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나 사용기
어제 피드에 뜬 한 줄 뉴스.
프랑스 대표 장르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른 '눈물을 마시는 새'
가슴이 웅장해진다! 눈마새가 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니! 이 감동을 기억할 수 있도록 뭐라도 써야 한다. 그런 심정으로 무작정 글쓰기 화면을 열었다. 후보작은 모두 6편이고 그중에 포함되었다는 기사였다. 이미 3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는 뉴스를 이제야 보다니. 그 놀라운 문장들을 번역해 냈다는 건데, 번역본을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벅찬 응원을 보낸다.
언제부턴가 나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굳이 눈마새로 부른다.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굳이 굳이 눈마새, 피마새라고 하면 말하는 나만 느끼는 짜릿한 어떤 것이 있다. 그 정도로 이 책을 읽었고, 옛날부터 팬이라는 자부심도 있다. 달리 말하면, 오래전부터 그 작품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안목(?)을 가졌다는 의미까지 확장할 수 있다. 1994년 퇴마록, 2002년 눈마새, 이듬해는 피마새. 한국 장르 문학의 뼈대 같은 작품이다. 물론 그 사이마다에 많은 작품들이 있고, 더 적다가는 얕아지고 있는 내 덕력의 노쇠(?)함을 자각하게 될까 봐 여기서 멈춰야겠다. 책장에 내 퇴마록 1권이 몇 쇄였더라? 덕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으로 줄임말 사용에는 그런 애정을 담은 것이다. 아는 사람들 만의 것이라는. 현재 내 주변에는 이 줄임말을 이해하기는커녕 이 소설을 아는 사람조차 없다.
생각이 곁길로 샜다. 늘상 이렇다. 덕질을 부채질하는 주제가 이슈가 되면 마음이 들뜬다. 오만가지 정보와 이야기들이 혀끝에서 맴돌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 중 12% 정도에서 멈춘다. 사회생활이란 것이 또 내 이야기는 나만 재밌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얼마 전에 오디오 북으로 눈마새를 들었는데, 글로 읽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이 들었다. 피마새로 넘어가려다, 책장에서 바로 그 책을 발견했다. 한 때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 걸어 다니면서도 읽고 싶게 만들었던 소설이다.
자, 여기까지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11% 였고, 이 공간은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나머지 1%를 기어이 적어야겠다.
팔란티어 (원제는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이후 부제로 바뀜)를 다시 펼쳐야 할 때이다. 이 걸작이 언젠가 국내에서라도 화려하게 다시 데뷔하기 바란다.
그때는 내 덕력 자랑보다 알아본 이들에게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하리라.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