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분절

by 천성식




1_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심오하다. 강박의 종류는 다양한데, 내가 가진 가장 큰 강박은 정리 강박이다. 정확히 정신의학적으로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까진 아니지만 정리하지 않으면 찝찝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하니까 말 그대로 강박(强迫)이긴 하다. 여기서 정리는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빛깔, 글자, 모양부터 감정, 상황, 기능 이런 것도 포함한다. 언제든 꺼내보고 싶은 건 내가 원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써놓았던 건 항상 기대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기억도, 문구도, 풍경도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막 방에 물건들이 각 잡혀 정리되어 있는... 그런 철저함은 또 없다. 정리강박만 있으면 나름대로 삶을 쾌적하게 살 수 있는데, 여기에 기록 강박까지 더해지면 삶이 좋지만은 않은 의미로 풍요로워진다. 글자들이 많고 생각들이 많아서 어느 시점부터는 의무적으로 정리하고 지워내는데 그러다 보니 정리도 기록도 꾸준히 해야 한다. 학생 때는 수첩을 많이 썼는데 요즘은 핸드폰을 쓴다. 다이어리, 스케줄러, 핸드폰 이렇게 쓰다 보면 일정 주기로 통합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대개는 주를 기준으로 정리한다. 책도 영화도 사람도 취미도 이런 것들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게 귀찮지는 않고 그냥 알고리즘을 무조건 통과해야지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정렬한다. 어떤 순환근무 같은 걸 하면 꼭 내가 지나간 자리는 체계가 만들어진다. 신기한 건 다음에 내가 다시 그걸 할 때, 내가 만든 규칙들이 계속 지켜지고 있다는 거다. 내 윗사람, 아랫사람,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수없이 오갔을 텐데 내가 바꿔놓은 어떤 규칙이 남아있는 걸 볼 때는, 뿌듯하기도 하고 내 원칙이 그럭저럭 의미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살아와 다 분류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분류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매번 분류하기 싫어서 뒤로 미뤘던 것은 바로 '취향'이라는 영역이었다. 어떤 선택에서 '취향'을 고려하는 건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결과를 낳는데, 그것마저도 정리하고 싶은 정리 강박이 생겼다. 정규분포화가 가능해서, 공리주의적으로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취향'은 굉장히 민감하고 어려운 영역이다. 일단 무분별하게 낱장으로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대충 모았다. 출처는 모르겠다. 그냥 다이어리 구석이나 핸드폰에 끄적여놓은 것들이다. 핸드폰에 무작위로 찍어놓은 사진들이나 어디 네이버 기사에서 저장한 캡처들도 너무 오래 내버려두면 나중에 다 의미를 잃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정리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다.



2_ 어떤 완성품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책도, 영화도, 글도 사실 '완성'된 건 없다. 읽는 사람 보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빈틈을 메워야 어떤 느낌이 보상으로 튀어나오는 거니까. 나는 당신의 간지러움을 긁어줄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런 글은 어디에도 없는 거였다. 읽는 사람이 반을 만드는 건데, 어떻게 혼자서 그런 완성된 글을 쓰려고 욕심을 냈을까! 욕심 많은 과거의 나야 어쩌니.



3_ 글을 쓰는 행위로 사람은 천진난만해질 수도, 의젓해질 수도 있다. 어떤 경험과 단계도 글 없이는 없다. 이미 글을 배워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글 없이 순수해질 수 없으며 글 없이 의젓해질 수도 없다. 모국어 개념이 생기고 나선 꼼짝없이 그 언어체계에 갇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글을 읽고 쓰고 살아야 한다. 저는 그래서 '글 만드는 틀'을 만들고 있다. 어떤 글이든 그 알고리즘을 통과하면 뚝딱 글이 완성되는 그런 틀. 어렸을 때 직사각형 모양자 아시죠? 동그라미 타원 직사각형 정삼각형 다 그릴 수 있는 그 자. 그 자처럼 뭐든지 써낼 수 있는 틀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만들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글이든 기본 틀은 써낼 수 있게. 그렇게 다양한 틀을 만들어 도구상자에 넣어 갖고 다니고 싶다. 제가 못쓰는 건 [편지]인데, 편지는 읽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서 그리고 감정을 담아 써야 하는 글이라서 너무 쓰기가 힘들다. 어설프게 따라 하려고 하면 그저 그런 편지가 되고 마니까. 누가 쓰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쓰지 말라고 했다. 아마 릴케? 인가 암튼 근데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 그냥 쓰고 살아야지. 우효의 노래 중 하고 싶은 말은 해야 돼ㅡ라는 노래 가사가 있는데, 그거랑 마찬가지로 쓰고 싶은 글은 써야 한다. 제가 여러분의 모든 글을 읽지는 못하겠지만, 여러분 모두가 쓰고 살았으면 좋겠다. 참으면 병나니까.



4_ 과학적으로는 8시간 넘게 자도 비효율적일 수 있고 네 시간 반만 자도 충분한 수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첫잠 90분이 질 좋은 수면일 때에야 가능한데, 대부분 수면시간이 부족한 사람의 첫잠은 질 낮은 수면이다. 적어도 삶의 1/4 많으면 삶의 1/3을 수면으로 채우면서 우리는 얼마나 수면에 대해 관심이 없는가. 몇 년 전에 만든 삶의 대원칙 중 하나는 '수면이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벤트'라는 마음가짐이었다. 나는 지난 열흘간 잘 잤는지?



5_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니까, 얕봤던 것들에게 배신당한다. 이십 대 초반의 내게 한 문장을 전한다면 뭐든 꾸준히 하라는 말을 반드시 전하고 싶다. 또래 친구 선후배들의 사회 진출, 성공 등에 처음 놀랐던 건 스무 살 즈음이었다. 친구에서 이제는 동창이 된 아이들이 아이돌로 데뷔하고, CF 배우, 인기 절정의 시트콤에 출연할 때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이제는 감정적인 유대가 거의 없어 무덤덤하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했던 기억들이 종종 떠오른다. 예를 들어 친구 J는 그룹 A로 데뷔했는데, 그 그룹에는 내가 자주 듣던 노래를 부른 그룹 출신의 멤버가 있기도 했다. 내게 스타였던 사람과 친구였던 사람이 같은 무대에 선다는 건 스무 살의 내게 충격이었다. 반면 변호사라든가, 감평사 같은 전문직은 개인의 성공인 느낌이라 비싼 밥 한 끼 사주는 여유로움으로 다가왔지만 대외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화려한 인물의 성공은 여러모로 눈에 들어왔다. 동아리 후배가 화장품으로 유튜브를 시작할 때는 그냥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 유튜브라면 우리 세대에게는 UCC의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라고만 인식됐으니까. (사실 지금도 유명한 유튜버가 누군지, 그가 언제부터 유명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같은 MZ세대로 엮임에도 Z세대와 괴리감을 느끼는 건 내가 어려서부터 애늙은이 부류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연합 동아리에서 비슷비슷한 대화를 했던 누군가가 내가 즐겨보는 잡지의 필진이 된다거나 전문적인 유튜버가 된 것은 그로부터 고작 2~3년 후에 다가온 일이다. 특히 친구네 대학 축제서 소개를 받은 아무개가 유튜버 명함을 건네주던 기억들은 지금도 종종 꿈에 나온다. 이름보다는 필명으로 더 기억하는 익무, 누갤의 사람들도 그 취미를 본업으로 가지면서 유명세를 가진 것을 보면 조금 아니 많이 배가 아픈 게 사실이다. 밥벌이 걱정 수준을 뛰어넘어하고 싶은 일만 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랴. 내 군대 선임은 취미가 일이 되면 취미도 일도 모두 잃는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취미가 되는 일을 꿈꾼다. 나는 아마추어에서 프로가 되는 과정이 굉장히 어려울 거라고 겁만 먹고 있었고 솔직히 지금도 겁이 많지만 생각보다 경계는 불분명했다. 어렸을 때와 자란 내가 세상에 느끼는 건, '생각보다 세상은 체계가 없다'라는 어른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렸을 땐 어른들의 세계는 확실할 줄 알았다.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더 성공하거나,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더 실패하는 그림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 시대의 아이들, 밤 12시까지 학교 앞 '골든벨 독서실'에서 자이스토리를 푸는 아이들 대다수가 그런 시스템을 기대했을 것이다.



6_ 좋아하는 독립영화감독과 작품이 같아 친했던 영화과 친구가 단역으로 미니시리즈 드라마에 나올 때 학교 앞 2천 원 안주 술집에서 축하를 했었다. 마침 옆 테이블에 있던 선배들에게서 우리 과(법학) 3학번 위 선배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한예종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늦은 나이에 (지금 생각하면 늦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젊은 나이지만) 도전하는 그를 보며 나를 포함한 후배들은 그다지 자극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여름 자취하던 원룸에서 tvn 드라마에 나오는 그를 봤을 때의 소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반가워서 (새내기 mt 때 우리 조 조장이던 선배였다) 몇 년 만에 카톡을 하려고 보니까 번호가 바뀌어있었다. 글로 쓰면 드문드문 찢어진 수제비 같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공기와 감정ㅡ 오묘한 질감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진 휘낭시에 같이 정리되어 있다. 언젠가 대학을 졸업한 후 n 년 차라는 글에다가 쓸 얘기들이었는데 갑자기 생각나 적는다. 올해가 햇수로 대학 졸업한 지 n 년 차긴 하다.




7_ 패션, 인테리어, 음식(도 메인, 디저트, 계절음식 뭐 등등), 음악도 장르, 뮤지션, 이렇게 세세하게 영화, 책도 자세하게 관찰해 봐야겠다. 나는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고 남의 취향을 따라 하거나 내 안에 가져온 게 꽤 많다. 보통 또래 남자애들의 취향은 비슷비슷하고 좀 유치한 구석이 많아서 여자친구나 선배들의 취향을 훔친 것이 많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찾아 내 취향으로 만든 것들만 가려보고 싶다. 부르디외의 책 어딘지는 기억 안 나는데 결국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건 취향이고, 이 취향이 정치적 성향과 계급에까지 연장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전에, 나는 부르디외의 책을 내 취향으로 선택해 읽었던 걸까? 아마도 아니겠지.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나는 유우명한... 그러니까 '어디서 읽었어야 말을 덧붙일 수 있는 책'을 읽었다. 거기에 선호가 있었나? 는 전혀 아닌 듯. 어떤 계절부터 나는 책을 꾸준히 읽기 시작했는데 학부생 때도 독서모임에 초대하는 후배들이 있었다. 나는 누구랑 같이 책 읽는 것(여자친구면 모를까)은 별로 안 좋아해서, 지금까지 어떤 책 읽어왔냐고 물어보고 그 리스트를 보여주면 눈으로 훑기만 했다. 한 번은 인문대 쪽에 가본 적이 있는데 왠지 그 사람들은 뭔가 다른 취향과 수준을 갖고 있을 것 같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웃긴 건, 우리 쪽(사과대) 사람들은 문학/인문교양 책을 5할 이상 꼽았고 어문계 애들은 자연/사회과학서가 엄청 많았다. 그 리스트에서 교집합인 책은 꼭 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도 역시 좋아함은 없었다. 적어도 걔네들이 뭔가 담론 따위를 나눌 때 내 의견 정도는 말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어느 시절까지의 나는 상대가 아는 건 내가 다 알고 있어야만 잠이 왔다. 그런 괴팍한 성정이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무지의 자유를 느낀다. 부르디외는 경제, 문화, 사회자본으로 구분했는데 그중에서 제일 만만한 문화자본으로 나의 취향을 정리해 봐야겠다. 문화자본에서 취향의 칸막이는 아마도 영화, 음악, 책, 음식... 또 뭐가 있을까?



8_ 수많은 안 좋은 감정들이 있다. 패배감, 배신감, 좌절감 같은 감정들. 모두 겪지 않고는 성인이 될 수 없는 필수적인 감정들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최악을 상실감이라고 생각한다. 건강, 사랑, 열정, 돈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상실감에 나는 여전히 무력하다. 여기서 몇 살을 더 먹어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어도 이 상실감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안다. 무언가를 알아갈수록 더 큰 무지에 부딪친다는 무지의 법칙처럼, 상실감 역시도 상실을 겪을수록 더 큰 상실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잃은 것이 셀 수 없음에도 아직 잃을 것이 남아 있음은 축복일까 불행일까?



9_ 아직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호기심이 많다. 어떤 사람이나 감정적인 것보다는 캐릭터와 서사에 대한 호기심이 그렇다. 모든 호감은 내게 반작용이었다. 그래서 내쪽에서 화살표가 가는 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다. 유머와 귀여움의 생존 시간을 관찰해서, 실험관찰 일지에 적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불필요의 필요'가 뭔지, '같으나 같지 않은' 것들은 뭔지 '안심과 방심'의 경계는 뭔지. 이런 걸 정리해서 알고 싶다. 대부분은 추상적이나 적확하고픈 시어(詩語)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니까 호기심이 엄청 다양한 부분에서 꽃을 피우는데, 또 그것들을 정리해야 해서 항상 복잡하다. 매일이 그런 호기심을 포기하는 일로 메꿔진다. 그런 것들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기 힘든 건 단순하게 그래서다. '절대는 절대 없는' 것. 그리고 '재미와 쓸모의 조회', '익숙하고 버틸만한 불행과 어색한 행복의 우선순위', '싸가지 없는데 싸가지 있어?', '좋지만 또 나는 싫은?'뭐 이런 말들. 그 느낌들. 그게 쓰이는 경우와 상황. 그리고 입장. 뭐 이런 것들. 그니까 글자들에 대한 호기심이다. 나는 수능이 끝나면, 어른이 되면, 대학을 가면, 군대를 가면, 전역을 하면, 졸업을 하면, 취직을 하면, 휴가를 가면 등등의 다음 스테이지에서 이런 호기심이 멈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10_ 백예린의 '다툼'이라는 곡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와 다툰 뒤엔 난 시집을 꺼내 읽어. 모자란 내 마음 채우려 늘 그래.' 난 이 곡을 카페에서 들었는데. 그가 시집을 직접 써줬다면 금방 화해하지 않았을까? 그의 시집에는, 다툰 뒤에 읽을 만한 시를 잔뜩 써놓는 것이다. 내 부족한 표현을, 어쩔 수 없는 결핍을 고백하는 내용이면 더 좋겠지. 그러니까 누구나 시를 쓰고 읽고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고교 시절을 거치며 시를 수십 어쩌면 수백 편을 외웠는데 정말 키워드로 외웠다. 백석의 사슴도 기형도의 검은 잎도 그러니까 그렇게 '외워'버렸는데. 아무튼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쓰고 있다. 그니까 꼭 어떤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시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을 하려고 한다. 시인의 언어는 사실 우리가 쓰는 언어랑 크게 다를 게 없다. 스스로의 특별함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이 여전히 ONE&ONLY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11_ 차별을 담은 작품이라면, 그 차별을 억지로 '차별이 아닌 것'처럼 연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현실을 고발하고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데 환상을 보여주라고 하는지들. 이상과 현실, 그리고 작품 속과 밖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철저히 문화 소비자 쪽이 부족한 건데 왜 생산자들을 탓하는지? 아무튼 이게 좀 불만이지만 난 뱉지 않고 혼자 생각만 하다가 그것도 옅어지니까 이만큼만 씀. 정확히는 대중의 수준이 낮아진 게 아니라 화나고 불편한 사람들의 수준이 낮을 뿐이다. 평균을 깎는 사람이 많아지면 중위 대중의 수준이 높을지라도 평균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12_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하루키 수필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구는 읽고 나서 그냥 일기 아닌가? 이런 걸 왜 보시나요? 싶은 글. 근데 그런 일기를 쓰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냥 일기 정도로만 꾸준히 써도 잘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렇게 공격적인 사람들도 다 읽게 되는 그런 수더분함. 화내기 전까지 그래도 읽어냈다는 건, 그만큼 그의 글이 잘 읽혔다는 점이다. 내 글의 목표는 그 지점에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 잘에 오든 글 서너 개 정도는 읽게 만들고 말겠다는 그런 무분별한 수더분함. 일지 식신은 문창(文昌)이다. 그런데 딱 화일간에게만 편재가 문창이 된다. (이것에 대한 얘기도 여러 개를 들었는데 아직 확실하게 모두가 수긍하는 결론은 없는 듯. 이것도 언제 심심하면 써보겠다.) 나는 일지 식신에 편재가 많다. 처음 사주를 봤을 때부터 유명하다는 사람, 용하다는 사람 모두에게 들은 말은 문창과 화개였다. 그 말을 듣고 검색해 봤을 때 그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명리학에 관심도 없이 살았을 거다. 그 이전의 삶도 이후의 삶도 문창과 화개가 풍경이 됐다.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적고 싶은데.



13_ 사회성이란 모르는 사람과 친해져 폐를 끼쳐도 '웃어넘길 수 있는 붙임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회 공동체 구성원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과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떠들면 혼내어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어린애니까 넘어가달라는 너털웃음은 부모가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회구성원이 했을 때나 의미가 있다. 부모가 그런 태도가 되었을 때 이미 아이의 사회성은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된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까. 아이들이 우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감정이 이렇다, 내가 망가졌다는 걸 타인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부모가 처음부터 잘못된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해결 방식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습관이 되는 것이다. 미취학 아동이 아니라 초중학생들 중에서도 이런 태도를 가진 아이를 종종 본다. 어떤 시점을 넘기고 나면 그런 아이의 관계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의존적인 사람이 되거나, 타인에게 트리거를 넘기는 성인이 된다. 가끔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이에게 '너는 그저 니 인생의 주인공이지 내 인생에서도 네가 주인공은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는 아이를 보면 저 아이가 정말 울만 해서 우는지, 부모가 잘못 가르쳐서 우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귀가 찢어지는 목소리 톤과 3절 4절 우는 아이들은 부모가 만든다. 누구나 부모를 처음 해보는 것이겠지만 부모가 돼보지 못한 사람에게 불쾌함을 준다면 그는 분명 좋은 부모는 아니다. 우리 세대가 우리 부모 세대만큼 훌륭할 순 없겠지만, 배려나 호의를 요구하는 부모만큼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처럼 괴팍한 영감탱이 같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실제로 모든 연령대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다(?).



14_ 강자에게 당당하다고 해서 약자에게 똑같이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이거는 오랫동안 내 캐릭터? 였는데. 학부생 때도 군대에서도 학원 다닐 때도 일할 때도 강자(윗사람)에게 주눅 들지 않고, 져주거나 피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건 내가 강골이라든가, 센 캐릭터여서 인 건 아니고 그냥 독립된 개인주의자여서였다. 정치를 아예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애초에 입에 발린 말 못 하고 또 담배를 안 피우고 술자리도 싫어하면 어쩔 수 없이 선택지가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그나마 멀쩡한 선택지는 적당히 좋은 거 포기하고 솔플을 하는 게 답인데, 그러다 보니 내 이익이 중요해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고, 누구 눈치를 안 볼 수 있었다. 물론 옳지 않더라도 나한테 큰 도움이 안 되면 굳이 바꾸겠다고 모난 돌처럼 튀어나가진 않았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일도 없던 그럭저럭 상관(傷官)까지는 아닌 그런 캐릭터. 한편으로는 그런 역할이었기 때문에, 약자들한테도 그냥 똑같이 대했다. 내가 강자한테도 이렇게 하는데, 약자한테도 똑같이 하면 그게 정의 아니야?라고 생각해 온 지난 세월. 요즘에는 그게 틀렸다는 걸 느낀다. 다른 것도 아니고 틀렸다. 강자와 약자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대하는 건 정의가 아니고 치사한 거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강자에게 강한 건 어차피 나 혼자만의 특징인데, 약자한테 따뜻하지 못한 건 잘못된 거라는 생각. 어떤 사람을 보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은 좋은 사람을 옆에 둬야 한다.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15_ 마음에 들고 싶은 사람이 항상 있어야 한다.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안 쓰고 그냥 혼자 잘 먹고 잘 살지만, 예전 한 할머니가 해주셨던 말처럼, 사람은 사람과 만나면서 살아야 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마음에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고. 이게 좀 중요하다고 이제야 깨달았다.



16_ 어떻게든 나이는 먹는다. 나이를 먹으면, 허영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의 허영심에 혀를 내두르던 중, 허세가 아니라 진심인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관심이 생긴다. 어째서 저 사람들은 나랑 비슷한 세월을 살았는데 저렇게도 진지한 사람일 수 있을까? 실은 그걸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지하고 솔직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더욱. 그러니까 음 허영심 없이, 심지어는 자신의 허영심마저 마주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궁금.



17_ 귀여운 척에 실패하면 귀여워진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은... 무지 대단한 느낌 같지만 문맥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모두가 불행한 결과다. 죽고 싶었던 사람은 결국 살고, 살고 싶었던 사람은 죽으니까 모두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맞이해. 뭐 속뜻은 '죽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산다는 뜻이지만, 누군가는 그냥 이번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덤벼드는 사람도 있었을지? 그런 사람에게 '살았다'는 그냥 보너스 인생일 수도 있고 새로운 지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었는데 죽은 사람은 뭐 제일 불쌍한 거고. 아무튼 그렇게, '귀여운 척에 실패하면 귀여워진다'라는 말도 있다. 이건 내가 오늘 지은 말이다. 폰은정 될까 봐 바로 고백함. 귀여운 척은 위의 '허영심'에 가까운데, 귀여워 보이기 위해 목소리도 변조하고 표정도 행동도 말투도 다 인위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귀여운 척은 절대로 귀여울 수 없다. 포인트는 이들이 '귀여운 척'에 '성공'했기 때문에 귀여울 수 없는 거다. 반대로 귀여운 척에 실패를 했다면? 가끔 그런 것들은 귀엽다. 그러니까 귀여운 척은 못했지만 귀여운 것이다. 음 이건 좀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맞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귀여운 척에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은 거의 없음.



18_ 좋아하는 티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니까 비언어적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서 당신을 좋아한다구요, 라고 티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한테만은 당연히 아니고 친구나 뭐 주변 사람들. 여기서 '티'가 뭐냐. 어떤 태도나 기색을 말한다. 그런데 티를 잘 내는 건, 정확히 선을 딱 맞추는 거다. 미묘함의 굴레에서 '어 쟤 나 좋아하나?'의 경계선을 타야지만 잘 '티 냈다'라고 할 수 있겠다. 함부로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없지만, 한편으로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고민을 상대에게 넘기는 것. 뭐야 저 사람 나 좋아해? 안 좋아해? 이런 사람 사이 알력 다툼을 '밀당'으로 순화(미화) 하지만 난 이런 거 너무 빡세다. 감정형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그런 감정들의 농도와 색깔을 알아맞히긴 어렵다.



19_ 병든 자만이 고칠 수 있다는 역설은 의외의 진리다. 달리 말하면, 글을 별로 읽지 않았고 역시 글을 많이 써보지 않았던 사람인 내가 오히려 소정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참 별거 아닌데 신선하다. 둔재들에게는 시간이 가장 큰 적이다. 그러니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앞서 영상매체에 대항하는 활자매체의 무엇을 써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썼다. 하지만 현실은 비교할 수 없는 시장이긴 하다. 영화는 천만을 쉽게(나름으로) 넘기지만 베스트셀러는 고작 몇만 부. 심지어 6천 부 8천 부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규모만 따지자면 천 배의 싸움. 반대로 생각하면 영화를 보러 가는 천만의 예비 독자들을 뺏어올 수 있는 활자 시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작해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따위로 소설이 폄하되지 않는 시대를 만들고 싶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진 '인문학'에 대한 기대를 휘어잡아서 활자에 붙여 놓는 것. 인문학은 결국 읽는 것에서 시작해 쓰는 것에서 끝이 나니까...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야기다. 책은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읽는 것이니까. 그럼 그 '자신의 방식'을 찾는 법을 설명하는 책이어야 '인문학'이라는 딱지를 붙여도 뻔뻔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고전들을 읽으면서 <자기 이야기>를 쓰게끔 유도해야 作家고 인문학자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인문학과 활자의 위기를 내가 뭐라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지 스스로도 얼떨떨하지만 나름의 희망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들을 보니까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준비 기간은 꽤 오래 걸리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쓰기만 한다면 비슷한 뭐라도 나오겠지 싶다. 등단도 못한 사람이 베스트셀러를 쓴다고 말하면 당연히 코웃음 치고 한심해 보이겠지만 슈바이처 박사가 학문과 인류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한 것처럼 저도 어떤 의의를 남기고 싶었고 또 책도 쓰고 싶어서 일단의 목표를 이렇게 주저리 쓴다. 윌리엇 서머셋 몸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인간은 살면서 오직 한 가지만 추구한다. 자신의 즐거움!"



언제 썼는지 모르겠는 글. 어디까지 되돌려야 할까요



20_ 이 글들에는 어림이 담겨 있다. 어떤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코로나 동안 해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말이지. 정신연령을 쑥쑥 먹기 전의 나. 지금 나는 내 나이에 맞는 정신연령을 갖고 있을까? 쓰다만 단편들만 수백 편이 잠들어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걸 쓰고 싶다. 옛날처럼 릴레이 소설을 써볼까 하다가 당시 열심히 참여해 주셨던 이웃분들이 모두 어디 가셔서 참여율이 저조할까 봐 미뤘다. 그 많던 독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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