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내가 바보라서 당하는 줄 알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미숙함이 나의 죄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깨나 먹고 난 뒤, 또다시 무례한 사람들에게 데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당한 건, 내가 바보여서도 만만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잘못된 종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례함은 후천적 학습의 결과라기보다는, 차라리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에 가까울 것이다. 제 핏줄 깊숙한 곳, DNA 나선 어딘가에 ‘무례함’이라는 코드가 선명하게 각인된 존재들.
이것 들은 기가 막힌 후각을 가졌다. 상대에게서 풍기는 미세한 약함, 혹은 선함이라는 달콤한 냄새를 득달 같이 맡고는 그 위에 올라타고 싶어 안달을 낸다. 조금이라도 짓밟고 올라서지 못하면 분을 삭이지 못해 날뛰는 꼴이라니. 이것은 나이의 많고 적음, 배움의 유무, 부의 정도와는 무관하다. 그저 ‘짐승’의 카테고리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다.
인간의 탈을 썼다 한들 본질이 짐승이니 제 본능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도 당신 탓을 하지 마라. 그저 길 가다 사나운 야생 동물을 만난 것뿐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우리는 결코 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짖어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셸 오바마의 말 처럼, 저급하면 저급할수록, 우리는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짐승을 상대할 때 필요한 건 맞짱이 아니라 당근과 채찍이다. 그들과 흙탕물에서 뒹굴며 싸워봤자 내 옷만 더러워지고, 총칼을 들어봤자 내 손에 피만 묻을 뿐이다.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러니 그들이 날뛰면 날뛸수록, 오히려 더 잔혹하리만큼 따뜻하게 대해주어라. 품을 내주어라. 먹이를 주어라. 친절함과 다정함이라는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 가둬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감히 기어오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착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본능에 충실하던 그 짐승들은 서서히 제 처지를 알고 얌전해지길 자처할 것이다. 그렇게 길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사납게 날뛰던 그것들도 식탁 위에 오를만한 쓸모 있는 ‘다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