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말한 천국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2,000년 전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왕이기 때문에 사형을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실질적으로 이끌며 내란·선동을 주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외는 사도신경에는 ‘본디오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를 처형한 주체는 본디오빌라도였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이었죠.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여러 나라 중 유대인들은 조금 특이한 민족이었습니다. 유독 로마에 대한 저항이 심하기도 했죠. 그래서 로마는 유대인들의 자치를 폭 넓게 허용했습니다만, 딱 하나 ‘정치범’만은 직접 챙겨 처형했습니다. 이는 로마와 식민지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러니까 예수가 로마 총독에게 직접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은 그가 당대 유대인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지도자로 인식되었고 그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뜻합니다.
예수가 어떤 정치적 지도자였는지는 한국 교회에서 잘 가르쳐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성이 부여된 절대자로서만 언급될 뿐이죠. 예수의 가르침이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희 모두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니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괴롭힘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지배-피지배, 착취-피착취의 개념이 굳건했던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예수가 태어났던 갈릴리 마을은 가난한 피착취자들의 땅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한 착취뿐만 아니라 유대인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도 횡행했죠. 사람들은 힘들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매일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죠. 그러니 반란도 빈번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니 목숨을 걸고 싸웠죠. 그러나 로마의 군대, 그리고 그 군대의 보호를 받는 지배자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을 때 예수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신의 피조물이기에 그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예수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들이 착취당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전파했습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천국’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말한 천국은 사후의 개념이기보다는 ‘지금 현재 건설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예수는 천국이 ‘이곳에 임한다’고 말했죠.
예수는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누가 18:15)이라고 했습니다. 요새 교회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의심 없이 믿으라고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만 당대의 맥락과 같이 해석하면 조금 다른 의미가 됩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아동운동을 하기 전 한국의 아동들의 인권상황이 그랬듯 당시에 어린아이의 인권은 더 열악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예수는 천국이 바로 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약한 자, 부족한 자, 착취당하는 자들이 그 억압에서 벗어날 때야 비로소 천국이 건설된다고 이야기한 거죠.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가르침을 설파했던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았습니다. 그 중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유대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신정국가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독점하고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자기 주머니로 챙겼습니다. 더 많은 돈을 들이면 더 큰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속여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게 전통이었든 아니면 율법이었든 예수에겐 그저 사람들을 착취하는 부조리로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득권 장사치들을 향해 채찍질을 합니다. 결국 이 사건 뒤로 예수는 죽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본디오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예수의 죽음을 사주했던 건 유대의 제사장과 기득권자였습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당시에 예수가 누구를 비판했는가는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착취자(로마), 민족 내부의 기득권자(제사장), 그리고 중간 권력자들은 모두 ‘천국’을 방해하는 이들이었죠.
종종 교인들은 바리새인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당대 바리새인들은 존경받는 종교인의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민중의 윤리적 문제를 꾸짖었고 형식적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정죄의 권위를 싣기 위해서 그 자신도 흠결 없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만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정죄가 민중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봤습니다. 피착취자로서의 민중에겐 그런 정죄도 짐이었죠.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바리새인을 비난의 표본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저는 이 광경이 아이러니합니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어린아이를 위한 천국’ 같은 거엔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율법의 모양새를 한 성경책을 들고 와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행실이 바른 어떤 교인은 예수가 비판했던 바리새인과 닮아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은 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불법과 착취를 저지르는 기득권 제사장의 모습과도 닮아있습니다. 저는 교회의 이런 행동들이 교회에 대한 불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개신교의 신도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성소수자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당대의 사회적 인식을 모두 벗긴 힘들었을 겁니다. 예수는 역사와 동떨어져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존재했으니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는 그들을 배제하진 않았단 사실입니다. 그들의 존재 그 자체를 ‘신의 피조물’로 받아들였죠. 이는 예수가 ‘배제된 자들’에게 보였던 일관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관련기사 : 성서는 성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시대의 상황에 맞춰, 동시대를 사는 민중의 인식에 따라 새로운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예수가 말했던 천국의 주인, 즉 ‘어린아이’들에 지금의 소수자들을 대입할 수 있을 겁니다. 성 소수자, 여성, 빈자 등이 떠오릅니다. 지금 예수가 등장한다면 이들을 위해 몸을 바쳐 싸울 겁니다. 그게 예수가 말했던 천국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는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지도 모릅니다. 2,000년 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유대의 기득권 제사장들이 그랬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테니까요.
오늘 날에도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고통 받으며 천국이 임하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을 누가 만들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예수의 가르침이 공허한 목소리로 떠도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 뒤 성소수자 문화축제가 서울 광장에서 열립니다. 이곳에는 또 반대의 목소리로 ‘주여 주여’를 외치는 개신교인들이 한 곳에 자리를 잡을 겁니다. 익숙하지만 무섭습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그 존재 자체로 위협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예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마태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