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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호 May 24. 2016

영화 <곡성>, 아무도 당신을 속인 적 없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황해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카피가 전부고 스포인 영화다. '현혹되지 말라'는 메시지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이상한 영화 하나를 보고 나오게 된다. 애초에 쿠니무라 준이냐 아니면 천우희냐의 논쟁, 쿠니무라 준과 황정민이 한패냐 아니냐의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씬이 번개를 맞은 남성이 병원에 입원한 부분이라고 본다. 남편이 번개를 맞고 누워있자 와이프는 '그렇게 비암이며 몸에 좋은 거 처먹으면 뭐하녀 맞으라고 뛰어다녀도 못 맞을 번개를 맞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그래도 비암이라도 먹었으니 목숨은 부지한 것'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곡성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설명되기 힘든 일들이다. 그냥 벌어지고 있고 딱히 해결책도 없다. 우리를 찾아오는 무수한 불행들처럼 그저 무기력하게 맞아야 하는 불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개연성을 찾는다. 납득해야 하니까. 그래야 덜 불안하니까. 영화 내내 서사를 거드는 종교적 메시지도 사실 같은 작용이다.


이 영화속 캐릭터들은 시시각각 현혹된다. 주인공인 곽도원은 일찌감치 쿠니무라 준이 '원인'이라고 확신한다. 몇 가지 사건들, 그리고 사실일지 아닐지 모를 전해지는 말들. 그렇게 쿠니무라 준을 놓고 범인으로 달려가던 찰나에 느닷없이 천우희가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과 꽤 많은 관객들은 새로운 증거 앞에 어떤 개연성을 선택해야 합리적인지 고민한다. 그런데 둘 다 가짜라면? 애초에 개연성 따윈 없었다면?



현혹되지 않은 인물이 하나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신부다. 그는 곽도원이 주장하는 개연성의 설명을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곡성에서 벌어진 사건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곽도원이 무수히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개연성을 짜맞춰 확신하고 있지만 주인공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신부에게는 그저 답답한 상황일 뿐이다. 곽도원은 해답을 기대하고 갔겠지만 신부는 그저 의사 말이나 잘 들으라고 한다. 생각해보자. 뭔지 모를 병이 돌고 있고 그래서 사람이 광기에 미쳐 사람을 죽이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면 병원에 보내라던가 같은 이야기를 하지 굿을 하라던가 귀신에 씌었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 거다. 그러나 이미 영화 중반까지 곽도원과 함께 달려온 사람들에게 그 신부의 상식적인 이야기는 야속하기만 하다.


나는 곽도원의 딸이 학원폭력이나 성폭력에 시달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찢긴 책이나 노트의 낙서에서 폭력의 트라우마같은 증거들이 보였다. 곽도원이 고작 '일본인을 만났냐'고 의심했을 때 아이는 '뭣이 중한지도 모르면서 자꾸 캐물어쌌고 지랄이여'라고 말한다. 병에 걸린 증거를 찾으려고 몸을 더듬자 아이는 '다 큰 딸래미 치마를 걷는다'며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상상을 할 겨를이 없다. 곡성에 이상한 일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외지인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보인 징후들은 분명 아이가 다른 종류의 위험에 빠졌다는 사인이 되었을 것이다.



황정민은 불확실한 사람들에게 단서를 팔아치우는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그는 처음부터 쿠니무라 준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네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났냐'고 물었고 곽도원이 대답했다. 그리고 황정민은 '그게 문제다'라며 곽도원의 의심에 확신을 주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무당이 그렇듯 애매모호한 대답과 질문으로 의뢰인의 내심을 확인시켜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다. 황정민을 찾아온 건 곽도원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곽도원에게 확신을 주려고 '그 외지인을 쫓아 내든 없애든 하라'고 말했는데 곽도원은 일행을 동원해 외지인을 죽이러 갔다. 이때 황정민은 '미끼를 물라고 했더니 미끼를 삼켜버렸다'고 이야기한다.곽도원 일행에게 쫓길 당시 쿠니무라 준은 정말 위협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물론 그를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사람은 그 표정을 다르게 해석할수도 있다. 그러나 의심을 걷어낸다면 쿠니무라 준의 표정은 살해의 위협을 느끼는 딱 그런 사람의 표정이었다. 결국 쿠니무라 준은 죽는다. 그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길은 없다. 외지인으로서 천우희도 무서워서 피했는지 아니면 천우희가 살해자인지. 어쨌든 죽는다.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듯 하다. 그런데 쿠니무라 준이 죽고 나서도 이 몹쓸 불행은 계속된다. 분명히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풀리지 않는다. 새로운 개연성이 필요하다. 이때 황정민은 '그 여자가 문제'라고 말한다. 새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 말미에 천우희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설득을 한다. 당신 딸의 아버지가 그 외지인을 괴롭혔기 때문에 당신 딸이 이런 상태가 되었다고 말한다. 곽도원은 그가 먼저 내 딸을 해했다고 반박한다. 이 느슨한 설득은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힌트를 다시 한번 제공한다. 과연 이 모든 일들은 인과관계일까? 아니면 선후관계일까? 과연 천우희의 말을 들었다면 곽도원의 가족은 살았을까? 황정민의 말을 듣고 일찌감치 말리러 갔다면 곽도원의 가족은 살았을까? 아니다. 어떤 선택을 했든 일가족은 죽었을 거다. 이 불행의 원인 같은 건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영화 중반부에 곽도원은 괴물로 변한 쿠니무라 준을 만나는 꿈을 꾼다. 이 영화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이나 상상인지의 경계가 흐릿함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부제가 죽었다던 쿠니무라 준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렇다. '네가 악마를 만나러 왔으니 나는 악마다'라는 메시지는 어쩌면 종교인이었던 부제의 내면의 갈등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악마는 여기서 '네 맘대로 내려가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확신했던 의심들을 버리기 쉽지 않다. 물론 그 의심의 과정까지는 자의적이었을지라도.


나는 이 영화가 나홍진 감독의 전작인 황해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황해에서는 어떤 별개의 사건들이 우연한 계기로 개연성을 갖게되고 결국 하정우는 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정우는 그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게 없었다. 이 영화는 곽도원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게임인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곽도원이 선택해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불행은 그대로 존재했고 불변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래서 나는 관객이 '천우희인지 아니면 쿠니무라 준인지'를 찾는 게임 자체가 감독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가 맞딱뜨린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개연성을 찾아 조각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글쎄 원인같은 게 처음부터 존재했을까? 이 영화는 살인자와 살해자가 누구인지 다 보여주고 있는 영화였다.


- 개인적인 해석이니 걍 무시하셔도 됩니다. 영화리뷰같은거 써본 적 없습니다. 허접합니다.


- 영화를 두번 봤습니다. 첫번째 보고 저도 범인찾기 게임을 했고 두번째는 절대 개연성 같은 걸 찾지 말아보자고 다짐하고 봤습니다. 


-곽도원 일당이 트럭에 무기 실을때 재밌는 거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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