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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핑크 덤벨을 무시하지 마라

by quietrebel


바디프로필, 다이어트, 비키니... 남들은 저마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헬스’라는 넓은 바다를 제 돈으로 삯을 지불하고 건너간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그저 ‘임직원 PT 제공’이라는 회사 복지를 누리려 기적소리도 없이 출항한 작은 배, 그게 나의 시작이었다.


수업으로 운동을 배우던 시절에는 모든 게 쉬웠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방향을 알려주었고 키를 잡아주었다. 어쩌면 '#오운완' 피드를 게시하며 ‘갓생’을 사는 나 자신에게 취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쉽고 재밌으니 흥미가 붙었고, 퇴근 후 운동하는 습관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망했고, 달달했던 복지는 끝났다. 급여마저 밀린 나는 1:1 PT를 자비로 등록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슬프게도 '운동하는 습관'은 전 직장이 내게 제공한 유일한 퇴직 위로금이었다. 이미 헬스를 취미로 발전시킨 나는 새로 생긴 동네 대형 헬스장의 '오픈 특가 월 구독권'이라도 끊어야 했다.


'백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 두 글자의 폭력적인 어감에 나는 알코올에 기대기도 했고, 엽떡과 허니콤보 같은 자극적인 음식들로 끊임없는 허기와 스트레스를 달랬다. 적지 않은 나이에 사회 밖으로 밀려났다는 패배감과 망한 회사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가 매일 밤 내게로 부서졌다. 그것은 우울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감각들이었다. 내 작은 배는 파도에 휩쓸려 처참하게 난파당했다.


아침이 오면 후회의 쓰나미가 새롭게 나를 덮쳐왔다. 습관처럼 거울 앞에서 바디 체크를 하고 나면 어제의 감정들보다 부풀어 오른 윗 배와 팔뚝살이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무너진 자존감을 안고 헬스장으로 도망치듯 달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주 4회 이상, 천국의 계단에 오르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무언가를 들고, 밀고, 당겨냈다. 이 기이한 과정으로 '운동 중독'이 되어 가고 있던 나를...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동을 거듭할수록 어쩐지 의문에 의문만 생겼다. 자세, 루틴, 식단까지 모든 면에서 엉망이었다. '이게 맞아?' 스스로 묻는 순간에도 내 몸의 '밸런스'가 무너져 뒤틀리는 것 같았다. 잘못된 자극으로 전완근만 두터워지고, 아프지 않아야 할 곳이 아팠고, 식단 대신 단식을 병행하다 폭식으로 보상받으려 했다. 나는 난파된 작은 배의 잔해를 부표 삼아, 그 위태로운 조각에 매달린 채 망망대해를 둥둥 떠다니는 꼴이었다. 이대로 흘러가다 무인도에 표류할지, 아니면 그대로 수장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 조각을 놓을 수는 없었다.


1부터 15까지. 오직 단순한 규칙만이 존재하는 세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기계적인 리듬과 단조로운 궤적 위에서, 어제 먹은 것들에 대한 죄책감과 머릿속을 맴돌던 갖은 상념들이 땀과 함께 증발해 버린다. 약 48시간 뒤에 당도할, 감미로운 고통을 기다리는 것, 그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가끔은 조류에 떠밀려서라도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저 멀리서 희미한 핑크색 등대 빛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그것은 2kg짜리 핑크색 고무 덤벨이 만들어낸, 내 어깨 근육의 아주 미세한 갈라짐이었다. 세상은 무겁고 버거웠지만, 내가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세상이 이 양손에 있었다. 이 작고 귀여운 핑크 덤벨을 들고 측면 삼각근에 집중하며 팔을 벌리면 안정감 마저 든다. 마지막 세트쯤 되면 2kg도 제법 존재감을 호소하며 타는 듯한 자극을 만들어 낸다. 결국 그 고통스러운 반복 끝에, 서서히 근육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비록 헬스장 조명 아래서만 보이는 근육일지라도.


그렇게 억지로 만든 습관이 어느새 나를 '구력 2년 차'로 이끌었다. 모든 게 유튜브 쇼츠처럼 ‘획’ 하고 넘겨지는 도파민의 시대. 취미도, 특기도, 심지어 취향마저 유행을 타는 이 시대. 유행의 선봉장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한물갔다는 헬스를 무려 1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는 것. 이것은 내게 기념비적 사건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헬짱’이라 부르기도 한다. 헬스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제법 그럴싸하다. 브라탑과 레깅스, 헬스 장비까지 착용하면 나는 영락없이 헬스장에서 ‘방귀 꽤나 뀌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여전히 2kg짜리 핑크색 덤벨만을 고집한다. 여전히 가벼운 무게에 핀을 꽂는다. 이것은 '실패 지점'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일지도 모른다.


이미 내게 '실패 지점'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밀린 급여, 퇴직금, 통장 잔고, 불투명한 미래, 뒤죽박죽이 된 커리어... 육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무거운 원판들이 하나씩 꽂히고 꽂혀, 이미 내 등골을 휘게 만들고 가끔 목을 조르려 한다. 어쩌면 핑크 덤벨은 내게 '깔짝'이는 용도의 덤벨이 아니라, 불안에 휩싸인 아기가 닳고 닳때까지 껴안고 자는 ‘애착 인형’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부디, '다시는 핑크 덤벨을 무시하지 마라.'


'운동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근육이 성장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터무니없는 연구 결과를 믿어보고 눈을 감고 상상한다. 언젠가 이 핑크색 애착 인형을 내려놓고, 진짜 쇳덩이를, 그 무거운 바벨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나를. '미친' 수행 능력을 가지고, 자연광 아래서도 선명하게 갈라지는 근육을 뽐내는 나를. 건강한 식단을 챙겨 먹고, 인바디 점수 100점을 달성한 나를.


그 힘으로 나는 나를 짓누르던 인생의 원판들을 하나씩 빼내며 '드롭 세트'를 진행할 것이다. 스스로 삶의 중량을 통제하며, 내가 원하는 목적지가 어디든 다시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 또다시 거센 파도를 만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호들갑 떨 생각은 없다. 그저 묵묵히 다음 세트를 이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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