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직장 생존 비기

by quietrebel

경고 : 본 비기는 심신이 건강한 일반 직장인이 모방할 경우,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그 오답 같은 좌표 위에 멍하니 머물러 있다. 맞지도 않는 남의 유리구두에 억지로 발을 구겨 넣어 신은 신데렐라의 언니들처럼, 회사로 출근한 나는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은 의자에 엉덩이를 구겨 넣고 하루를 겨우 시작한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눈동자는 그저 모니터의 픽셀 사이를 부유한다. 손가락은 카톡을 하느라 바쁘다. '비전공 개발자'는 무슨, 하루 8시간을 그런 척 연기하기에 급급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맞다.

실패를, 후회를, 변화를 말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너무 늦었다.


그래도 이왕 연극 무대에 올랐으니 연극영화과 출신으로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일게. 그럴싸한 '포지셔닝'으로 하찮은 나를 예쁘게 포장하는 것뿐이지만, 그것은 꽤 좋은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바보들에게는 나의 이 불온하고도 얕은 수법이 잘 먹힌다.


너희가 나를 싫어해도, 나를 찍어내고 싶어도, 나를 깎아내리고 싶어도 결국 어쩔 수가 없겠지. 이곳에서는 포지셔닝이 다니까. 포지셔닝이 이긴다. 미안하지만 나도 이렇게 까지 추한 쪽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미안하지만 나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에는 철저하게 내 일이 아닌 듯 차갑게 군다. 반면, (점심 메뉴 선정이나 에어컨 온도 같은) 별것 아닌 일에는 드라마틱하게 호들갑을 떤다. 나를 향한 '사보타주(Sabotage)'에는 타협도 용납도 없다. 내게 결투를 신청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인다. 뭔가 보여드리겠다며 특별한 척, 고상한 척, 건드리면 터지는 시한폭탄인 척한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약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 일찌감치 정신 건강을 지키는 데 '긍정의 힘'이니 '위안'이니 하는 말랑말랑한 것들은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나 나를 숨 쉬게 하는 건, 누군가를, 무언가를 붙잡고 쏟아내는 검고 끈적한 부정적 에너지였다. 그렇게라도 씹고 뜯고 맛봐야, 시궁창 같은 일상에 빛이 보이고 활기가 생기며 뇌에는 도파민이 핑 돈다.


나쁘다고? 어쩌겠는가. 우리네 현대인은 자극이 없으면 곧 죽는다. 나는 이 정체된 시간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렇게라도... 내가 저질렀던 멍청한 선택과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다면,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결국 살아내려면 별수 있겠어? 나 대신 남을 탓해야지. 이게 내가 찾은 비틀리고 불온한 생존 방식인 것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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