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된 광주, 그리고 사살 명령
80년 5월의 광주는 공인된 기록이다. 그 기록은 두 축이다. 하나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광주의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광주의 시민들이 이 군부에 맞서다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이 두 축 중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아니, 은폐되었던 사실이 이제서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간 기록은 전두환이 광주 시민의 정당한 저항을 ‘과잉진압’ 했기 때문에 내란죄가 된다고 설명했다.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재판부의 ‘과잉진압’이라는 평가는 전두환의 발포명령 부정으로도 연결된다. 전두환에게 일반 시민에 대한 살해 목적이 없었다는 의미다.
″(전두환이 관여한 자위권 발동)을 ‘무장시위대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발포하여도 좋다’고 한 것으로 볼 수는 도저히 없으며 이들을 그러한 취지로 해석하여야 할 다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고법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전두환은 그간 자신의 범죄 혐의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광주 시민들이 총기를 들고 ‘폭동’을 벌였기 때문에 진압을 할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대법원과 전두환이 5.18 민주화 운동에 내린 평가는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정당하냐’에서 갈렸다. 그 결과로 전두환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일반 시민에 대한 발포 명령에 대해서는 전두환과 재판부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전두환이 유죄 판결을 받은 지 22년이 지났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는 39년이 지났다. 매해 이 즈음이면 광주에 대한 보도들이 언론을 뒤덮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의 보도 양상은 조금 다르다. 새로운 내용이 쏟아지고 있다. 그 내용을 종합하면 우리는 22년전 공인되었던 기록, 우리가 알고 있었던 광주와 전두환이 달라진다. 광주는 시민들이 저항하기 전에 이미 신군부에 의해 기획된 것이었으며 전두환은 그날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린 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이다.
2017년 전두환은 회고록을 펴낸다. 이 책에는 한 신부에 대한 모욕이 담겨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으로 활동했던 故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조비오 신부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헬기를 통해 사격을 했다고 진술했다. 조비오 신부는 지난 2016년 소천했다. 그의 유가족은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이후 ‘헬기 사격’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진다. 전두환은 헬기 사격을 지시하지 않았으며 실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근거도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시민들의 증언이 잇따랐다. 그리고 이 논란은 30여 년간 침묵했던 관계자들의 증언까지 이른다.
지난 13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광주행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주장하는 김용장씨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 특명부장이었던 허장환씨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두환은 21일 점심시간 당시 헬기를 타고 왔습니다.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졌고.. 이런 것들을 감안하면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 김용장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던 전두환은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에 방문했으며 또 ‘발포명령’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헬기가 호버링 스탠스 상태서 사격하는 건 실시간으로 명령을 받습니다. 체계화 된 사격체재입니다. 전일빌딩의 사격은 호버링 스탠스 상태서 사격을 한 겁니다.” - 허장환
전두환이 당시 광주에 직접 갔다는 증언은 또 있다. JTBC는 지난 16일 전 공군본부 보안부대장의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씨와 인터뷰한다.
″오전에 우리 부대장 출근하시고 얼마 안 있어서 호출이 와서 부대장님 모시고 ‘용산헬기장 빨리 가자’ 그래서 갔더니 헬기는 대기하고 있었고요. 공군 헬기고요. 그리고 도착하는 거의 동시에 전(두환) 사령관도 거의 동시에 도착했어요”
앞서 김용장 씨는 ’21일 점심시간‘에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고 증언했다. 오원기 씨는 전두환이 떠난 시간을 10시 30분경으로 추정한다. 헬기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오씨는 ‘전두환의 출발 당시‘를 김씨는 ‘전두환의 광주 도착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전두환이 정말 발포 정도가 아니라 ‘사살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직 김씨의 증언에만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전두환이 ‘광주로 갔다’는 것은 서로 다른 복수의 증언에 의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그럴 신분에 있지도 않다는 전두환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간 광주는 ‘시민의 저항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 진압‘으로 정의됐다. 그러나 최근 나오는 이야기는 이 정의의 선후가 바뀌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즉 군부가 ‘폭력적 진압‘을 위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는 앞선 두 정보요원 김용장씨와 허장환씨의 주장이다.
″전두환 씨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정권 찬탈을 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여러 도시를 예상을 하고 사전에 대상이 올렸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광주를 타겟으로 삼아야 되는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5.18은) 이런 필연성에 목표를 둔 명확한 시나리오입니다. ”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정치를 장악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극렬한 시위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
전두환은 광주를 선택한다. 5.18 민주화 운동 발생 하루 전인 17일, 호남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내란음모죄로 잡아들인다. 광주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속에도 광주는 크게 격렬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두환은 편의대(평상복을 입고 후방에서 교란업무를 하는 군대)를 투입한다. ‘유언비어 유포조’, ‘장갑 탈취조’, ‘무기고 탈취조’ 등의 편의대가 시위 강경진압의 명분을 만든다. 즉, 광주가 생각보다 격렬해지지 않자 전두환은 온갖 공작을 통해 광주를 들끓게 만든 것이다.
″(광주를)더 극대화를 시켜야 국난을 극복하는 전두환 장군이다. 이런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 15일 YTN 보도에 의하면 당시 2군 사령관 진종채는 전두환에게 충정작전(탱크까지 동원된 유혈 진압 작전, 광주 재진입 작전이라고도 불린다)을 보고했고 전두환이 ‘굿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는 문건이 등장한다. 전두환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포함한 광주 폭력 진압의 ‘총 책임자’였으며 광주가 그들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경향신문은 지난 17일, 미국 국방정보국에 보고된 문건을 입수했는데 여기에는 “계엄령의 전국 확대는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완전한 권력 장악을 위해 한 걸음 다가선 조치”이며 “국내 상황에 대한 전두환의 부정적인 분석과 북한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 입성을 위한 포석일 뿐”이라는 평가가 담겨있다. 이는 5.18 발생 즈음에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이 전두환을 만나고 작성한 보고서다. 즉 미국 측은 ‘전두환이 청와대에 들어가기 위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내외적 위협을 강조’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앞선 두 정보요원은 광주가 ‘국내외적 위협’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나리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8일, 광주로 갔다. 그는 “내년이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며 그때 참석하면 좋겠다는 참모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올해 기념식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광주 시민들께 너무나 미안하고 너무나 부끄러웠고,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 대통령은 “오월은 더 이상 분노와 슬픔의 오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오월은 희망의 시작, 통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노의 오월이 희망의 오월로 전환되는 조건을 이야기했다.
“학살의 책임자, 암매장과 성폭력 문제, 헬기 사격 등 밝혀내야 할 진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광주가 짊어진 무거운 역사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며, 비극의 오월을 희망의 오월로 바꿔내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었던 내용일 것이다.
지난 2018년 3월 13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바로 앞서 제기된 의혹들, 80년 광주에 대한 은폐되거나 왜곡된 진실들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이 법을 토대로 여야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유한국당은 자기 당의 몫으로 권태오 전 한미연합군사령부 특수작전처장, 이동욱 전 월간조선 기자, 차기환 변호사 등을 추천했다. 이들 모두는 진상규명 특별법에서 바로잡고자 하는 ‘왜곡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진상조사를 막기 위해’ 투입한 인물이다.
정부는 자유한국당 추천인 중에서 권태오, 이동욱에 대해서는 “법에 규정된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재추천을 요청했다. ”한국당 추천 차기환 후보의 경우 이미 국민적 합의가 끝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이라고 우려할만한 언행이 확인됐지만 법률적 자격 요건을 충족하고 있어 재추천을 요청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은 자신의 추천이 거부당하자 더 이상 조사위원 추천을 거부하고 있다. 지난 2월 이후 진상규명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오월의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 학살당하는 광주를 방치했다는 사실이 같은 시대를 살던 우리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같은 시대, 같은 아픔을 겪었다면, 그리고 민주화의 열망을 함께 품고 살아왔다면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5.18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습니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80년 5월 광주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전환의 시작은 진상규명에서부터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80년 5월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다. 우리는 5월을 계승한 시대, 2019년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