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다시 한번 제 안의 부끄러운 죄를 고백합니다.
무더위에 운동을 소홀히 하며 방탕하게 살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고서야 비로소 헬스장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마주한 그 등을 반가운 듯 엿보았고, 끝내 죄 많은 눈길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저는 젊은 여성을 탐하는 노인과 다를 바 없는 제 추악한 모습을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서 또다시 망상의 싹을 틔우고 말았습니다.
이런 저의 음흉함을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나약한 자신을 깊이 참회하며, 다시는 운동의 본분을 잊지 않겠습니다.
여름을 사랑하는 나조차도 올여름에는 학을 뗐다. 더위도 더위였지만, 내 일상이 너무나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7월에는 국비 낭비를 막겠다며 ‘반려견 수제 간식 전문가’ 과정에 올인했고, 8월이 되자 튀르키예로 훌쩍 떠났다. 아나톨리아 반도 곳곳을 누비며 열심히 놀아제꼈다. 옛 오스만의 술탄, 나는 그들을 잠시 떠올렸다. 그러다 온갖 향신료와 술을 탐닉한 대가는 참혹했다. 귀국하자마자 대상포진이 내 왼쪽 상완을 덮쳤다.
“잘 먹고 잘 쉬세요.”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핑계로 나는 공식적인 ‘운동 파업’을 선언했다. 생경한 고통에 일주일 넘게 하루의 반 이상을 누워서 보내야 했고 항바이러스제와 같은 약을 먹어야 했다. 여름 내내 헬스장에 못 갔다는 소리다.
거의 한 달 넘게 운동과 다이어트를 중단했더니, 거울 속 내 팔뚝은 제철 맞은 대하처럼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이 정도면 횟집 차림표에 ‘시가(時價)’라고 적어도 될 기세였다. 여름 내내 살이 많이 쪘다는 소리다.
그렇게 다시 운동을 제대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9월의 초입이었다. 어느 토요일, 제법 날씨가 선선해지더니 바람마저 불어주었다. 계절이 주는 분위기에 곧 잘 휩쓸리는 편인 나는 괜히 마음이 들떴다. 여름을 연상시키는 향과 쿨링감의 바디워시를 모두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대신 가을을 닮은 달짝지근한 향이 풍기는 바디워시를 꺼내 샤워를 한 뒤, 긴 머리에 헤어에센스를 잔뜩 발랐다. 그러자 팔뚝살을 보고 침울해졌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어제 먹은 술과 안주로 얼굴은 조금 부었으며, 조금 엉망이었지만, 모자를 쓰면 될 일이었다. 묵직한 뱃살은 버뮤다팬츠로 가리면 될 일이었다. 지겨웠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돌아왔으니까, 뭐든 될 일이었다.
가을과 함께 돌아온 '등운동의 날', 나는 나를 재촉했다. 아직 포진 부위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남았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서두른 탓에 오후 1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헬스장에 도착해 버렸다. 진정한 '백수'의 삶에 막 뛰어든 나는 더 이상 시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됐다. 사람이 별로 없는 오후 두 시나 세 시쯤 느긋하게 헬스장에 가도 좋았을 텐데, 그날은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나의 이상한 기분 시스템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2층 스트레칭존에 도착해 폼롤러로 대충 등을 풀고 내 지정 렛풀다운에 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순간, 오른쪽 벽면 끝 케이블 머신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날개뼈 위로 새겨진 낯익은 타투.
‘그때 그 남자다!’
허리에 질끈 묶은 겉 옷,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늘 운동은 망했다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부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쓴 탓에 시야는 좁아졌고, 대놓고 쳐다볼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시선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고정됐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뿜어져 나오는 그 압도적인 아우라.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가 뒤돌아설 때마다 드러나는 등과 타투만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결국 나는 예상치 못한 재회, 그 쾌거에나 만족하며 케이블을 열심히 당기는 그의 뒷모습을 관음 하기 시작했다. 해야 되는 운동은 안 하고, 자꾸 레깅스 입은 젊은 여자를 힐끔거리는 헬스장의 여느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아서… 스스로가 참 싫었다.
그때,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시선을 눈치챘나? 도망갔나?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는데, 거짓말처럼 내 근처 로우 머신에 그가 앉아 있었다. 하필 또 근처라니. 또다시 망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고 했고, 머릿속은 아주 바빠졌다. '앉아서 한 세트 더해 볼까?', '앞에서 어시스트 풀업 하면서 지켜볼까?' 별짓을 다 고민했지만, 그 사이 자리를 뺏기고 더는 이곳에서 그를 훔쳐볼 수 없게 됐다.
게다가 마르고 탄탄한 한 여자가 자꾸 내 눈앞을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과 내 몸에 달린 두 팔이 잔인하게 비교됐다. 마치 옛날 드라마〈임꺽정〉의 산적 두목 임꺽정(정흥채 배우님, 존경합니다)을 연상시키는 두터운 내 팔 뚝. 자신감과 자존감은 앞 다투어 출렁이며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모자와 버뮤다팬츠로도 나의 뿌리 깊은 열등감만은 가리지 못했다. 그가 근처에 있다고 한들 뭘 어쩌겠는가. 나까짓 게 뭘 어쩌겠는가. 나는 〈피지컬:100 〉에서 탈락이라도 한 듯, 마음속의 해머를 들어 지방이 깃든 나의 토르소를 힘껏 내리찍는다. 박살 난 자존감의 파편들이 흩뿌려진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다른 층으로 올라간 나는 가루가 된 멘탈을 수습하며 체념해야 했다. 혹시 지난번처럼 그가 나를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계단 쪽을 주시했지만, 그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지난번의 숨 막히는 루틴 추격전이 나의 거대한 망상일 뿐이었다는 게 여지없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4층 운동을 마치고 이어서 3층에 가야 할 차례였지만,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기어이 2층에 내려갔다. 다행히 그 타투 박힌 등의 남자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는 구석진 러닝머신 위에서 수건을 뒤집어쓰고 가파른 경사를 걷고 있었다.
‘미친 척하고 옆에 가서 뛰어 볼까?’
아서라.
나는 짐짓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그의 모습을 훔쳐보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근처 로우머신에 앉았다. 이제는 잡생각을 멈추고 다시 루틴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등운동을 하러 온 본분을 지켜야 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었다. 제발 더 이상 쓸모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그런데 돌연, 아주 ‘쓸모 있는’ 의문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나 집요하게 훔쳐봤는데, 정작 그의 앞판, 아니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기묘하고도 충격적인 사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쯤 되니 슬슬 의심이 든다. 어쩌면... 나 헬스장 상주 귀신에게 홀린 건가? 등근육에 올려진 타투의 모습을 한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건가? 사실 그는 얼굴 없는 존재인데 얼굴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모두 쓸모없는 생각들의 ‘꼬꼬무’였다.
결국 내게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자존감이 높고 당당했다면, 팔뚝에 붙은 지방이 적었더라면, 어제 과식과 과음을 하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따라왔다고 우겨대는 나의 육감을 믿고, 한 번쯤 고개를 들어 제대로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을 텐데 말이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큰맘 먹고 다가가서 기선제압, 눈싸움을 걸어보리라 다짐해 본다. 그러나 ‘헬짱’과 눈을 마주치는 상상만 해도 두렵다. 헬스장에서 눈을 잘 못 마주치면 시비가 붙는다지.
‘아니,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이 망상에 핑크빛 결말 따윈 영원히 없겠지만, 이만하면 됐다. 어차피 내 망상은 여기까지다.
그의 타투와 프레임, 그리고 프로포션.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겠지만, 내 뇌는 필요할 때마다 그 희미한 기억을 꺼내 쓸 것이다. 이 삭막한 헬스장에서 홍석천처럼 캐낸 보석 같은 추억,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기꺼이 헬스장에 갈 것이다. 여름의 날의 나태하고 방탕했던 나를 가차 없이 치워버리고, 이 선선한 가을과 달콤한 내음에 걸맞은 사람으로 바뀔 마음의 준비를 마쳤으니까.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구합니다.
Q1. 진실은?
• (A) 분명하다. 따라온 거다.
• (B) 뇌내망상이다.
Q2. 나의 다음 행동은?
• (A) 정면승부: 가서 눈싸움 건다. “몇 세트 남으셨어요?”
• (B) 현실자각: 닥치고 운동이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