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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Sep 21. 2016

픽션이 되지 못한 것들

벌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화제를 전환했다. 시간이 지나 오늘 다 좋았다고 말했다. 자기도 다 좋았다고 답했다. 내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지는 모르겠다.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이유도 모르게 서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구름이 예뻤다. 그 구름 속을 헤치는 것처럼 잡히지도 않는 이야기들을 했다. 대화는 별로 흥미롭지도 않았는데 그냥 얇은 입가가 좋아서 좋았다.


가고자 했던 곳이 문을 닫아서 곧이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닿을 듯 닿지 않은 그 묘한 거리감에 매혹되었다. 구두가 또각였고 나는 새로 산 신발을 질질 끌었다. 어딘가 망설였던 것은 내 친구가 '재방송' 이야기를 해서였다. 맞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으로 변하고, 나는 시간을 뒤쫓는 존재에서 어느새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느 날 갔던 절에서 스님이 불기둥에 꼭 손을 대봐야만 다칠 것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그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친구는 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불기둥이 얼마나 뜨거운지 궁금 할 것도 같다'라고 생각하였다.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예감이 무척 좋았는데 뒤에 벌이 날아다녔다. 어떤 상징처럼 느껴졌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해왔고 알았다고 하였다. 눈이 짧게 마주쳤다. 아까 걸으면서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현실적이고 냉철한 것처럼 보이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일 것 같다'라고 말한 대사를 들려주었다. 다른 예를 들면서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너는 맑고 밝지만 실은 자주 생채기가 날 사람일 것 같다'고 말했을 것이라 하였다. 헛소리였다. 근데 예전에 네가 '눈치를 많이 본 사람들은 알아요'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해서 특별히 정정하지는 않았다.


대화를 하다가 엄마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겨도 나쁘게 생각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너는 사람이 사람을 상처 주는 게 싫다고 하였다. 나도 물론 아빠의 처지가 안타까울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괜히 한 숨 지었다. 사랑이 시간의 박제품 같다고 생각했다. 미래를 붙잡으려고 현재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사람들. 나 역시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사의 톤 하나 바뀌지 않은 옛날 극의 제목만 달리해 다시 카메라를 돌리려고 하는지도 모른다고. 늦은 밤 나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먼저 일어났을 때, 마주친 눈의 시선에서 옅은 바람 같은 게 부는 착각이 들었다. 뭐 날씨가 워낙에 좋아서 실제로 그런 게 불었을지도 모른다. 남겨진 너와 인사를 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하면서 나는 그제야 미리 가져간 남방을 꺼내 입었다. 어느새 서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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