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신청해 버린 하프마라톤

나의 첫 '호카', 2017년 시애틀

by Quiet Miles

장거리를 달린다는 건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가끔 오래 걷다가 기분에 취해 잠깐씩 뛰어보긴 했지만, 몇십 분을 쉬지 않고 하는 '오래달리기'는 차원이 다른 영역의 일이었으니까.


얼떨결에 저지른 첫 하프마라톤 신청


시작은 동료들의 감미로운 유혹이었다. "내년 6월에 시애틀 록앤롤 하프마라톤이 있는데 같이 하자", "너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못 달린다", "원래 신청부터 하고 훈련을 시작하는 거다"라며 그들은 마치 하프마라톤이 동네 산책이라도 되는 양 나를 설득했다.


회사 업무와 집안일, 아이들 라이드까지 병행하다 보면 저녁엔 그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지기 일쑤였다. 그런 자신을 다그칠 핑계가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을까.

평소엔 있지도 않던 버킷리스트가 갑자기 생긴 사람처럼,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덜컥 신청을 눌러버렸다.



장비도, 요령도 없이 시작한 훈련


문득 캘리포니아에 사는 친구가 브런치에 연재했던 글이 떠올랐다. 소위 '카우치 포테이토'였던 사람이 러너가 된 사연이었다. 나는 곧장 구글링을 통해 '러닝 초보를 위한 하프마라톤 6개월 훈련 과정'을 찾아내어 다운로드했다.


유료 코칭이나 세련된 어플을 활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돈을 들이거나 기술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오롯이 내 몸과 의지로만 해내고 싶은 쓸데없이 고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와 같이 냉혹했다. 처음엔 10분은커녕 5분을 쉬지 않고 뛰는 것도 버거웠다. 며칠간 꾸역꾸역 훈련을 이어가니 겨우 숨은 고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엔 정강이와 무릎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픈 곳이 생기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내가 벌써 무릎이 시큰거릴 나이인가? 이런 육체적 도전조차 할 수 없는 시기가 벌써 온 거라면, 남은 인생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당시의 나는 할인할 때 아무 운동화나 사는 사람, 그리고 그런 운동화로 달리는 사람이었다.

전 국민이 러닝 전문가가 되어가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무모하고도 우스운 일이었다.


나의 첫 '호카(HOKA)', 달릴 명분을 찾다


결국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운동화 전문점을 찾았다. 점원에게 하프마라톤이라는 목표와 정강이, 무릎의 통증을 털어놓았다. "아프지만 안아도 훈련을 계속해보고 싶다"는 간절함은 나만의 것이 아닌 걸 너무나 잘 아는 전문점의 직원은 여러 옵션을 설명해 준 후, 난생처음 들어보는 브랜드, '호카(HOKA)'를 추천했다.


지금이야 한국의 러너들 사이에서도 워낙 유명해졌고, 여기 시애틀 동네 사람들도 너무나 많이 신고 다니지만, 2017년 당시만 해도 생소한 브랜드였다. 투박한 로고가 신발 옆면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투명스러운 디자인. 내가 산 블랙 앤 화이트 모델은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위 패션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절대 고르지 않을 법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투박한 신발은 나에게 달리기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마치 내 무릎의 통증이 노화 때문이 아니라고 증명해 주려는 듯, 호카의 쿠션은 지면의 충격을 부드럽게 흡수해 주었다. 더 이상 달리는 게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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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호카는 나뿐만 아니라 내 지인들의 든든한 러닝 파트너가 되었다. 흔히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연장이 되는 신발부터 반드시 체크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누군가는 '신발 하나가 뭐라고'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신발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에 '러너'라는 새로운 챕터는 영영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신발 한 켤레가 나를 집밖으로 이끌고, 인생의 경로까지 바꾸어 놓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