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그동안 이곳에서 저지른 수많은 죄업으로, 저는 드디어 심판대에 올랐습니다.
허나, 저는 이 형벌을 온전히 감내할 수 없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멋대로 시기하고, 그들의 불행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사악한 저주를 덤벨에 실어 신성한 헬스장을 더럽혔던 그 비뚤어진 마음들.
찢어지는 하체의 근육통으로 육체를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대신 제 안에 품었던 그 모든 악한 마음은, 오늘 밤 알코올로 깨끗이 소독하며 참회하겠습니다.
I can feel it coming in the air tonight, oh Lord…
And I’ve been waiting for this moment for all my life, oh Lord…
— Phil Collins, 〈In the Air Tonight 〉
10월의 어느 금요일. 친구 Y의 집들이 날이었다. 식단도, 다이어트도, 운동 강박도 잠시 내려놓고 위장에 축제를 열어줄 작정이었다. 백수에게 연휴나 명절은 큰 의미가 없지만, 이번 추석 연휴는 유독 길고 징그럽게 느껴졌다. 연휴 내내 식단을 지키며 코딩된 프로그램처럼 눈뜨자마자 헬스장으로 출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거창한 치팅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치팅 데이’를 앞둔 나에게는 준비의식이 필요했다. 알코올과 탄수화물을 받아들이기 전, 마지막 의식을 치르듯 운동을 하고 가면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독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Y가 보내준 메뉴 리스트를 보며 ‘상상 혈당 스파이크’를 즐겼다. 평소보다 짐이 두 배였지만, 갈아입을 예쁜 옷, 화장품까지 다 챙겼고 이내 부푼 마음으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여느 때처럼 헬스장 2층에 도착해 스트레칭 존에 신발을 벗고 앉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좀 전까지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던 내 부푼 마음은 날카롭게 제련된 칼끝에 난자당하듯 처참히 찢겨나갔다. 스트레칭 존 거울 뒤로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에어팟 4의 하찮은 노이즈캔슬링을 뚫고 들려왔다. 그곳에는...
오늘도 마주치길 고대했던 타투 박힌 등의 남자와 언젠가 내 팔뚝의 열등감을 자극했던 마르고 탄탄한 여자가 있었다.
‘진짜 장난치지 마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믿기 힘든 상황을 믿어야 하는가.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 폼롤러를 굴려 힙 스트레칭을 마쳤다. 기립성 저혈압인가? 눈앞이 캄캄했지만 겨우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그러자 바로 뒤에 있던 ‘페덱 플라이’ 머신에 리어덜트 자세로 앉은 그 여자와 그녀의 팔 위에 자신의 팔을 얹어 다정하게 보조해 주는 그 남자의 타투 박힌 팔이 보였다.
‘관세음보살, 오 마이 갓’
부처님께서 내 안의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며 자비라는 이름의 잔혹함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신 게 아닌가. 하느님께서 이토록 공들여 최악의 조합을 빚어내실 리가 없다. 왜 하필 그 남자인 것일까. 왜 하필 그 여자인 것일까. 신이 존재한다면 합심해서 나를 심판하기로 작정한 게 분명했다. 나는 이 조롱 같은 광경을 목도하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나는 바닥난 인내심을 한계치까지 끓어 올리며 또 도망을 택했다. 그들로 가득 찬 2층에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나는 재빨리 4층으로 향했다. 힙쓰러스트 머신에 누워 분노로 가득한 엉덩이를 들어 올리면서 조금 전의 광경을 이해하려 애썼다. 몇 번의 마주침으로 이들이 원래부터 친구사이나 커플이 아닌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그 여자가 먼저 꼬신 거야.’
그 남자가 먼저 꼬셨다는 전제 따윈 없었다. 그는 두 번이나 나를 쫓아왔고, 지난번엔 문 앞에서 스쳐 지나가기까지 했는 걸! (물론 나의 망상 속에서...) 그녀도 나처럼 그를 눈에 담아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였는지, 헬스장 한복판을 캣워킹 하듯 활보하던 그녀에 대한 기억의 파편을 원망하듯 떠올려냈다. 그래,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임자다.
근거 없는 추측과 망상, 명분 없는 질투심 그리고 이기적인 분노.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열이 받았는지 두 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로이더들이 겪는다는 ‘레이지(Rage)’인가? 나는 이것을 ‘질투 레이지’라 명명하기로 했다. 오늘따라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무게에 나는 세트를 마칠 때마다 애꿎은 핸드폰을 바닥에 내 팽개쳤으며, 다문 입술 아래로, 잇새로 욕설을 삼켰다.
최대한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평소보다 더욱 시야를 차단하려 했는데 오늘따라 나의 눈은 무슨 소명감이 있는지 제 기능을 다했다. 핀조명을 쏜 듯 그들의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렇게도 꼭 한번 보고 싶던 남자의 얼굴이 마침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냥... 내 타입이 아니었다고 해두자. 타인의 얼굴을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기에.
애석하게도 처음 그를 인식해 버린 타투마저 내가 좋아하는 예쁜 ‘멋쟁이 타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레즈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동안 공을 들여 그에 대한 판타지를 쌓아 올렸고 ‘내 타입의 남자’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온갖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 그에 대한 감정을 꾸며냈다. 어떻게든 이어가려 했던 이 감정은 오늘 바로 그에 의해 무너졌고 나는 비로소 지독한 셀프 최면에서 깨어났다.
분노에 분노를 쌓으며 나는 과할 정도로 운동에 열중했다. 아주 손에 꼽을 정도로 운동이 잘된 날이었다. 평소 스티프데드를 할 때 8kg 덤벨 두 개를 겨우 들고 했지만 오늘은 무려 12kg짜리 두 개를 들고 진행할 정도였다. 손바닥의 통증도, 대퇴의 당김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이 당겨왔다. 각 층을 오가며 도망치려 했는데도 계속해서 그들이 있었다. 덩치가 큰 남자와 작고 마른 여자가 같이 있는 모습은 음과 양의 이치인 듯 조화롭게 느껴졌고 시선을 끝도 없이 사로잡았다. 이제 나는 헬스장에 올 때마다 그들을 동시에 마주쳐야만 하는가? 정확하게는 그들이 꽁냥 거리는 모습을... 말이다.
나는 근육이 아닌 정신을 고립시키며 겨우 운동을 마쳤다. 천국의 계단 25분까지 타고나니, 서서히 피가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아까의 비현실 같은 현실을 망각하려 노력했다.
‘나는 오늘 집들이에 참석해 술과 음식으로 거창한 치팅데이를 누릴 것이다.’
그래, 이것이야 말로 오늘 나의 과업이었다! 평소라면 대충 머리의 물기만 제거하고 집으로 갔을 텐데. 오늘 내게는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다. 나는 챙겨 온 오프숄더 상의에 트랙팬츠를 입었다. 그리고 챙겨 온 화장품들을 꺼내 특별한 날에만 하는 ‘쿨톤 메이크업’을 했다. 눈가에는 보랏빛이 도는 과한 펄을 좀 더 많이 펴 발랐고 바디크림과 롤온 향수로 온몸에 바닐라향을 휘감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나는 헬스장을 나섰다. 오늘 모임의 콘셉트는 정해졌다. 실연당한 드라마 퀸.
오늘의 술 담당을 자처했던 나는 편의점에 들러 여려 종류, 여려 병의 술을 골라 양손 가득 들고 택시에 올랐다.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평소 듣던 ‘비 오는 날 플레이리스트’ 대신, 내 분노를 표현하는 음악을 선곡했다.
두둥, 뚜두뚜두두두 둔—
에어팟으로 흘러나오던 곡의 3분 41초, 필 콜린스의 전설적인 드럼 필인(Fill-in)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 강렬한 비트가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섞여 들어왔다. 나는 그 장면들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발악하듯 볼륨을 크게 높였다. ‘I can feel it coming in the air tonight, oh Lord…’ 반복되는 이 가사처럼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니,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이상하리 만큼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