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 낭만

쓰는 나 사용기

by 허허로이

'바람: 4 m/s'에 걸맞는 추위다. 따뜻한 남쪽 바람을 기대한 휴가였는데. 어제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이런 날에는 국물이라는 결심이 섰다. 바닷바람 짠내를 온몸에 뒤집어 쓰고 돼지곰탕집 2층 계단을 올랐다.


오전 10:02


지난해부터 빨간 네모 스티커를 받기 시작했기에, 오픈런이 아니라는 약간의 조바심을 안고 매장 문을 열었다. 뜨끈한 국물 냄새 온기가 안구를 후끈 덮어 낸다. 목부터 등으로 자르르 소름이 한 차례 훑고 지났다. 처음에는 직원인 줄 알았다. 'ㄷ'자 바테이블, 18명가량 좌석이 마련된 공간에, 9번째 자리 즈음에서 그녀는 혼자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직원인 줄 알고 '영업하시나요?'라고 냅다 정면에 말을 던졌다. 물론, 거리가 꽤 되었고 그분은 고개를 들지 않았고, '몇 분이세요?'라는 대답은 왼쪽에서 나왔다.


우리는 홀 오른쪽 구석에 자리를 골랐다. 모자 쓴 그분은 내 왼쪽, 홀 중앙에 앉은 거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냉제육에 정신이 팔리기 전까지 나의 관심은 온통 그녀였다. 나는 바람을 막고자, 일종의 내복, 그 위에 얇은 티셔츠, 맨투맨, 그 위에 바람막이, 목도리를 감았다. 그녀는, 반팔, 반바지, 러닝화, 러닝 모자를 쓴 채였다. 그녀와 나는 다른 계절에서,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물게 된 인연이다. 그녀의 손은 휴대폰을 놓지 않았지만, 앞에는 곰탕, 냉제육, 참이슬 병에, 아 빨간 뚜껑이군. 더하여 300ml 맥주컵 한 잔. 체격도 보통인 듯한데, 젊어서 그런가. 열이 많은 체질인가. 별스런 쉰 생각을 하면서, 내 몫의 국물을 서너 번 뜨는데, 그녀는 막잔을 따랐다. 나는 왜 그녀에게 이토록 관심을 쏟는가.


뭔가, 부럽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 아주 자연스럽게, 혼자이나 매장 전체를 취하고 있는 아우라. 낯설음 없는 담백함. 이 곰탕 국물처럼. 나도 손님이고 그녀도 손님인데, 이미 두 번째 방문인 내게도 이 장소는 매우 익숙하나, 그녀를 보니, 나는 이방인임이 선명해졌다. 나도 로컬처럼 머물고 싶은데. 머무는 장소에 동화된다는 건 길과 장소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저 손님처럼 자기 앞의 국물과 술잔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음이겠지?


국밥을 퍼올리는 숟가락이 바닥에 닿기 시작할 즈음, 그녀는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직원은 익숙하게 두 번째(?) 잔을 건넸고. 가볍게 원샷을 마친 그녀는, 유유히 가게를 떠났다. 흐트러짐은 커녕 말간 얼굴 빛 그대로. 9번째 좌석은 곧 다른 관광객의 기대가 채웠고, 내 마음속엔 빨간 뚜껑 소주만큼이나 강렬한 이방인을 향한 동경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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