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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Oct 01. 2016

'롤리타'라고 불리우는 소설에 대하여

여흥이 남아 해방촌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까는 조금 소란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조명도 소리도 잠잠해져 꿈속에 머무는 것 같았다. 그때 내가 그 아이에게 롤리타의 첫 문장을 어설프게 불러 준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생각이었다. 세간의 말들로 누더기가 된 시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밤공기는 조금 더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 그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롤. 리. 타.'하고 따라 하였다. 정말로 입천장에 혀 끝이 닿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마냥 맑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바라보면서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해사한 미소와 동시에 그 아이가 대화의 빈 공간을 웃음과 농담으로 메우려 할 때 내는 웃음들이 생각이 났다. 사실 그럴 때마다 나는 울적해졌다.


어둠 속을 헤매며 우리는 진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지금 쓰는 이 글처럼 은유의 뒤에 숨어 시답잖은 농담만 건넨다고. 그러자 그 아이는 묘한 웃음을 지은 것 같았다. 그리고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기는 남들이 자기를 다른 나로 오해하는 게 너무 상처가 돼, 차라리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였다. 그 아이의 말은 진심이었겠지만, 또 그 아이가 대화의 틈을 예의 그 웃음으로 무마하는 것을 보며, 그 말은 어쩌면 그저 바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어에는 때가 많이 낀다. '롤리타'라는 단어로부터 이 책을 펼치게 된 사람에게 저 첫 문장은 하나의 광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심을 가리기 위한 커튼을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심의 어두운 색들을 피해 화려한 무늬와 색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자 한다. 하지만 옅은 바람일지라도 커튼은 휘날리기 마련이다. 이 소설은 바람이 부는 창가의 찰나에 대한 소설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둘러싼 커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나보코프는 '독자는 음탕한 색채가 더 늘어나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재미없고 지루해하며 읽기를 멈춘다'라며 자신의 소설에 대한 반응을 일갈했다. 어린 소녀를 향한 사랑과 애착, 섹스. 그렇지만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눈길을 잡아두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을 위와 같은 단어들로 싸구려 포르노그래피로 일축해버리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날 밤의 모든 것이 너무 적절해서 우리는 음악을 듣기로 했다. 11분짜리 음악을 하나 틀어놓고 서로 말없이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야경을 바라보는데 그 아이가 한숨을 내뱉듯이 말했다. 말 하나 없어도 대화를 하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그 아이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어쩌면 그때 옅은 바람이 펄럭였을지도 모른다. 눈부신 베일이 벗겨지고, 그 시선의 끝에서 그 아이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 위에 부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랑이기도 했던 돌로레스를 떠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작은 악마, 오직 단 하나의 로. 그리고 더 이상 소녀(이른바 님펫)가 아니게 된 롤리타 앞에서 무너지는 험버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여러분은 나를 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지 말라고 야단을 하실 테지만 재갈을 물리고 반쯤 죽는다 해도, 나는 내 가난한 진실을 외쳐댈 것이다. 내가 얼마나 롤리타를 사랑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롤리타, 창백하고 더럽혀지고 다른 사내의 아이로 배가 부른 여자, 하지만 여전히 잿빛 눈에 검은 속눈썹, 여전히 붉은 갈색에 아몬드 빛, 아직도 칼멘시타, 여전히 나의 것.'

롤리타는 이 한 줌의 문장을 가리기 위해 설치된 거대한 장막과도 같은 소설이다. 그 아이의 웃음에서 이 소설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진실을 숨기려 켜켜이 걸어놓은 수많은 단어와 농담들 사이에서 외따로 빛나는 하나의 점. 롤리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끄러움이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길을 잘못 들어 집으로 가는 길에 해방촌을 한참 돌았다. 그 아이는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고, 침묵의 공간을 조금 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단지 피곤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의 돌아오던 길, 무너져가는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골목길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나는 대화가 사그라든 빈 틈에서 그 아이를 엿보았지만 어쩌면 대화들 사이에, 수없이 걸었던 골목의 한 어귀쯤에서 단어 하나 정도의 진심을 더 놓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정말 그럴 것만 같아 그 날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롤리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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