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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Aug 31. 2016

헛수고의 헛수고

이른바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남자를 죽이고 예닐곱 날이 지난 후였다. 해는 여전히 뜨거웠고 나는 밤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풍선처럼 부풀어진 기대는 기운을 잃고 나의 생기도 앗아갔다. 폭발하는 번민. 사그라들 줄 모르고 타오르던 머릿속의 인장이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시키듯 머리 곳곳으로 열을 옮겨냈다.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로 해놓았지만 이 열기가 가셔지지 않는다. 그날로부터 시작된 고열은 가라앉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집 밖으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모자를 챙기고 문을 열자 그날의 결심이 떠올랐다. 죽임을 당하러 이 발걸음을 옮겼지만 오히려 죽이고 다시 이 문으로 들어갔을 때의 상실감. 한 걸음 떨어져 보면 우습기도 하였다. 헛수고였다.

느껴지는 지독한 습기에 막상 발걸음을 내밀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머리가 무거워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잘 계실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무엇이 중요할까. 나의 모든 존재는 지금 불덩이에 휩싸여 있다. 이런 순간에 내가 어디서 거슬러왔는지가 정말 중요하랴. 생의 존재가 지극히도 홀로 빛나고 있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부끄러웠다. 아서자. 이미 나는 사람을 죽였다. 가로등의 주황 불빛에 나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고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등장하는 편의점. 오늘도 사람들이 파라솔 아래에 널려 있다. 즐거운지 괴로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지쳐 보였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두 개의 소주와 얼음팩을 샀다. 테이블에 내용물을 펼쳐놓고 앉았다. 고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란스러움이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대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문득 한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자네 소설의 문제는 누군가 다가와야만 이야기가 성립된다는 거야,라고 특유의 그 무던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능동적인 데라고는 도무지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능동성이란 것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려온 인간들은 대체로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대하고 거대한 강 앞에서 강물이 내게 끼얹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를 반영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바쁘게 살아왔다. 앞을 보고 무던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것은 숙명도, 정해진 운명도 아니었다. 나의 발로 스스로 일어선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펜대만 잡으면 하염없이 우연에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능동성. 그 말이 주는 거대한 소외감에 숨이 막힌 사람들. 외롭지 않지만 가여운 이들. 그것들을 그려내는데 진력을 다해봐야 남는 것은 질식해 죽은 시체뿐이었다. 그들을 하염없이 애잔하게 바라보다 보면 스르륵 나도 모르는 새에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누군가가 등장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질문을 건넸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게 뭘까요?", "환상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마당가에서 발 끝으로 흙을 톡톡 쳐대던 나의 가여운 주인공들에게는 그들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는 구원자가 있었다. 하도 해괴한 질문이라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도 나의 아이들은 "여신의 '멘스'?", 라거나 "환멸?"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며 순식간에 세계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이들은 우연의 세계를 만나 부딪히며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그들이 기다려 마지않던 세계가 쏟아지는 그 순간. 나는 그 순간이 좋았던 것이다. 스스로 시들어가는 것보다는 부름을 받아한 순간만이라도 피어난다면 그것으로 나의 소명은 다하는 셈이었다. 그것이 부조리라면 부조리겠지만.

어쨌든 머리는 소주 한 두어 잔 마신다고 가벼워지진 않는 법이라 차가운 얼음을 안주삼아 연이어 들이켰다. 좌우로 저들마다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사장 인부들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 셋이 잔뜩 웃음 짓고 있었고, 다른 쪽에선 갓 스물을 넘긴 남자, 여자 아이들 서너 명이 끊임없이 조잘대었다. 한 스무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그 사이의 나를 본다면 참으로 우스운 광경일 것이다. 가만히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순수함이야. 원리가 좀 구리고 지루하지만 천박한 것보다는 나아."

남자아이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안되어도 다음이 있고 또 다음이 있으니까. 기왕이면 먼지 하나 없는 땅에서 밀알을 쌓아 올리는 거야.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아야지."


"선배는 분위기가 다예요. 그거 빼면 아무것도 없어." 우스갯소리들이었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난 너 같은 애들 잘 알아. 바람 같은 거 기다리는 애들 세상에 숱하게 있어. 뭐라도 될 줄 알지? 아무것도 아냐. 내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 알아."

"재수 없어 정말."

여자 애들 둘이 낄낄대며 웃었다. 남자애의 입에는 웃음이 잔뜩 머금어있었다.

"중요한 얘기야 중요한 얘기..."

그러면서 소주 한 잔.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숨이 막혔다. 아이들이 공유하는 웃음의 의미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 것인지 닳고 닳은 옛날의 세계들이 비웃음의 소재로 추락한 것인지. 어쨌든 나는 완전히 동 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만 좀 해요. 애당초 중요한 것들 다 죽어 버렸어요."

더 남루한 차림의 남자애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네가 어디 서있는지도 모르면서." 비웃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 일거에 확 하고 사라져 버렸어요. 그렇지 않아요? 확 하고 확..."

그리고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디에 서있는지 알아서 뭐해요."라고 볼멘소리를 덧붙였다.

"맞아 그래서 좋아. 나도 확 하고 사라져 버릴 수 있잖아. 그런 가능성. 완벽하잖아."


한 여자 아이가 반쯤 풀려있는 눈을 하고 말했다. 그러자 곧이어

"완벽한 거 너무 좋아하지 마. 그거야말로 지루한 거야. 존재하는 것, 발 딛는 곳, 눈 앞에 보이는 게 널려있는데 머릿 놀음하는 거 아주 재수 없어." 표독스러운 말투에 반해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

"선배가 더 재수 없어요. 그렇게 웃으면서 그런 말 해봐야 그 말이 먹혀요?"

"나 진지해. 자고로 뭘 알려면 느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지. 느껴지는 것에서부터..." 하고 여자애의 손등을 간지럽힌다. 곧바로 뿌리치는 손. "어우. 지랄이야." 하며 뿌려지는 웃음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시원하고 고소한 건지. 아아. 괴롭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손을 짚었다. 화마(火馬)의 발이 쉬질 않는 듯 뜨거운 이마가 쿵쾅대었다. 입 안에 얼음을 털어 넣고 술을 두어 번 마셨다. 지루한 사람들. 가여워하기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어지러웠다. 앞으로 글을 쓸 때마다 옆에서 히죽 대고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생각날 것 같았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아닐까. 그리 생각은 했지만 엉덩이에 납이라도 실린 듯 무거워 좀처럼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귀는 소란스럽고.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있자니 살인을 하던 날 밤이 떠올랐다. 나는 그 날 무언가를 불러냈다.

'그건 일순간이었다. 아 하는 탄성이 일었다. 세계가 뒤틀렸다. 샤워를 하고 문을 열었더니 컴컴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초승달 모양의 눈을 가졌고 잘은 모르지만 심연의 언저리에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명백히 적의를 느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차지하고자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 나. 나는 문을 닫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변기에 앉았다. 저건 무엇일까? 무엇이 내게 말을 걸어오려 하는 걸까? 거칠게 심장이 뛰었다. 나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대체로 나는 놀라는 법이 없었다. 믿거나 받아들임으로써 눈 앞에 가야 할 한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 던져 놓았다. 그저 사고하지 않을 정도의 사실만을 받아들이고, 이내 버려버렸다. 당위는 없는 일이었지만 적당히 뭉개고 살아가는 게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한 줌의 불안. 그것을 어딘가 내버려두고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불러온 저것은 아무래도 그 이유로 나타난 것 같았다. 나의 태만함을 뿌리로 자라난 음울함. 다시 문을 열고 나서니 그것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어디론가 스며들었지도 모른다.'

그 날 집으로 쓸쓸히 돌아와 나는 이런 것들을 적었다. 그때의 그 곤혹스러움, 시작된 고열과 두통. 나의 오늘은 그날로부터 잉태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 숨을 몰아쉬었다. 이유가 있어 나온 것이 아니기에 이유가 없이 되돌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마물이 지금 내 집안을 누비고 있을 것이라는 아주 생생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갈 곳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한 소음들.

"나는 완전히 낯선 인간과 완전히 낯선 곳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만 나누다가 죽고 싶어요."

침착하게 한 여자 아이가 말했다.

"얼마나 낯설면 되는데?" "제가 눈 앞에서 죽어도 신고하지 않을 정도요." "그러다 그 사람한테 죽으면 어떻게 해?"

잠깐 망설이다가 "그건 완전히 망쳐버린 거죠. 그 날 하루를." 하고는 으스스한 미소.

나는 온몸에 소름을 느끼며 드디어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직 온전히 남은 소주 한 병을 들고 그 아이들 앞에 섰다. 영문을 모른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사이에서 낯섦 운운하던 여자 아이는 아직도 자신의 공상 속에 빠져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나는 조용히 그 여자 아이 앞에 소주병을 내려두었다. 눈이 마주쳤다. 빛나는 안광. 어쩌면 그날 밤 내가 봤던 것은 저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아이의 정수리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아주 뜨거웠다. 그녀도 열병이었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이런 짓을 하다니. 스스로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또다시 피어오른 불안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내가 그녀가 기다려 마지않던 하나의 우연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간절히 희망한 채로 나는 다시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내 뒤로 무어라무어라 말하는 소리는 들렸지만 외면하였다. 그들과 다시 마주친다고 하여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물음도 나는 세계를 좁혀지게 내버려두지 않을 셈이었다. 내가 쓰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우연들은 세계가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주인공의 골똘한 표정이 귀여워 탄식하듯 등장해버리곤 하는 것이지, 이렇게 스스로 가득한 열병에 못 견뎌 토해내듯 나와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의 격정은 주인공을 삼켜버릴 것이고 그 순간 주인공은 우연의 세계에 포함돼 일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만큼의 비극, 그것만큼의 무도함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온전히 이 일을 잊기로 하였다. 또다시 남은 한 줌의 불안과 간지러움은 그대로 집안에서 숨 쉬고 있을 마물에게로 던져주면 그만이다. 그놈이 온전히 고개를 들면 내가 완전히 죽어버리면 되니까 괜찮다. 다시는 살인은 하지 않을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구불구불한 골목에서 빠져나오자 네온사인이 잔뜩 나타났다. 내 몸 곳곳을 감싸는 습함이 이곳에서는 덜해지리라. 사람들로 분주한 거리 속에서 어떤 청량함이 느껴졌다. 이 곳에서 나는 온전한 타인이자 방관자였다. 마찬가지로 내 불덩이 같은 머릿속과는 무관하게 분주한 사람들. 나는 잠시 우두컨히 멈추어 섰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야 할 방향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취기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 잔고는 이번 달 생활비를 제하면 고작해야 몇 만 원. 이 외로운 곳에서는 불러내 함께 마실 이도 없었다. 그렇다면 갈 곳은 뻔했다. 근처에 보이는 싸구려 술집을 찾아서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왠지 그곳에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어떠한 우연과 인연도 쌓고 싶지 않았지만, 철저한 소외 속에서 말라죽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딱히 죽으러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큰 대로에서 보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어쩐지 이런 곳에 내가 찾는 곳이 있을 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펼쳐진 골목에는 자뭇 세련되어 보이는 술집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골목의 반대편 출구에는 사창가의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그 앞으로는 아무도 없는 경찰차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다. 헐벗은 여자 몇 명이 경찰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깔깔. 부조리다 부조리. 내 옆으로 어떤 뚱뚱한 남자가 그렇게 읊조리며 지나갔다. 그 남자는 아가씨들을 지나쳐 그대로 사창가로 들어갔다. 어지러운 밤이었다. 나는 사창가로부터 서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슈퍼의 평상에 앉았다. 가게 안은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저기요."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등장했다. 날카로운 음성에 뒤를 돌아보니 마스크를 쓴 여자였다. 대답은 않고 빤히 보았다.

"아저씨. 조용한대로 가실래요?"

여자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굳이 노려볼 필요까지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게 해드릴게요. 진짜 할 생각 없어요?"

그녀는 키가 큰 편이었다. 호피무늬 스커트와 후드 집업을 입고서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가렸다. 하지만 드러나는 안광만으로 그녀의 존재감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성난 음성. 그것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그 노여움의 방향이 어디인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나지막이 얼마예요 라고 묻자 무덤덤한 목소리로 한 번에 십 만원, 입으로는 오만 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소는 자기가 조용한 곳을 안다고 했다. 건너편 담배를 태우는 여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오늘 하루 같이 있으면 얼마예요?"

"그건 안 해요. 적당히만 하시죠." 교조적인 태도였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녀는 자 그럼, 하더니 따라오라고 내게 고갯짓 했다. 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발걸음은 쫓기고 있는 것처럼 조급했다. 내가 그녀에게 조금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조금은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조급해 보이는 태도는 여전했다.

"횟수로 돈을 받는데 정해진 시간은 없어요?"

"15분이에요. 그래도 걱정마요."

골목 사이로 그녀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아주 허름한 이층짜리 상가 건물이 보였다. 일층의 비디오 대여점은 문을 닫았고 이층에는 간판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더디게 걷는 나의 팔 소매를 붙잡고 이층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나는 힘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바깥 가로등 불빛으로 형체만이 구별되는 이층으로 인도되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이층 여자화장실의 주황빛 보조등을 키고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하였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곁을 따라갔다. 그녀는 화장실 문을 잠그고 아주 사나운 표정으로 나의 옷깃을 푸르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서는 상냥한 손길로 그녀의 손을 치웠다.

"됐어요. 15분 동안 그냥 이러고만 있죠."

내가 말하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허탈한 듯 두 손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냥 이 공간에서 있어주기만 하면 돼요."

"그래요. 마음대로 하시죠. 하지만 십만 원이에요."

그녀는 기대도 궁금증도 전혀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화장실 벽에 기대었다. 차가운 촉감. 그리고 이 좁은 공간에 가득한 그녀의 존재감. 이것으로 잘 된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그녀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날이 서 있는지.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죠?"

"솔직히 말하라고 하는 말이죠?" 또다시 빛나는 안광.

"어차피 두 번은 안 볼 사람인데 재미난 쪽의 이야기로 해요."

"네. 아저씨같이 미친 사람들 몇 명 있어요." 둘 중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럴 법해요. 나도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주, 아-주 오랜만이니까."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침을 뱉고서는 담배 한 대를 집어 물었다. 그러면서 내게도 권하려는 듯 손을 뻗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이야기 들려줄까요?"

여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서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또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저기 사창가에서 일했을 때는요. 아저씨 같은 사람들 진짜 많았어요."


"그런데 그 미친놈은 일주일에 한 번, 꼭 영업이 끝날 때쯤 아주 지쳐 있을 때 왔어요."

"그 아저씨가 처음 왔을 땐 우울한 얼굴로 그냥 앉아만 있는다고 했어요. 그런 놈들이야 워낙 많으니까 그러라고 했죠. 그러고서는 어떤 날은 괜히 들떠서 별 거 아닌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가고, 어떤 날은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가 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 미친놈이 일 년을 매주마다 오는데 처음에는 예의상 하는 말도 들어주고 하다가, 어느 때부터 귀찮아져서 그 아저씨가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한 숨 자기도 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하며 다시 한 모금.

"그런데 그 날 그 아저씨가 왔어요. 이미 그 아저씨는 그 주에 한 번 왔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궁금해져서 살갑게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아무런 말도 안 하더라고요. 그냥 조용히 숨을 죽이는 듯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나가는데 곧바로 돈을 더 내고 다시 들어왔어요. 그러고는 또 가만있다가. 내가 잠들려고 할 때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어봤어요. 혹시 자기 동생과도 자줄 수 있겠느냐고. 자기 동생이 지체 장애인인데 얼마 전부터 자기 성기를 가지고 감당도 못할 짓을 한다고. 병원에서는 욕구를 충분히 풀게끔 해달랬다고.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녀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솔직히 별생각 없었어요. 기분이야 불쾌하겠지만 우리가 사람 가려가면서 이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장애인보다 더 장애인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요. 이상한 게요. 내가 알았다고 하는데도 그 아저씨가 막 우는 거예요. 정말 미안하다고. 자기가 이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한 번도 잡지 않았던 내 손을 잡고서는 눈을 바라보는데. 어우 생각하면 소름 돋아."

여자는 괜스레 양 팔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근데요." 혐오인 듯 연민이 실린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제가 병신 같아서. 그냥 그 순간 이 아저씨가 너무 가여워 보이는 거예요."

그러고서는 그런 일은 앞으로 결단코 없으리라는 듯 다시 아주 쌀쌀맞은 눈초리를 지었다.

"그래서 그 미친놈을 안아줬어요. 그러더니 그 아저씨가 더 거세게 흐느끼면서 내게 고맙다고. 아니 미안하다고. 연신 반복하는데 그 소리가 진짜 듣기 싫어서 그냥 키스해줬어요. 연신 키스해주고 안아주고 하니까 아저씨가 나를 한참 바라보며 내 머리를 쓰다듬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그 아저씨와 자게 됐어요. 드디어 일 년 치 돈을 정산한 셈이죠. 그런데 일이 다 끝나고 그 아저씨가 한참을 앉아 있더니 나를 바라보고 머뭇거리는 거예요. 딱 봐도 뭐. 내가 알았다고. 동생은 가게 오빠한테 말해놓으면 될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아주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스읍-. 하고 여자는 새로 담배에 불을 붙여 피웠다.

"그러고 나서 그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더니 나한테 주더라고요. 내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까. 그 아저씨가 일을 치렀으니까 하고 중얼대면서 대가예요 라고 말하는데요. 대가라니. 와 진짜. 시발. 생각해보면 화낼 일이 아닌데 진짜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왜 화가 나는 건지. 하지만 정말. 정말 그 순간은... 치욕스럽다는 말로도 다 표현 안돼. 제가 손님한테 화낸 건 그때가 처음일 거예요. 그 아저씨 뺨을 얼마나 쳤는지 몰라요. 방 안에 있는 물건 다 집어던지고. 그러니까 오빠들 와서 막 뜯어말리고. 근데 그 새끼도 진짜 미친놈이지. 그 놈이 맞으면서는 계속 혼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갑자기 오열을 막 하는 거예요. 미친 새끼."

여자의 미간은 계속 찌푸려져 있었다. 머릿속에 털어내어지지 않는 것들이 옮겨 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요?" 시니컬한 말투.

"그러고 나서 몇 달이 지나고 신문을 보는데 그 미친 새끼가 자살을 했더라고요. 자기 동생이랑 같이. 칼로 동생을 찔러 죽이고 자기도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는데. 소름이 진짜. 개새끼."

여자는 다시 한 숨을 쉬더니 웃긴 얘기죠?라고 되물어왔다. 처음으로 그녀의 미소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가짜 같기는 했지만.

"근데요."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날 당신이 뺨을 때리지 않았으면. 그 남자. 당신을 죽였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싸늘하게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

"어떻게 그걸 아냐고 물어보면 무서운 짓 할 거예요?" 자뭇 깜찍한 질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람을 죽여봐서 알아요." 그녀가 담배를 올리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사람은 안 죽이니까 걱정 말아요." 라고 말하니 아주 천천히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무서운 한편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더 무슨 말인지 알 필요도 없을 테니까 설명은 안 할게요. 다만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해요." 떨리는 목소리.

"내가 지금 당신 눈 앞에서 죽으면 어떨 것 같아요?" 그녀의 살결이 얼어붙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 신고 안 할 거예요. 눈 앞에서 죽는다 해도 그대로 도망갈 거니까 남의 남은 인생 망치지 말고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어요. 이상한 짓 할 것 같으면 지금 내가 먼저 죽어버릴 거니까. 생각도 하지 말아요."

그렇게 단호한 음성을 들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농담이라고 얼버무리고서는 그녀에게서 담배를 하나 받아 피웠다.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아주 긴장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에게 하나의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되었음은 명백해 보였다. 더 이상 농을 치는 것도 몹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계를 보자 그녀도 따라 핸드폰을 열어 시계를 보았다. 15분은 그녀가 두 번째 담배를 태우는 순간 이미 지나있었을 터였다. 일단 내 주머니에서 오만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편의점으로 가서 현금을 좀 뽑자고 말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나는 상가 건물을 나와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근처에 편의점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아까 갔던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는 내내 그녀는 골똘한 표정으로 타박타박 땅을 차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아까 였던 그 조급함은 사라져 보였다. 편의점 벤치에는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다만 열병에 걸린 여자 아이만이 일행도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를 의식한 듯 바라보는 시선. 나는 조금의 불안함을 가지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ATM기에서 돈을 뽑고 녹차 음료 하나와 담배 하나를 계산해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게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특별한 작별 인사도 없이 가볍게 고개만 까딱하고 서로 돌아섰다. 실로 그녀다웠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들어서 주황빛 가로등 사이에서 고개를 한 번 들어 보았다. 눈이 부셨다. 달은 하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바라 보는 것이 없구나. 묘한 해방감이 일순간 들었다.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열이 나는 것을 잊은 것 같다. 머리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불덩이 같았다. 하지만 숨을 내쉬기에 조금은 편해진 것 같았다. 그때 타박거리는 발걸음이 들렸다. 아까 그 열병에 걸린 여자 아이였다. 아. 나는 아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나랑 얘기 좀 할래요?"

건조한 음성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했다. 마음이 아주 복잡하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우연들이 나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여자 아이의 허무한 눈을 보는 순간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까보다 숨이 가빴다. 그리고 불연듯 집 안 어딘가에 숨 쉬고 있을 마물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이미 스며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 또 그날 밤의 연속이다. 그 날에 대한 속죄조차 없이 나는 또 대문 앞이었다. 다시 집안에서 살인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결국. 오늘의 산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헛수고의 헛수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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