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베트남의 전당포
지난 2016년, 베트남 동나이 지방에 사는 한 남성은 월 금리 20%짜리 사채를 당겨썼다. 연으로 따지면 1000%에 가까운 살인적인 이자다. 이자에 이자가 계속 붙으면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고리대금업자들은 남성에게 빚을 받아 내기 위해 폭행도 일삼았다. 남성은 사채빚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또다른 베트남인 B씨는 2017년 어머니와 배우자, 그밖에 가족들을 남기고 도주했다. 가족에겐 2억 동, 우리 돈으로 천만원의 빚이 남겨졌다. 대부업자는 B씨의 집에 수시로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돌을 던졌다. B씨를 찾으면 죽이겠다는 협박도 일삼았다. 호치민에 거주하는 C씨도 2016년 초 대부업자로부터 9천만 동(450만 원)을 빌린 후 도주한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되었다. 대부업자들은 원금의 3배인 2억5천만동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베트남에서 가장 흥했던 곳 중 하나는 전당포 (Cam do : 깜도)다. 이때 전당포들은 대출 이자를 평소에 두배로 올렸지만 사람들은 평소보다 네배 이상 몰렸다. 몰려드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감당할 수 없어서 창고를 구해야 했다. 창고 임대 매물이 덩달아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전당포는 통상 9-6로 영업하지만 국제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때면 24시간 근무 체제로 바뀐다. 주말도 쉬지 않는다. 축구 열기가 뜨거운 베트남에서 국제경기가 열리는 시점이면 도박도 같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전당포마다 오토바이, 휴대전화기, 노트북 등 고가의 담보물을 받아 챙겼다. 가족 몰래 부동산 서류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전당포들은 고리의 이자를 받아 챙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빌린 돈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할 경우 담보물을 팔아 원리금을 회수하는 게 사업의 주된 방식이었다. 담보물에 대한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폭력조직과 결탁하는 사례도 흔했다. 큰 국제경기가 벌어질 때면 도박으로 값비싼 물건을 탕진한 서민들의 자살이나 음독 사고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소매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은 틈을 타 전당포가 그 역할을 대신했고 당국에 규제가 제대로 닿지 않은 탓에 서민들은 별 규제 없이 전당포를 이용해 대출 받았다. 사람들은 도박 등에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손쉽게 전당포를 이용했고 전당포도 사람이 몰리는 탓에 규정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받았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국영 은행과 경찰 등 베트남 당국이 국민들을 상대로 고금리사채 이용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리의 사금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베트남 국가 은행 감독국의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 4년간 베트남에서의 고금리사채 범죄 건수는 7624건이었다. 이 중 살인은 56건, 강도는 629건, 사기는 1809건이었다. 고리의 사채가 범죄 양산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베트남 당국은 지난 2017년 개정 민법에 “금리는 대출 금액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연 100%를 넘는 이자를 챙기는 고리대금 업자에게 형사처벌을 명시한 형법 개정안도 내놨다. 하지만 이런 규정도 크게 의미가 없었다. 대출 회사들은 우회로를 마련했고 이 또한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지난 2018년 푸뉴언(Phu Nhuan)에 사는 한 베트남 남성은 온라인 사이트에서 돈을 빌렸다. 이자율은 19.9%로 규제 범위 내였다. 그러나 이 대출사이트에는 이자율 말고 관리비가 부과됐다. 하루에 2%로 한달로 치면 60%다. 즉 이 대출사이트의 월 금리는 8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금리를 제한한 규정을 간단하게 우회해 버린 것이다.
금융 공백을 채우려는 베트남 당국의 노력
베트남에서 은행 문턱을 넘기가 쉽지는 않다. 금융업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탓에 당국이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불신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베트남 현지인들은 자국 은행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정권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은행에 맡긴 돈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은행 불신과 규제 공백으로 금융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지만 민간의 소매금융에 대한 수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수요를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체가 채웠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고금리사채업자를 통한 대출 규모가 약 2조5000억 동(약 1205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고리대금업자들은 각종 사회문제를 만들어냈다. 베트남은 소매금융 수요를 양성화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2019년부터 국책은행인 농업은행(Agribank)를 통해 5000억 동(한화 약 250억)규모의 긴급 구제 자금을 투입했다. 농업은행 측은 베트남 내 소매금융의 취약점을 예로 들며 정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다오 민 뚜 농업은행 부행장은 “갑자기 가족 중 환자가 발생해 병원비가 필요한 경우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 3~5일을 기다릴 수 없다”며 “생활에 필요한 긴급 자금을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3,000만 동 이하는 간단한 절차를 통해 합리적인 금리로 대출받게 할 것”라고 설명했다. 뚜 부행장은 “정부는 은행들이 저소득층을 위한 소비자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고하도록 한 상태”라며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시골이나 금융 서비스 소외 지역의 고금리사채업은 확실히 억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폭리를 취하는 대부업자들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민간에서도 일고 있다. 소위 ‘착한 전당포’로 불리는 F88의 등장이다. 2013년에 처음 문을 연 F88은 대출잔액 6000억동(한화 약 300억)이 넘고 거래 건수도 연간 5만 건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2019년 9월에는 100번째 점포를 열었다.
F88의 성공원인은 ‘전당포의 양성화’에 있었다. F88은 다른 불법 전당포들과 달리 담보물을 매각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소매 금융’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다. 담보물의 가치도 현실적으로 매겼다. 휴대폰, 노트북 등의 담보물에 대해서는 대출과 동시에 봉인하고, 만약 화재가 나 담보물에 피해가 생기더라도 보상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담보물 관리도 철저히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F88이 소비자를 당긴 요인은 금리였다. F88의 금리는 월 1.1%다. 연으로 따지면 13.2% 수준이다. 이자만 따지고 보면 법정 이자를 준수하는 일반 은행들이 제시하는 대출 금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여기에 담보물 보관 수수료, 대출 평가 수수료, 관리 수수료 등이 붙는다. 관리 수수료 등을 포함하면 월 이자는 6%로 낮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있다. 다른 전당포들이 워낙 폭리를 취하는 탓에 월 6%의 이자는 비교적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고리대금업자와 다른 사설 전당포의 횡포에 시달린 베트남 서민들에게 F88은 매력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었다.
아직은 높은 문턱, 조심스럽게 빗장을 열어젖히려는 베트남
베트남 소매금융 시장의 잠재력이 매우 크다. 베트남 금융감독위원회에 따르면, 베트남 소비자대출시장(consumer lending market)은 2016년에 50.2%, 2017년에는 65% 성장했다. 특히 주택(52.9%), 가구(15.3%), 자동차(8.3%) 구매를 위한 대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월드뱅크는 아시아ㆍ태평양 지역 개발도상국의 은행 계좌 보유 비율이 60%가 넘는데 반해 베트남은 30%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대출 인구 역시 인근 태국(71%)에 비해 훨씬 낮은 37%에 불과했다. 베트남 소비자 금융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지표들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다수의 한국 금융기업들은 베트남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을 비롯한 총 9개 은행이 진출한 상태이며 한화생명, 롯데카드, 현대카드 등 비은행금융기업들도 진출했거나 진출을 노리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는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2017년 호주계 베트남 은행인 ANZ은행의 베트남 소매금융 사업부문을 인수하며 몸집을 불린 신한은행은 베트남 내 소매 대출액을 2017년 7억2000만달러에서 2018년 9억5200만달러로 1년 만에 32%나 늘이며 HSBC은행을 제치고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1위 규모를 달성했다.
신한은행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 우리은행도 현재 총 11곳의 지점을 확보하며 영업망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여수신 업무 외에도 방카슈랑스 신용카드 분야까지 영업분야를 확대하고 있는 우리은행은 지난해 3분기까지의 누적 순이익이 전년 동기대비 32.8% 증가한 102억500만원을 기록하며 착실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순탄하게 영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행은 지난 2017년 7월 베트남중앙은행(SBV)에 법인인가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아직까지 인가를 받지 못했다. 외국계 은행의 무분별한 자국 진출에 베트남 정부가 제동을 걸어 나섰기 때문이다. 베트남 브엉딘후에(Vuong Dinh Hue) 부총리는 지난 2018년 8월, 베트남 금융 시스템 강화 및 기존 베트남 금융기관들의 내실을 다지고 국내 금융시스템 강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투자자에게 신규 금융 라이선스 발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업은행이 라이선스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 당국이 무작정 외국 은행에 빗장을 걸어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베트남의 금융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시장 안정화 및 금융시스템 개선을 위해서 외국 자본을 적절히 활용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외국계 은행이 현지에 직접 은행을 세우기는 까다롭게 만든 반면에 해외자본이 현지은행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을 통해 100% 해외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은 허용했다. 즉 베트남은 자국에 대한 글로벌 자본의 금융업 투자는 허용하되 반드시 자국 은행을 거쳐서 하게끔 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베트남에 진출하는 한국계 금융사들은 현지 은행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NH농협은행은 베트남 최대 국책은행(지점 2230개)인 농업은행(Agribank)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해 논의 중이며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7월 베트남 자산 1위 은행인 베트남투자개발은행 지분 15%를 1조249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우리은행과 롯데카드, DGB대구은행 등도 베트남에 직접 진출하거나 현지 금융사와 협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 중이다.
떠오르는 베트남 시장, 소비시장 확대에 금융은 필수불가결
신한은행의 베트남 내 영업은 철저히 ‘소매시장’에 집중돼 있다. 베트남 국민 메신저인 잘로를 통해 신규회원을 유치하고 있으며 베트남 간편결제 업계 1위인 ‘모모’와 제휴해 신용대출을 받고 있다. 또 베트남 2위 부동산 플랫폼 업체인 ‘무하반나닷’과는 담보대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함께 ‘삼성페이’ 선불카드 서비스를 추가로 내놨다. 모두 소매금융을 공략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제2금융권인 현대카드도 베트남 진출을 선언했다. 현대카드는 베트남 중견은행인 'MSB'의 자회사이자 소비자금융 전문회사인 'FCCOM' 지분 절반을 490억원에 인수하며 진출 준비를 마쳤다. 현대카드가 집중 공략할 곳은 신용카드와 할부금융이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현대·기아차와의 연계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현대·기아차 판매량이 최근 3년간 두 배 가까이 증가했기 때문에 자동차금융에 대한 수요가 많을 것으로 본다"며 진출전략을 밝혔다.
한화그룹은 베트남 1위 민영기엽 빈그룹과 손을 잡았다. 한화는 2018년에 한화금융네트워크 계열사를 통해 4억달러(약 4500억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미 한화생명을 통해 베트남 시장에 기반을 다져 놓은 한화그룹은 이를 바탕으로 소액대출과 할부금융, 더 나아가 자산운용, 투자증권까지 금융 전반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빈그룹이 자동차 제조사업을 시작한 상황에서 한화는 빈그룹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손해보험, 자동차 할부 시장으로 영역을 넓힐 수 있다. 한화 측은 빈그룹과의 합작사 설립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밖에도 한국 여러 금융사들이 베트남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롯데카드는 최근 베트남 중앙은행으로부터 테크콤 파이낸스 지분 100% 인수를 승인 받으면서, 국내 카드사 중 처음으로 베트남 신용카드 라이선스를 획득했다. 하나카드는 최근 베트남 중앙은행 산하의 국제결제원과 결제솔루션 제공업체인 알리엑스 등과 베트남 지급결제 활성화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비씨카드도 지난해 베트남 국제결제원과 결제업무협약을 맺었다. 앞선 기업의 공통점은 모두 기업이 아닌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영업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1억에 육박하는 인구, 젊은 층이 절반을 차지하는 시장, 탄탄한 성장세로 국민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비하기 위해 할부 금융이나 집을 구입하기 위한 담보대출, 급전을 처리하기 위한 소액 대출 등의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의 중장년층은 여전히 금융권을 불신하며 현금결제를 선호하지만 젋은 층은 ‘모모’와 ‘잘로’를 이용한 간편 결제에 익숙하다는 점도 앞으로의 시장 확대를 가늠케 한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전망이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다. 지난 2018년 베트남 당국이 외국인투자자에게 신규 금융 라이선스 발급 중단을 결정했던 것처럼 베트남 정부가 언제 또 자국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빗장을 걸어 잠글 지 모른다. 진출 기업들은 ‘베트남 국내 정치’라는 불확실성을 안고 움직여야 한다.
*이 글은 Veyond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