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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Dec 31. 2015

조금 치사하면 어때

막 대해도 될 만한 사람들이 누가 있나

반차 쓰고 이런 저런 일들을 보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버스를 내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다다르면 거기서부터는 따로 차도 인도가 없다. 차도도 인도도 아닌 그냥 골목을 따라 걷고 있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서 차가 한 대 튀어나왔다.

나도 놀래서 멈춰서고 차도 멈춰섰다. 나는 오늘 모자를 쓰고 있었고 점퍼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골목에서 뭔 운전을 그리 급하게 하나 싶어 운전석을 보니 운전석에 있던 아저씨가 내쪽을 노려보다 내 신원(젊은 남자)을 확인하고는 눈을 아래로 돌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잘못을 결정하는 게 꼭 정말 그 '잘잘못' 자체에만 달려있는 게 아니겠다는 생각. 내가 어린학생 혹은 여자였다면 그 아저씨는 '똑바로 보고 걸어다녀'란 훈계를 할 기세였다. 그 아저씨가 그 훈계를 하지 않고 날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었던 이유는 단지 내가 '젊은 남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사과할 떄의 모습을 종종 지켜본다. 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여부 이전에 상대방을 먼저 탐색한다.

'내가 이 사람한테 사과를 해야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상대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아주 높은 확률로 '나를 얼마만큼 막 대해도 되는지'를 계산할 것이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 '막 대해도 될 만한 사람들'은 참으로 많다. 빈자, 여성, 아이, 성소수자 등등. 그리고 나는 그 '막 대해도 될 만한 사람들'이 적은 사회가 더 살만한 사회라고 믿으며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고 또한 내 생각을 온전히 하기 위해 자기검열을 자주 한다.

물론 불편하다. 관습에 기대서 사람들의 층위를 나누면 내가 편해지는 공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관습이란 건 꽤나 견고하기 때문에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영역에서 그 당연한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봐야 나는 누군가에게 계속 '막 대함'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막대함을 잘 참고 견디겠지만 억울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타고난 조건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빈자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한부모가정에서 자랐다. 나는 그것들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상가족에서 자라지 않았음을, 빈자의 자식으로 가난에 허덕이며 고생했음을 그리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진 않았다. 앞서 말한대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고 저주스러웠을 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단 하나는 분명하고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멍청한 비난을 더하는 게 나쁘다는 사실을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잘못하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

딱 그정도다. 그정도가 내가 '조금 덜 멍청'할수 있게 견인하는 힘이다. 종종 누군가가 물어본다. 책을 많이 읽냐,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솔직히 대답하기 민망할정도로 공부를 안 하는 편이다.

사실 그래서 슬프다. 나는 딱히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글을 써내리는 것도 아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당연한 이야기는 매번 누군가의 저항과 맞닥뜨린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왜 그런지도 잘 모르겠다. 왜 사람들이 저러는지. 사실 따지고보면 내가 되게 불쌍한 밑바닥도 아닌데. 자기들도 분명히 여기저기서 '막대함'을 당하고 있을텐데.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종종 그런 말을 한다.

'저 조금 치사해도 이 사람 편 들어주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무 이상한 세상에서 딱 그정도가 내가 할수 있는 고만고만한 저항이다. 뭐 근데 되게 무기력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래도 그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를 당연하고 뻔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 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와서해본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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