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이 밤의 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저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핑계로 제 육신의 정신을 알코올에 절여버렸습니다.
죄악의 장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고, 이름 모를 낯선 이들에게서 값싼 위로를 구걸했습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인 척, 온기가 아닌 것을 온기인 척 스스로를 속였습니다.
욕망과 쾌락에 영혼을 팔아넘기려 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제 영혼이 이미 더럽혀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새벽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누구라도...
뒤늦게 스스로를 혐오하며 간절히 참회합니다.
오직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위해 다시 운동만을 믿겠습니다.
필 콜린스는 노래했다. 'I can feel it coming in the air tonight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그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하지만 이미 알코올로 뇌와 척수를 적시고 위장까지 완벽하게 소독해 버린 내게 그 경고가 들릴 리 없었다. 만약 그 타투 박힌 등짝을 보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날 헬스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예 빌어먹을 이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날 나의 밤은 평범하게 끝났을까. 12kg 덤벨로도 해소되지 않은 ‘질투 레이지’는 그날 내 혈관 속에 알코올을 들이붓는 기폭제가 되었다.
헬스장에서 시작된 나비효과가 우리의 건전한 집들이 모임을, 그리고 내 존엄성을 어떻게 박살 냈는지....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늦은 밤, 풀메이크업을 장착한 채 빗속을 뚫고 나이트클럽으로 향한 어느 '실연 호소인'의 이야기. 운동으로도 연소시키지 못한, 내장 지방처럼 쌓인 욕망의 찌꺼기들과 함께 끝난 헬스장 로판의 에필로그. 그리고 내 생애 다시는 없을(없어야만 할) 광란의 외전 되시겠다.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본 컨텐츠는 로맨스도, 감동도, 교훈도 없는 날 것의 흑역사 다큐멘터리입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사유: 지나친 음주, 비속어, 적나라한 욕망의 배설
[경고]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 아니, 영구적인 쪽팔림을 유발합니다.
☠️ Please, Don't try this at home.
고급 부위 소고기, 토핑 가득한 엽떡, 손수 끓인 바지락 탕, 그리고 피자와 치킨. 상다리가 부러질 듯 차려진 음식들과 술, 그리고 나의 망가진 기분까지... 계획대로 거창한 치팅데이가 시작됐다. 우리는 십여 년 전, 우리의 전성기 아닌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 닥치는 대로 술잔을 비웠고 음식을 해치웠다. 나는 웃고 떠들며 소고기를 씹어 넘겼지만, 내 존재는 마치 양자 역학 속 입자처럼 두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육체는 이곳에서 기름진 안주를 탐하고 있었으나, 의식은 여전히 몇 시간 전의 차가운 헬스장 바닥을 서성였다. 그 남자의 등, 그 여자의 미소, 나의 패배감이 시공간을 넘어 술상 위로 겹쳐졌다. 씹을수록 질겨지는 감정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취기가 올라가며 모두의 목소리가 커질 무렵,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갑자기 Y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이트클럽’. J와 K는 질색팔색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이성의 퓨즈가 끊어진 나와 Y는 어느새 눈두덩이에 반짝이는 펄 아이섀도를 추가로 펴 바르고 있었다. 우리의 ‘걸스 나잇’, 나의 ‘치팅데이’는 그렇게 급마무리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무슨 패기였는지 지갑도 챙기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오로지 핸드폰 하나 달랑 들고, “우리 가서 음악만 듣고 오자!”라는 웃기는 슬로건을 내걸고.
늦은 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내렸고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머지않은 곳으로 향했다.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궁금하긴 했지만... 가기 싫어서 안 갔던 곳. 큰 소리, 시끄러운 조명,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 그리고 땀 냄새. 내가 태생적으로 혐오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내 상상 속의 나이트클럽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 소리가 나긴 했지만 시끄럽기보다는 뭔가... 서글펐다. 다닥다닥 붙을 사람 자체가 없었고 덕분에 냄새도 없었다. 무엇 보다 우리가 듣고 싶어 했던 '음악', 신화나 지오디가 없었다. 무대 위에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나 나올법한 반짝이 공단 옷을 걸친 밴드가 뽕짝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 이리 오세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웨이터’라는 직함의 남자가 Y의 팔을 낚아챘다. 우리는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의 택배 박스처럼 어느 테이블로 던져졌다. 어두컴컴한 테이블, 그곳에서 낯선 남자들이 우리를 반겼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부킹’인가. 나는 처음 눈을 마주친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알코올에 절여진 시야 속에서 그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적어도 헬스장의 타투남보다는 다정해 보였다. 아니, 다정해야만 했다. 낯선 남자들과 그들이 베푸는 거짓된 매너, 새치 혀가 내뱉는 빈말들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 가벼움이 오히려 좋았다. 헬스장에서 느꼈던 패배감과 비참함을 잊기 위해, 나는 취기에 몸을 맡긴 채 같잖은 것들에서 약간의 온기를 느껴보려 발악했다. 그들의 손길, 섞이는 숨결, 영혼 없는 다정함 따위가... 취한 나를, 실연 아닌 실연을 당한 나를 잠시나마 위로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 뒤의 기억은 다소 파편적이다. 어떤 이는 핸드폰에서 자식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자랑했고, Y의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나는 내 옆의 남자와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내 잔을 채워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헬스장에서 느꼈던 소외감이 이곳의 조명 아래서는 잠시 잊히는 듯했다.
화면이 전환되듯, 장소가 바뀌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노랫소리가 멈추고,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던 포차의 창가 자리, 기어코 또 한 잔 들이켜 버린 소주를 끝으로 내 기억의 필름은 뚝 끊겼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적막하고 낯선 천장, 따뜻한 색온도의 불빛, 그리고 안락함이 섞인 묘한 공기. 모텔이었다.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났는지, 그 중간 과정은 흐릿하다. 하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그 낯선 이에게 매달리듯 위로를 구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질척거렸다. 헬스장에서 채워지지 못한 욕망을 그에게서 확인받고 싶어, 취기에 비틀거리는 몸으로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거절이었다. "아, 진짜 왜 이래요. 그냥 좀 자요." 그는 나를 마치 떼쓰는 아이 다루듯 밀쳐내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도덕적인 신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럴 가치조차 없을 만큼 매력이 없었나? 그것도 아니면 술 냄새가 너무 났나? 확실한 건, 그 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섹스 없는 원나잇. 차라리 화끈한 밤이라도 보냈으면 욕망의 해소라도 되었을 텐데. 나는 낯선 남자에게조차 '거절당한 여자'로 남겨진 채, 영화〈해바라기〉의 오태식처럼 재수 없게 울다가 결국 지쳐서... 이불 끝자락을 부여잡고 침대 끝에서 잠을 청한 모양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안도감이, 역설적으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어둡고 차가운 방 안에서 혼자 맞이한 이른 아침.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더 내가 싫어졌다. 망상으로 비롯된 가짜 감정, 그게 다 뭐라고. 또다시 술에 의존해서 내 정신과 존엄을 바닥에 내던졌을까? 숙취와 함께 밀려오는 모든 감각이 낯설고, 추하고, 수치스러웠다. 도망치듯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썼음에도 들이치는 빗방울에 내 자랑이던 히피펌 머리가 물미역처럼 축 처졌다. 그 볼품없는 꼴마저 조롱하듯 나를 깎아내렸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이제 이 히피펌도 다음 주면 안녕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치팅데이는 이렇게 최악의 형태로 막을 내렸다. 헬스장에서의 풋풋했던 설렘과 망상도 더럽게 끝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생명줄 같았던 실업급여도 이번 달이 마지막이었다. 모든 것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내게 끝을 고하고 있었다. 우주의 섭리처럼, 물리 법칙처럼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웠던 한 시절이 막을 내리는 순간 일 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바닥을 파지 말고 위로 올라오라고.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어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라고.
비에 젖은 운동화가 축축하게 발을 조여왔다. 나는 그 찝찝함을 꾹꾹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내일은, 아니 멘탈이 수습될 모레쯤에는... 다시 운동을 하러 가야지. 이 모든 건 내 잘못일 뿐, 헬스에는 죄가 없으니까.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헬스장뿐이다. 찬란한 망상의 흑역사가 살아 숨 쉬는 폐허, 몰락한 나의 소왕국으로. 설령 그곳에서 그 두 사람과 마주친다 해도, 나는 이제 입을 꾹 다물고 정신을 부여잡은 채 오로지 쇠질에만 몰두할 것이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빼앗긴 내 왕국의 영토를 흐르는 땀방울로 다시 되찾아오리라.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