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몇 해 전, 나는 한 토론대회에 나갔다.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올라가서야 첫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주제는 ‘서울대 폐지론’이었다. 논문과 자료를 찾고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대 폐지론이라는 네이밍은 과격했지만 실제 내용은 그리 과격하지 않았다. 결국 ‘학벌 카르텔’을 해체하기 위한 어떤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였다.
십몇개의 논문을 읽고 자료를 찾고 나서 나는 ‘꽤나 공들여서 연구했다는 이 연구들은 현실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대 폐지론’이라는 이름 아래 연구된 ‘대학네트워킹’이라는 시스템은 전체 대학을 하나로 묶어 고등교육을 희망하는 학생이 희망하는 전공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 입학지를 배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물론 각론에서는 연구자들마다 차이를 보인다). 이 대학네트워크라는 모델의 연구자들은 네트워킹으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 가령, 특정 전공에 학생이 몰리는 현상, 특정 지역에 학생이 몰리는 문제, 사립대들을 어떻게 네트워킹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고등교육의 평준화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해 나름의 고민과 해답도 내놨다. 내가 ‘현실성이 없다’고 결론 내린 이유는 단순히 연구자들이 제시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 공부를 하는 내내 한 가지 문제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사람들은 명문대에 진학 하려고 하는가?’ ‘왜 학벌 문제는 한국에서 유독 더 심할까?’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학벌 카르텔 해체의 선결문제로서의 소득문제’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더 많이, 더 전문적으로 배울수록. 혹은 더 우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 높은 소득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랑제꼴과 같은 엘리트 교육 모델의 필요성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다. 나는 이런 견해를 꺼낼 때 종종 ‘얼음물 정수기’를 비유로 든다. 좀 더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사회 전체 생산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들은 얼음물이 나오는 좋은 정수기를 쓰는 정도의 편리함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냉온수기를 쓰는 정도의 불편함만 감수하는 정도. 무엇을 생산하고자 하는 사람의 동기를 앗아가지 않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의 생존을 박탈하지 않는 상태의 균형이 사회를 더 진보시킨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설계하는 것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낭만적인 생각들이 한국에서는 작용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교육(정확히 말하면 학벌)에 대해 광기와 같이 집착하는 이유도 그런 시스템이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보였다. 한국 땅에서 학벌의 의미는 ‘프리미엄’을 얻기 위함보다 패널티를 피하기 위한 조건 같았다. 사람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 정규직’에 들어가는 것으로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믿음 보다는 좋지 않은 대학을 나와서 변변찮은 직업을 구할 경우 평생의 삶이 괴로워진다는 확신이 더 커 보였다. 사회 안전망이 부족한 상태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의 등급은 일종의 국가가 내팽겨친 사회 안전망의 대안으로서의 보증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좋은)대학을 나오지 못할 경우 평생에 걸쳐 생계와 시름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는 목적 없는 간판 경쟁으로 이어졌다. 수학의 욕구와 크게 상관없는 학벌취득경쟁은 날로 높아져갔다. 자신의 자녀들이 ‘생존 가능한 취업 시장’에서 배제 당하는 것을 염려한 부모들은 가능한 자원들을 동원해 자식 교육에 투자했고 이는 학벌 카르텔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머지않아 졸업장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구조적 문제는 내버려둔 채 인플레이션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배제 기준’을 만들다 보니 명문대 졸업장으로는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몇몇 학과로 사람들이 몰렸고 ‘취업에 도움 되지 않는 학과’들은 효율성이란 이름하에 폐과되었다. 대학은 이 호황기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등록금을 올려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호황기는 끝났다. 명문대 졸업장이 더 이상 대기업 정규직 취업을 보장하지 않았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도 취업경쟁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순간이 왔다. 어느 순간 대학은 그 투입되는 비용보다 좋은 효율을 내지 못했다. 한때 80%가 넘었던 대학진학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학 등록금도 오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명문대를 나와도 저소득 비정규직에 종사할 수 있다는 현상을 목격했다. 계층 이동은커녕, 적절한 소득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대학 졸업장은 더 이상 값비싸게 사야 할 물건이 아니었다. 대신 기꺼이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금수저’들이 명문대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 ‘학벌이 큰 상관없는 낭만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득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대, 고졸 혹은 그 이하의 배움만 가지고도, 비록 부유하지는 않을지언정 생계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은 삶. 대학 간판의 부재가 패널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프리미엄으로만 작용하는 방향. 그래서 생존 때문에 떠밀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해서, 원하는 공부를 하는 세상. 누구나 대학을 다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와야 비로소 학벌이 ‘카르텔’로서 작용하지 않을 실마리가 잡힐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 간판이 그런 방식으로 힘을 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이야기도 다분히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다.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공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현실은 더 지옥이 되고 있다. ‘명문대를 나온 흙수저’들의 삶은 그들이 따낸 ‘명문대’라는 타이틀보다 그들이 원래 흙수저였다는 사실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전제다.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서울대를 아무리 해체해봤자 어떤 방식으로든 서열은 재생산될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문제는 서울대인가? 명문대인가? 대학 졸업장, 소위 ‘학벌’이라고 명명된 것에 투사된 욕망들이 나쁘다면 그 욕망의 원인을 조명하는 게 옳은 것인가? 아니면 표상으로서의 명문대 네임택을 숨기는 게 옳은 것인가? 나는 강력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벌하는 것’이 옳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다양한 원인들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엄벌로서 위하효과를 얻겠다는 주장하는 것보다 낫다. 증오를 기반으로 하는 엄벌은 누군가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사실 외에 다른 효과는 거의 없다. 물론 ‘엄벌주의’보다 진보한 형사정책을 취한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유토피아는 찾아오지 않는단 사실도 안다.
누군가가 명문대 이름이 달린 대학 점퍼를 입고 자부심을 느끼고 그 기득권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으며 페이스북에 출신 대학을 적어놓는 행위들이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모두 다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의문이 든다. 누군가가 SNS에 자기 학벌을 전시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는 학벌로 인한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의 박탈감은 고작 페이스북에 내걸은 신상 몇 줄 때문인가? 자꾸 눈에 거슬리는 대학 점퍼 때문인가? 누군가는 비판에 대한 해명으로 ‘자신은 그런 의미로 대학 이름을 내건 것이 아니’라며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또 누군가는 자기의 출신 대학을 지우고 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의 단초는 마련 된 것인가? 모두가 그렇게 자기 출신학교를 지워버리면 그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인가? 만약 ‘명문대’만 출신 학교를 지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명문대의 기준은 누가 정할 것인가?
물론 점퍼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다. 성찰을 유도할 수도 있다. 페이스북에 몇 줄 적어놓은 신상에 대해서 비판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게 잘못되었단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선거 때 단지 2번을 찍지 않았단 이유로 죄책감을 부여하며 정죄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2번을 찍으란 주장을 효율적인 방법론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고 하나의 과정으로서 설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2번을 찍지 않았던 다양한 맥락들을 거세하면서 그 선택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이었나? 결국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만들어낸 이상은 없지 않은가? 아 물론 문제제기자들의 도덕적 우월감과 자존감이 채워질 수 있다는 부수적인 효과는 있다.
메갈리안들이 ‘미러링’으로 여성혐오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벌에 관한 문제를 제기를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물음도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고민할 건 하나 있다. 나는 남성기득권자로서 가급적 ‘한남충’같은 배제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 나에게는 같은 남성을 배제하고 도덕적 우위에 설 자격은 없다. 소위 ‘명문대’ 출신이 학벌에 대해 내뱉는 ‘공격적인 지적’들이 ‘당신도 기득권을 이용하지 않았느냐’는 반박에 직면하는 사실도 같은 이유가 아닌가? 학벌 문제는 젠더 문제처럼 비교적 명확하게 ‘범주화’되는 문제가 아니다. 수혜자와 피해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