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걷다가 달리게 된 순간

뉴욕 허드슨강 리버사이드 트레일

by Quiet Miles

달리기에 대한 생각

요즘은 러닝이 워낙 유행이라

너도나도 달리고, 러닝크루에 참여하고,

마치 그 흐름에 올라타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까운 지인 중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의 유행은 늘 빠르고 뜨겁고,

뭔가를 시작하면 끝판왕을 만들어내는 에너지까지 갖추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방인으로 너무 오래 지낸 탓인지, 그런 분위기가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욕, 2012년의 나


그 시절 나는 그저 무작정 걸었다.

한 시간, 두 시간...

8~10km 정도 걷고 나면 어느새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마 플로우 스테이트 (Flow State)에 들어갔던 게 아닐까 싶다.


센트럴 파크에서 새로 피어난 꽃에 발길을 멈추고,

가을이면 매일 달라지는 단풍색을 확인하고,

리버사이드 트레일을 따라 조지워싱턴 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갔다가 내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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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마켓을 구경하고 하이라인을 걸었고,

한산한 5가와 6가를 따라 브라이언트 파크까지 내려갔다가

뉴욕 공공 도서관에 잠시 들르기도 했다.


플랫아이언에서 미드타운까지 걸으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비즈니스들의 리듬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걸어 다녔다.


걸으며 생각이 풀렸다.

욕심이든, 열망이든, 열등감이든, 미움이든...

묵직하게 나를 누르던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느낌.


나에게 걷기는

어느 테라피스트보다 강력한 걷기 명상, 그리고 힐링의 매개체였다.


에너지 재생소,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남쪽에서 보트하우스까지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뒤섞이고,

가끔 유명한 배우들이 걷거나 뛰는 걸 보기도 한다.


벨베데레 성곽이나 램블, 레저부아가 있는 북단으로 올라가면

놀랄 만큼 한적하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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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산책시키는 로컬들,

거리의 퍼포머들, 그걸 화폭으로 담아내는 아티스트들,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노부부,

가끔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모습은

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어느 시간대, 어느 길을 걷든

항상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소소한 행복이 좋아

나는 거의 매일 그곳을 걸었다.

좋은 친구가 시간이 있냐고 물으면

늘 산책 데이트를 제안하곤 했다.


'나는 뛰지 못하는 사람'이란 선입견


학창 시절 오래달리기만 하면

숨을 고르지 못해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힘들었다.


다른 일에는 요령이란 걸 피우는 방법을 몰랐으나

이상하게 오래달리기는 네 바퀴를 돌고도 다섯 바퀴를 돈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난 절대 오래 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아주 단단히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아마도 리버사이드 파크를 걷고 있을 때 일 것이다.

시야가 뻥 뚫린 길에서 사람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나도 뛰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뛰기 시작했다.

엉성한 운동화에 제대로 된 운동복도 아니었지만

내 속도대로, 내 호흡대로.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살아있다는 감각이 전해져

그것만으로도 벅찼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걸어서는 못 갔던 리버사이드 파크의 북단을

달려서는 꽤 금방 도달하게 된 것도

신기하고 좋았다.


다시 멈춰진 시간


'그 후로 엄청 열심히 달렸다'거나 '본격적인 러너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결론이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리 쉬운 게 아니지.


뉴욕에서 약 일 년 반쯤 뛰다 걸어보는 생활을 하다

중부로, 다시 서부로 이사하면서

러닝은 자연스럽게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아이들의 라이드를 전담하고,

갑자기 일상에 들어온 반려견과의 삶에 적응하고,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워크라이브 밸런스를 찾아 헤매던 중,

책임져야 할 많은 일들 속에서

나는 또다시 스스로 만든 일상에 파묻혀 버렸다.


그런데도, 결국 하프마라톤에 도전하다


달리기를 이제 막 시작했다가

금방 멈춰버렸던 내가

어떻게 다시 달려 하프마라톤까지 완주하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천천히 풀어보려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때로는 그 두려움에 먼저 도전장을 던지는 것 아닐까.

여러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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