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잘 사는 것은 더 어렵다
오늘은 아침 늦게까지 긴 잠을 잤다. 꽤나 긴 잠을 잤음에도 긴 꿈을 꾼 탓인지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긴 꿈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에 전기가 지나가는 통로를 다닐 수 있는 거미가 생겨났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거미는 전기를 먹고 사람을 공격한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이 거미가 서울을 시작으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그 피해가 발견되지 않아 모든 가족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피난을 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마치 영화의 설정처럼 들리지만 그저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터무니없이 꾸는 그런 꿈이라는 것은 다음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꿈속에서 잠에서 깬 나는 갑자기 찾아온 가족들을 보고 놀라며 이 모든 내용을 핸드폰 뉴스 페이지를 통해 접하는데, 놀랍게도 그 거미가 꿈속에 나에게는 조금도 중요한 화두가 아니다. 빠르게 세상의 소식을 접한 뒤, 아끼는 검정 원피스를 친척동생이 잠옷으로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언니가 그 원피스에 형광 마카로 낙서까지 해놓아서 말도 못 하고 마음으로 삭히는 것이 이 꿈에 마지막이다.
장황하게 늘어놨지만 결론은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서사적인 꿈을 꾼 것은 정말 깊이 잠들지 못했다는 반증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여유를 누리기 위해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살아야지!' 했던 어제의 다짐은 이 개운하지 않은 기상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듯하다. 게으른 아침을 그럭저럭 보내고 점심을 차려먹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니 다시 졸려왔다. 결국 내리 두 시간을 다시 자버리고 말았다. 후회와 함께 오후의 잠에서 깬 나는 '오늘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 하며 후회에게 새로운 이유를 찾아내 주었다. 오늘의 실패는 마치 깊이 잠들지 못한 밤, 그동안 커피에 의존하며 정신을 유지한 탓인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배도 고프다. 잠은 규칙적이지 않은데 배고픔은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것도 이상하다. 그러나 이제는 개운해진 정신을 더 또렷하게 하기 위해 긍정적인 마음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밖으로 나왔다. 저녁 7시. 도무지 집안에서는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침대가 소파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집 앞 카페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글을 쓸 요량으로 노트북을 켰다. 2014년부터 나는 감정 쓰레기통을 만들기 시작했고 어느덧 7년 차이다. 보통은 일기라고 부른다. 하루의 기록, 일기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매우 간헐적이고 감정적이고 글이라고 부르기에도 문장화도 안되어 있는 기록물에 불과하지만 이 기록집이 회사를 다닌다고 생각하면 벌써 과장급인 것이다. 과장 정도 되었으니 '이제는 혼자만의 기록물이 될지라도 성숙한 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에 에세이 쓰기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에세이라는 장르를 시작하려니 어떤 소재로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재적 독자도 유일하게 나 한 명이었기에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들이었다. 일단은 소재를 정하는 것도 어려우니 예전 일기들을 통해서 글로 발전시켜 보기로 결정했다. 비록 수많은 은어와 혼자만의 언어로 가득 차 있지만, 일상의 어떤 지점에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커닝 페이퍼처럼 암호로라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이 곳 일기를 통해 에세이 한편을 써 내렸기에 든든한 마음으로 일기를 하나씩 살펴보는데 문득 발전시켜 볼만한 글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럴만한 글이 없다는 것은 공개하고자 하는 용기 있는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공유한 에세이를 읽고 이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글과 낯가리는 것 같다' 라던가 '번역투인 것 같다'는 평가였다. 그 말을 듣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마치 정곡을 찔린 듯이 흠칫했다. 일기 중에서 그나마 가장 덜 감정적이며 개인적이지 않은 글을 골랐는데, 그럼에도 일기이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면모가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나에게 약간의 수치심을 주는 듯했다. 그 수치심이 내 글과 낯가리게 만든 것이다. 그 피드백을 기억하고 글을 써내려 가기 전, 다른 이들의 에세이 글을 살펴보면서 어쩜 그렇게들 담백하고 용기 있는지에 대해 존경스러웠다. 개인적 소재라는 큰 용기를 내지 않더라도 위트 있게 풀어내는 하루키의 에세이도 찾아 보면서 이렇게 창의적이면서 재밌게 풀어갈 순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글 하나를 끝낼 마음으로 시작했다. 미숙하지만 오늘 내딛는 걸음이 글과 나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주겠지. 중심 문장: 글은 어렵다. 하루를 잘 사는 것은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