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
오늘 또 죄를 저질렀습니다.
계략을 꾸미려는 사악한 마음을 품었고 감히 바랬습니다.
응답처럼 나타난 그의 존재를 감히 반가워했습니다.
그러나 코앞에서 용기를 잃고 도망가는 굴욕을 택했습니다.
그는 나를 기억하리라. 주문을 걸며, 헛된 기대를 품었고, 망상을 거듭했습니다.
이 모든 죄를 제 이름으로 고백하며, 깊이 참회합니다.
9월 중순, 여전히 백수인 나는 오전부터 분주했다. '이케아 스웨디시 레스토랑에서 점심 먹기'라는 주요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으니까. 헬스장 출석 바코드를 찍으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미처 머리를 감지 못한 나는 미연의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파마머리를 상투 틀듯 높이 올려 묶었다. 그리고 그 숭고한 뜻이 담긴 머리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매트에 누워 폼롤러를 등에 대고 평소보다 더욱 대충 굴렸다. 내 선호 렛풀다운은 오늘도 나의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전완에 자극을 받지 않기 위해 가장 가벼운 무게에 핀을 꽂고 가볍게 바를 내리며 오늘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돌아온 '등운동의 날', 발걸음은 가벼워도 루틴은 두둑하게 챙겨갔다. 2층에서만 벌써 두 개의 종목을 해치운 나는 4층에 올라가 수입 등머신 들을 차례로 당기며 다짐했다. 오늘만큼은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으리라.
그러나 민트색 레깅스 차림의 여성이 홀연히 등장해 힙운동 기구 존을 누비자, 그곳으로 쏟아지는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보였다. 나는 점차 불쾌해졌고, 괜한 정의감에 어디에라도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러다 ‘내로남불’이라는 시의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냈다. 본인 역시 그 노골적인 시선을 누군가를 향해 쏘아붙이지 않았던가. 그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지? 반박할 수 없는 팩트 폭격과 밀려오는 수치심에 야생마처럼 날뛰던 거친 생각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처음 앉아본 너틸러스 로우 머신. 무거운 손잡이를 힘껏 당기며 모든 소음을 차단하자, 잠자던 광배가 깨어나는 듯했다. 기분은 다시 고양되었고, 3층으로 내려와 시티드 로우와 덤벨 로우로 그 감각을 이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유산소. 나는 최상의 컨디션을 등근육에 얹은 채 천국의 계단에 올랐다. 계단의 시간은 언제나 아인슈타인의 영역인 듯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난해했다. 운동 경과 시간은 세상 느리게 흐르는데, 시계는 벌써 오후 다섯 시를 향해 갔다. 25분쯤 지났을 무렵,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이라면, 이 시간에 헬스장에 오지 않을까?'
이제는 불시에 기억 저 편에서 꺼내보는 존재, 타투 박힌 등과 그 주인에 대한 생각이었다. 혹시 모를 우연을 가장한 계획된 마주침, 그 계략을 펼치기 위해 나는 좀 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스트레칭존에 다시 가서 폼롤러를 하다 보면 진짜 그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어서 2층으로 올라가자.' 그러나 계단을 30분이나 탄 내 몸은 그간 노폐물이 많이 쌓였는지 평소보다 더 많은 땀을 배출했고, 바지까지 흠뻑 젖어있었다. 다음 이용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찝찝한 몸을 공용 매트에 가져갈 수 없었다. 나는 웹소설 속 '#계략남'에 빙의하길 관두고 곧장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워헤드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자, 하루의 고단함이 같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잡생각은 그만 접어 두고 얼른 집에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탈출하듯 탈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신발조차 제대로 가방에 넣지 못하고 인포데스크 뒤쪽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던져두었던 신발들을 하나씩 지퍼백에 넣고 있을 때였다.
멀리 출입문 밖으로 레터링 타투가 새겨진 종아리와 검은색 반스 올드스쿨 운동화가 환영처럼 보였다. 내가 꾸몄던 그 계략대로, 우연히도 그가 이 시간에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듯했다. 나는 희미해진 기억과 눈앞의 실루엣을 대조하기 위해 그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 두 다리가 문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출입문을 열고 들어왔다. 드디어 얼굴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인포데스크 뒤편에서 엄폐하고 있던 나는 들어오는 사람을 향해 시선을 쏘았다. 온 시력을 끌어모은다는 간절함으로 내 눈의 광학 줌을 당겼다. 그러나 노화로 시력이 감퇴하고 있던 내 눈은 그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만을 겨우 포착했다. 그는 곧장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에는 수건과 헤드셋이, 곧 벗어서 허리에 묶어버릴 겉옷이 오늘도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전, 계단을 오르던 그가 돌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시선을 거뒀고, 그는 그대로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내 시선이 탄로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나를 의식해서 한번 더 보려고 내려온 게 아닐까? 점점 창의성과 수준이 높아진 나의 망상에 아까의 피로가 싹 가시고 심박마저 다시 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망상대신 제발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자. 계단을 오르던 중 차에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난 남자, 담배를 하나 더 피우러 간 그 남자... 이 쪽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그러면서도 탈의실에서 눈썹을 그리지 않고 나온 나를 원망했다. 나는 운동 가방을 뒤져 파우치를 찾아냈다. 급하게 쿠션을 두드리고 눈썹을 그린 뒤 핑크색 립글로스를 발랐다. 다행히 그는 아직 헬스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희망회로와 절망회로가 동시에 가동되기 시작했고, 나의 심박수가 '존 2'를 돌파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나대는 심장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나는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잡아 주는 문으로 나가며, 고맙다는 말을 건네 안면을 트는 해피엔딩, 혹은 내가 헬스장을 떠날 때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는 새드엔딩.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짐을 모두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었다.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고 당기는 문 손잡이에 내 손이 닿았을 때였다. 또다시 거짓말처럼 그 남자의 형상이 문 앞에 '우연히' 나타났다. 가슴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요동쳤고, 고장 나버린 뇌가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오른쪽 출입문 손잡이를 잡으시오. 광배의 자극을 느끼며 당기시오.'
지금? 여기서? 제대로 자극받은 나의 등근육은 속절없이 그 동작을 해냈다. 그는 거의 같은 타이밍에 왼쪽 문을 당겼다. 양쪽 문이 동시에 열리던 순간, 이미 회로가 다 타버린 머릿속에서는 영화 〈중경삼림〉의 금성무와 왕페이가 서로를 스치던 장면과 'California Dreamin'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영화는 급하게 꺼졌다. 망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바로 옆인데, 나는 순간 지레 겁을 먹었다. 고개를 들어 물음표로 가득한 그의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맨얼굴에 가까운 내 얼굴이 부끄러웠고, 대충 말려 산발을 한 내 머리가 수치스러웠다. 나는 학창 시절 부평 길거리를 혼자 걸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시선을 빠르게 낙하시켰다. 그의 얼굴로부터 땅바닥으로... 그리고 더 빠른 발걸음으로 그곳에서 벗어났다.
순간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그의 얼굴을 붙잡기 위해 기억력에 수차례 '비디오 판독(VAR)'을 요청했지만, 늘 같은 순간에서 화면은 뭉개져있었다. 수건에 대부분 가려진 얼굴과 검은 앞머리, 이목구비의 흐릿한 형상만이 남았다. 허탈하게 판독 결과에 승복해야 했던 나는 그 장면을 끊임없이 반복재생하며 복기했다.
'1초만 기다리지.' '왼쪽으로 갔야지.' '밀었어야지' '부딪혔어야지.'
그러나 이미 휘슬은 울렸고, 추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힘없이 걸으며, 졌지만 잘 싸웠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동시에 문을 열었고, 몇 센티도 안 되는 거리를 스쳤다. 이 정도 도파민이면 추석연휴까지는 버틸 수 있겠어!
영화 〈중경삼림〉에서 스친 것은 두 사람이었는데, 정작 6시간 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지. 그것은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는 장면이었다. 그와 나는 각각 다른 파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그는 내게 얼굴조차 모르는 누군가로 남아 있어야 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운명을 거슬러 우연을 붙들고, 그 위에 또 다른 망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려 한다. 그 끝은 그가 헬스장 출입문을 넘을 때마다 나를 기억할 것이라는 저주와도 같은 기대. 그 헛된 기대에 오늘 혹사당한 등을 살며시 기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