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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록 제1장

탐심

by quietrebel


제 안의 부끄러운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엄숙해야 할 헬스장에서 난생처음 남성의 벗은 등을 탐하듯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등에 새겨진 타투의 유혹에 흔들려, 눈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가 저를 따라오는 것만 같은 망상까지 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국비로 허락된 소중한 학원 수업에 지각하는 어리석음까지 범했습니다.
저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죄입니다.

이 모든 죄를 스스로의 이름으로 고백하며, 참회합니다.




무더위가 나일악어처럼 입을 벌리던 지난 6월 말이었다. 실직 4개월 차. 나는 내일 배움 카드로 ‘펫푸드 학원’에 등록했다. 앞으로 한 달간, 매주 월·수·금 오후 2시까지 학원에 출석해야 하는 형벌에 스스로를 가둔 셈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학원보다 더 중한 자발적 형벌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이었다.


점심 무렵 헬스장에 들러 근육을 조지고, 땀에 젖은 채 학원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하는 그 짜릿한 스릴. 운동 중독자이자 백수의 삶이란 모름지기 그런 위태로움이 있어야 굴러가는 법이니까.


사달이 난 건 어느 금요일이었다. 그날따라 침대의 자성은 유난히 강했다. 늑장을 부리다 보니 이미 오후 1시가 넘었고, 하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등 운동’ 하는 날. 학원이냐 쇠질이냐, 짧은 고뇌 끝에 나는 핸들을 헬스장으로 꺾었다.


‘에라 모르겠다. 지각을 하든 말든, 딱 40분만 하자.’


머릿속으로 타임테이블을 짰다. 운동 40분, 샤워 10분, 이동 10분. 완벽했다. 2층 프리웨이트 존에 입성하자마자 폼롤러에 등을 대충 문대고, 단골 렛풀다운 머신을 선점했다.

김연아 모드 장착,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정신을 다잡고 그립을 감아 바를 내리던 순간이었다.

두어 미터 앞의 또 다른 렛풀다운 머신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고 있던 겉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걸 또 허리에 묶는다.


나시 차림의 좋은 몸은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좋았다. 헬스장에서 탈의야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태닝 된 구릿빛 피부가 아니라 희멀건 피부였다. 오른쪽 견갑에서 광배까지 덮은 커다란 타투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이레즈미는 아니었다. 날개 같기도 하고, 어떤 형상 같기도 한 그림은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예뻤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그 위에 헤드셋까지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쳐다보지 마’라는 표식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나서 옷을 벗는데 눈길이 안 가겠는가.

그의 얼굴은 끝내 볼 수 없었지만, 벗어낸 겉옷이 묶인 허리, 버뮤다팬츠, 검은색 반스 올드스쿨, 레터링이 박힌 다리가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흔하디 흔한 조합이었지만 모든 게 완벽하게 조립된 하나의 세트처럼 보였다.


‘... 멋있다.’


나는 구력 2년 차다. 이곳에서 로맨스를 꿈꾸는 건, 내가 벤치프레스 100kg를 드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웬만한 남자의 몸을 봐도 내 뇌는 자동으로 포토샵의 ‘가우시안 블러(Gaussian blur)' 리를 해버리곤 했다. 흐릿한 배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들. 그런데 이 남자만큼은 블러 처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샤픈(Sharpen)’ 효과를 준 듯 선명하게 내 시야를 파고들었다. 렛풀다운을 당기며 시선은 위를 향해야 하는데, 그놈의 고개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내 눈동자는 자꾸만 정면의 그 타투 박힌 등 쪽으로 미끄러졌다.


몇 번의 세트를 마치고, 잠시 후 휴식을 취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어느새 그가 내 옆, 로우 머신에 앉아 있었다. ‘아, 오늘 등이시구나~저랑 같네요.’ 속으로 쓸데없는 말을 붙이며 괜히 혼자 친밀감을 쌓았다. 나는 모자도 눌러썼겠다, 자연스럽게 곁눈질을 이어갔다.


그러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나는 3층으로 올라가 시티드 로우를 급하게 했다. 촉박하다. 덤벨로우라도 얼른 해야만 했다. 빈 벤치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순간, 그 남자가 3층에 있었다. 그는 방금 내가 끝낸 시티드 로우에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 한가운데 작은 망상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따라온 건가?’


물론 아닐 것이다. 단지 루틴이 겹쳤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덤벨존까지 넘어와 내 근처 어딘가에 자리 잡자, 한 줌 불씨가 순식간에 화마로 번지는 것처럼 망상은 '확신'으로 짙어져 갔다. 6kg의 덤벨을 들고 애써 버티던 나는 대형 거울에 비친 그의 '진짜' 덤벨로우를 조심스레 엿봤다. 나의 운동은 카운트도 잃은 채 엉망이 되어 갔다. 급기야 계획에도 없는 팔 운동까지 루틴에 추가했다. 시간을 질질 끌어서 라도 좀 더 머물고 싶어서였다. 이제는 정말 학원으로 향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 발은 창가에 위치한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같은 층 어딘가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얼굴 모를 누군가를 의식하며 나는 뛰고 또 뛰었다.


결국 학원에는 1시간이나 늦어버렸고, 당연히 지각 처리됐다. 오늘의 메뉴는 '오리안심 저키', 나는 수업시간에 오리고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지방을 떼어내면 서도 그 타투의 형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릿한 오리 냄새와 매혹적이었던 등 근육의 잔상. 이 기괴한 부조화 속에서도 나는 ‘그가 나를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여전히 지울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극심한 외로움이 빚어낸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무료한 백수의 삶에 뭐라도 사건을 만들고 싶었던 몸부림이었을까. 스스로 질책하며 스스로 변명했다. 진심을 담아 호소하자면, 헬스장에 다니며 누군가를 몰래 눈에 담은 것도, 누군가가 나를 따라온다, 의식한다 느낀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말이다. 그 낯선 감각에 나는 이미 취해버렸고 한동안은 매몰돼어 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름 내내 그 타투 박힌 등을 다시 볼 수 없었고, 내게 남은 것은 추악한 망상에 대한 뒤늦은 반성과 설명할 길 없는 외로움을 인정해야 한다는 차가운 사실 뿐이었다. 남몰래 간직하고 싶었던 이 기억은 야속하게도 아주 빠르게, 덧없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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