이 된다. 이런 나쁜 습관들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원치 않는 내용을 반복하지만 우리는 유튜브 보듯 빨리 감기 해버릴 수 없다. 그것이 나쁜 습관이 준 대가다. 앞서 말했듯 삶의 43%는 습관이 관장하는데 저런 나쁜 습관이 내 인생을 채워 넣는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반대로 43%를 좋은 습관으로 채워 넣는다면 (예를 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하루에 한 시간씩 독서를 하고, 30분씩 조깅을 하는 등) 의지력을 쓰지 않고도 남은 57%를 위한 컨디션을 얻을 수 있다. 습관에 대한 공부는 이러한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를 통해 시작했다.



의도적이거나 목표 지향적인 행동은 의도성과 목표성이 강할수록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다. 이 부분이 많은 수험생들이 놓치는 부분이다. 인간의 의지력은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그 의지력이 소진되기 마련이다. 어떤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에 대해서 '난 저 정도는 못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 일을 의지력으로만 해결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드는 부담감이다. 의외로 어떤 분야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은 그저 습관이 되어 '해야 하니까'라기보다는 '하다 보니까'의 경우가 압도적 수준을 넘어 100%에 가깝다. 경쟁자가 의지력을 끌어서 어떤 행위를 이끌어낼 때 습관이 된 사람은 의지력의 소모 없이 그 일을 수행한다. 의지력은 그저 도울뿐이다. 물론 습관의 형성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려서 습관을 만드는 데에는 21일이면 된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텐데, 이는 틀린 말이다. 21일은 성형외과 의사이자 자기 계발서 저자인 맥스웰 몰츠가 자신의 책 '성공의 법칙'에서 먼저 쓴 말인데 이 책은 무려 1960년에 출간된 책이고, 정확히는 습관이라기보다는 성형을 해 자신의 신체 부위가 사라지거나 바뀐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에 적응하는 기간을 보고 21일이라고 한 것이지, 실제 습관을 형성하는 데에는 적어도 8주, 길면 수십 주까지 걸린다. 이를 대부분은 21일로 알고 있기 때문에, 21일만 버티자는 사람도 결국 습관을 만드는 데 포기하거나 실패한다. 그러면 습관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리고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습관들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어떤 때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행동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하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습관에 대한 첫걸음이다. 어떤 자극이 어떤 촉발을 해 행동을 굳혔는지를 스스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남이 해줄 수 없다. 습관은 오로지 본인만이 아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되짚으면, 습관을 만드는 일에도 귀납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자신의 습관들이 가진 공통점, 즉 환경, 목표, 욕구의 메커니즘을 이해해 내가 어떤 습관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내 서술기억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metacognition, 메타인지가 필수적인데 이마저도 '능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습관도 만들 수 없다. 관찰력과 겸손, 성실함은 습관이 아닌 나머지의 의지력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력의 회복과 보관을 위해서는 충분한 잠과 수분 섭취는 필수적이다. 스트레스를 차단하기 위해 적당한 운동을 하고 양치, 면도 등 일상을 쾌적하게 만드는 일들이 습관이 되어 세로토닌을 보존해야 한다. 이 때문에 어릴 때 그렇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양치를 습관화하려고 노력했나 보다.








재미가 희박한 시대에도 가치는 그대로이기에 덜 재미있는 것들, 즉 재미없는 것들이 그 가치를 나눠 갖는다. TV 시청률이 그렇고 파급력, 인지도 = 인기와 돈이 재미없는 것들에 돌아간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범위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스포츠, 정치, 예술, 지식산업에까지 모두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을 붙인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옛 기술들은 자리를 잃었다. 이제 이어폰도 모두 가능하면 무선을 쓰고 MP3는 유물이 되었다. CD를 모르는 세대도 있으며 다른 문화권에서는 시계 읽는 법을 모르는 세대가 등장했다. 그런 시대임에도 사람들은 옛것들에 더 재미를 느낀다. 새로운 무언가가 옛것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도 음악도 드라마도 싹 다...



문유석은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 했다. 나도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어느 정도의 인간혐오가 있고,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냉소적이고 때로는 비겁할 수도 있는 그런 태도. 세상에는 주인공 성격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자신을 깎아내린다. 같은 말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는' 자신을 기대한다.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안 좋은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런 일이 다가와도 무덤덤하게 해결하길 바란다. 그런데 건강한 마음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 아닌가? 상처받을 일은 누구나 생기는 건데 그런 일에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게 그게 건강한 게 맞나? 우리가 작은 생채기에 아파하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을 겁내고 멀리할 수 있는 건데.



콜레라 시대에도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코로나 시대라고 해서 삶의 핵심적인 부분이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삶의 영역을 코로나가 침범함으로써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글을 쓰는 글을 쓰겠다고 책을 사놓고는 읽지 않고 계속 미뤘다. 활자를 섭식하는 능력 역시 퇴보하고 있었는데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 읽지 않았으니 쓰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



요 몇 주간, 작년 상반기 동안 쓴 돈보다 많은 돈을 썼다. 입는 옷도 먹는 것도 책도 전자기기도 이것저것 많이 샀다. 사실 다 사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냥 나를 위해 샀다. 코로나는 인류의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여유와 희망이었다. 건강 역시 그중 하나였다. 산책 루트가 흥미로운 호수 공원 옆에 이사 온 건 몇 안 되는 좋은 일이었다. 차를 타지 않고 걷는 습관을 만든 지 한 달 차에 접어든다. 가까운 거리도 될 수 있으면 걸어가려고 한다. 대학 4학년의 어떤 시점에서는 캠퍼스에서 집까지 걸어 다니곤 했다. 주 4 파였던 나는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집까지 걸어왔는데, 버스를 갈아탄 뒤 지하철로 십여 개 역을 지나와야 할 거리를 걸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했지? 싶은 생각도 종종 드는데 네이버로 지금 검색하면 십여 km에 큰길 우선 4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무작정 도보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지던 11월쯤에는 기록도 세울 겸 뛰다시피 해서 90분 컷 했던 기억도 난다. 전역 이후로 가장 건강했던 시절이다. 요즘엔 그때에 버금가게 걷는다. 걸을 일 거의 없던 상반기보다 하루에 만보는 기본으로 걷는 요즘 옷을 이것저것 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소비일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에 대한 얘기가 사회 곳곳에 뿜어 나온다. 죄는 사람이 짓고 벌 역시 사람이 준다. 잡범들부터 흉악범까지 죄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빈곤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벌은? 벌에 대해서는 또 기준이 달라진다. 형법은 최소한의 영역에서만 사람을 붙잡을 수 있다. 그게 맞기는 하다지만, 죄가 넘치면 벌도 넘쳐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본 세상 중에서 지금이 가장 죄가 넘치는 순간이다. 게다가 중죄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허물을 인멸하고 있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자가 자유주의자이며, 지성에 재를 뿌리고 싶어 하는 자가 지성인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유를 충분히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지성에 뿌릴 재를 한 움큼 집기는 했는지? 내일까지 써야 하는 글을 아직 시작도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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