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용기
근로소득자로 연차가 누적되면, 따라서 늘어나는 행태(?) 중의 하나가 '대명사' 사용이다. 대상은 사람과 일을 가리지 않는다. 출근 인사 후 첫 대화는 대개 이렇다.
"로이씨, 그거 어떻게, 거기서 그래서 그때까지 된데요?"
심화버전도 있다.
"저기, 그거 된답니까?"
정말이다. 유난히 심한 사례라는 지적을 받는다면야 수긍하겠지만, 거짓은 아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대화에 상습적으로 노출되면, 능력이 생긴다. 안 들었지만 듣고야 마는 능력.
"거기서 안된 데서, 저번에 그쪽 연락해 보려고요."
"그쪽이 어디지? 아 저번 달 그쪽?"
얼핏 들으면 매번 대화를 확인해야 하는 낭비 같지만, 놀랍게도 암호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외비를 지킬 수 있다. 물론, 내 일은 그런 분류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은 논외로 하겠다. 하루 일과 중 의도적 '인지'를 유지하는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서 이런 대화 습관이 굳어지면 나머지 생활에서 종종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회사란 사용하는 어휘가 한정되는 특정 공간이지 않은가. 그곳에서 굳어진 언어 습관이 기타 공간에서는 적절한 어휘 출력을 엄청난 도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쌓이는 연차에 따라 '저, 그, 이'만 쓰게 되니 뇌세포마저 '저, 그, 이'로 뭉뚱그려짐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위기감을 돌파하고자 대명사 덜 쓰기를 시도했다.
"팀장님, '가'업체 '나'부서 '박철수'과장님이 '39호' 보고서가 '다음 주 13일'까지 완료가 안된 데서, '다'업체 '라'부서나 '바'부서에게 연락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럽시다."
'그럽시다, 라니?'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오는가? 왜 내 말은 더 길어지고 팀장님 말은 더 짧아진 것인가?
모든 시도에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이 따라붙음을 이해한다 쳐도 섭섭하기 짝이 없다. 팀장님에게도 나와 같은 대화법을 쓰시라 종용할 수 없는 까닭에, 그 부작용을 나만 떠안게 되었다. 내 말만 길어지고, 내 말이 길어지니 내 입만 더 쓰고, 내 목만 더 쓰고, 내 시간만 더 쓰고! 오로지 나의 원하는 바를 위해 타인에게 협조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득을 할 자신도 없지만 저들이 설득을 당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말을 덜하게 되어 더 좋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남을 설득하는 것은 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내 어휘력이 걱정된다면, 내가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읽고 더 생각을 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여기에 글을 쓴다.
정말이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