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나 사용기
가끔은 오래전에 써 둔 메모들 중에서 다시 살려 쓰게 되는 것도 있고, 처음부터 새로 쓰는 경우도 있다. 비율로 치면 절반쯤 될까. 또는 시간이 지나 단서조차 흐릿해져 결국 버려지는 메모들도 있으니, 셋으로 나누어 1/3씩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그중에는 제목만 남은 글도 아주 드물게 있는데, 아마도 당시의 나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그렇게 반응하는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적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남아 있는 힌트는 고작 제목 한 줄이라, 아무리 들여다봐도 실마리가 잡지 못해 결국 삭제 버튼을 누르곤 한다. 지금 펼친 이 제목도 그런 유형이다. 다만 이번 것만은 지우는 대신, 기억나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기억하고자 구구절절이 타이핑 하는 중이다.
그 아쉬움이 꽤 컸던 탓에 온갖 검색과 AI까지 동원해 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어디선가 스치듯 만났을 문장일 텐데, 지금으로서는 출처를 알 길이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 “영혼이 살갗과 뼈 사이에 있다”는 상상은 지금의 나에게도 낯설다. 그럼에도 저릿한 느낌이 남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세 단어가 서로 떨어져 떠오르며 묘한 긴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연결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썼을 리 없는 문장이라는 확신만 남았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아마 비슷한 이유로 메모해 두었을 것이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꾸미지 않고, 단어 몇 개만으로도 읽는 사람을 붙잡는 힘. 고통이든 행복이든, 형용사 없이도 단어가 갖는 기운만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문장들. 그런 ‘대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늘 부러웠다. 한강 작가의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같은 문장처럼, 반드시 읽어 낼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진 글. 아마 그 문장을 지우지 못했던 이유도, 그 힘의 일부가 잠시 나에게 스쳤기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