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여름을 담은 커피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지하철 역까지 배웅했다. 미리 찾아둔 카페들에게선 이미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고, 친구가 핫하다며 알려준 카페들은 그날따라 모두 만석. 2시 30분이라는 건 커피를 마실 시간인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커피... 커피 한잔이면 되는데 하며 정처 없이 걸었다. 기왕 찾아낸 가장 가까웠던 카페는 아예 의자가 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 커피 하며 걷자 문득 눈앞에 COFFEE 라고 쓰여진 전광판이 떡하니 나왔다. 대낮이었는데도 밤에 켜져 있는 네온사인처럼 번뜩이는 전광판의 커피 글자를 읽고선 얼른 가게 입구로 향했다. 카페의 이름은 ‘개화가배’. 이름이 특이해서 리뷰를 한번 읽어보고 들어갈까 싶었지만 딱히 도움되는 리뷰를 찾지는 못했다.
어쨌든 날이 더워 아이스 커피를 꼭 한잔 마셔야겠기에 들어간 곳에서는 마치 교토의 오래된 카페의 주인할아버지처럼 깐깐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저씨에서 할아버지로 넘어가는 듯한 연세의 할아버지가 계셨고 내가 서성이자 그 느낌을 증명하듯 내가 앉을자리까지 지정해주셨다.
골라주신 자리는 나름 부엌이 잘 보이고도 너무 구석지지도 않은 적당한 2인석 자리였다. 커피의 원두 종류가 많았지만 메뉴판의 첫째줄에 쓰여진 커피에서 수박, 메론, 참외향이 나며, 아이스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고 쓰여져 있었다. 마침 더웠던 날씨에다가 메뉴판의 첫 번째에 있는 메뉴를 좋아하고, 그리고 수박을 결코 마다하지 않는 나는 첫 줄의 커피를 아이스로 주문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아저씨가 에피타이저 커피라며 보리차보다도 연한 커피물을 한잔 주셨다. 빈속에 따뜻한 온기가 들어가니 냅다 얼음커피를 넣기 전에 존재했던 조금의 걱정과 불안을 가셔주었다. 몸에도 마음에도 반가운 시의적절한 과정이었다.
첫잔을 비워내자 본 커피 한잔이 와인잔에 얼음가득하게 대접처럼 나왔는데, 커피의 양과 와인잔이라는 잔의 선택에 놀랬다. 얼음의 양이 많긴 했지만 커피가 그렇게나 한잔 가득하게 와인잔에 채워져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런 낯섦을 뒤로하고 꽂아주신 빨대로 한 모금을 들이키자 얼음의 냉기와 함께 수박과 메론과 참외의 향이 줄줄이 넝쿨채로 입 안으로 들어왔다. 끝맛은 여지없는 커피였다. 보통 커피를 시켰을때 설명에 쓰여진 향이 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 기대를 잘 하지 않는데 여름의 참외 메론 수박의 풋내와 달큰한 맛은, 그 박류 과의 풋내는 내게 지나쳐버린 여름을 상기시켰다. 이번 여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상쾌했고 좋았구나 하는 소회를 길어올리게 했다.
10월의 중순에서 속을 파낸 수박 반통을 들어올려 여름을 들이키는 듯한 감상을 주었던 커피 한잔은 그 풋내와 풋풋함에 대해, 서툴고도 열정적인 모습에서 오는 싱그러움을 떠올리게 했고, 종국의 커피 끝에서 다가오는 살짝의 쓴맛은 여름 밤 비에 젖어 짙게 흩날리는 풀향기처럼 다가왔다.
어른의 맛. 각성하기 위함이자 현실을 위해 깨어나기 위한 도구로서의 커피가 아닌 싱그럽고 어리숙한, 젊음의 지나가버리고 나서야 좋았구나 깨닫게되는 그런 쾌청함과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맛이었다.
한잔을 비우는것이 너무 아쉬웠다. 시간이 가버리는것이, 점점 줄어드는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럼에도 잔에 끝은 다가왔고, 이어서 디저트 커피라며 새로운 작은 칵테일 잔에 담긴 아이스 커피를 한잔 내어주셨다.
마지막 커피에서는 강한 박하의 향기와 더불어 무언가를 닦아내서 청소할때 쓰는 잿물같은 혹은 담배향 같은 탄내가 났다.
여름날 한옥 대청마루에서 쾌청한 산바람을 맡다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야한다고 바람이 등을 떠밀어주며 아쉬움을 불어오고 결국에는 내가 거기 있었다고 나의 머릿속에만 추억과 잔상으로 남기듯, 마지막 잔은 여름의 잔상과 향기를 거침없이 썰물처럼 거두어갔다.
갈증에 미처 보지못했던, 내가 시킨 메뉴가 ‘커피코스’라는 사실은 벽에 쓰여진 설명과 그림을 보고 알았다. 커피 세잔은마치 영화같았다. 누군가 정해둔 순서대로 이끌려 겪고나니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일어날시간이었다. 여름을 놓아주어야 다음 계절이 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