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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Oct 07. 2016

소세키의 삼부작

1.

"산시로는 요즘 여자에게 사로잡혀 있다. 연인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차라리 재미있겠지만,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건지,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 얕보아야 하는 건지,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계속해야 하는 건지,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 <산시로>


고속버스에서 내려 또 버스를 탔다. 어쩐지 손이 홀가분하다 했더니 책을 두고 내렸다. <그 후>라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빨리 잊기로 하였다. 정류장에 내려 근처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이제까지는 안 피웠지만 이제라도 피워볼 요량이었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앉아서 불을 붙였다. 그냥 그랬다. 선배처럼 맛있고 멋있게는 안 피워지는 것 같았다. 그냥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고 이래저래 돌려본다. 폼나게도 생겼다 싶다.


저번 주 정릉에서 학교 사람들이랑 술을 마셨다. 또 철학 얘기를 했다. 나는 의료보험료가 비싸 자살을 선택한 모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술 병 하나도 비우지 못하고 다시 마르크스나 라캉으로 돌아왔다.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한 후배가 어떤 세계도 창조될 수는 없다고 말하자 다들 웃어넘겼다. 나는 그 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시킨 안주와 함께 말은 떠나갔다. 그러다 여자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좀처럼 주제가 떠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는 듯 웃는 듯 술을 마셨다.


그러다 화장실을 가려고 가게 밖을 빠져나왔다. 허름한 건물을 돌아 옆편으로 돌아서니 그 형과 여자 동기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자갈로 된 바닥을 힘차게 한 번 찼다.


나는 곧바로 선배에게 전화했다. 지금 꼭 만나야 한다고 전했다.


2.

"그는 다만 그의 운명에 비겁했다. 4,5일 동안 그는 손바닥 위의 주사위만 바라보며 지냈다. 오늘도 아직 쥐고 있었다. 빨리 외부에서 운명이 찾아와 그 손을 가볍게 툭 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쥐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기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온갖 싸구려와 가짜들로 뒤덮여 있는 세계가 그녀의 영혼에 생채기를 일으킬 때면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가가 먼지를 털어주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만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에 삐뚤거리며 모나 있는 혹마저 보듬어 줄 수 있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신여대 입구에서 내렸다. 가는 내내 가슴이 차갑게 식어내려갔다. 건물 유리창에 비추어진 내 얼굴에는 어쩐지 결연함이 있는 것도 같았다. 잔뜩 굳은 얼굴로 멀리서 손을 흔드는 선배를 보았다. 구김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쓰잘데 없는 안부를 잠시 나누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터덜대며 별 말없이 걸었다. 사실 선배의 미소를 본 순간부터 나는 곤궁해졌다. 나는 그녀를 구원하러 온 것일까, 아주 깊은 구덩이로 밀어 떨어뜨리려 온 것일까.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형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선배는 담배를 좀 피운다고 하였다. 나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녀는 상냥한 태도로 불을 붙여주었다.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 형 이야기가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사실 나는 온전히 그녀를 가로채려 이 곳으로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그녀에게 내 손에 든 주사위를 좀 떨어뜨려 달라며 운명을 맡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더 비겁한 짓이었는지 당시에는 가늠이 잘 되질 않았다. 그저 조금은 들뜬 것 같은 그녀의 기분이 망쳐지지 않기를 바랐다. 선배는 잠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 형에게 전화를 했다. 왜 말도 없이 떠났느냐고 묻는 형에게 다시 보지 말자고 하였다. 욕을 몇 마디 더 얹어주었어야 하는데. 하고 뒤늦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밤의 모든 것들은 문을 두드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문을 넘어 발을 내딛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는 생각했다.


3.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문>


삼일 후 진주로 여행을 갔다. 전 여자 친구가 살던 곳이었다. 별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익숙한 곳을 갔다. 책을 하나 가져갔다. <그 후>라는 책이었다. 전작인 <산시로>를 읽었었는데 미네코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부분을 읽다가 선배가 그 형과 사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때도 상황이 아주 웃기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후>는 한 남자가 친구와 결혼한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하여서 구미가 당겼다.


진주성 아래, 남강 주변으로 늘어서있는 아무 여관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있었다. 책을 몇 줄 읽으며 핸드폰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둘째 날에 책을 다 읽었다. 그제야 후회가 들었다. 다이스케나 나나 해가 져가는 문 앞에서 그녀가 넘어오기를 바라고 바라던 것이었다. 단지 노크를 하였을 뿐. 사실 그녀는 문 너머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골짜기 한 군데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뒤돌아볼 용기조차 없었던 탓이지. 전화를 또 하려다 말았다. 싸구려 시를 몇 개 적다가 잠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정류장에서 몇 개 물어보았던 담배는 결국 피우지 않기로 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났고 선배가 다음 학기 휴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면하게 지내던 그 형은 결국 그 동기와 사귀기로 하였다. 사람들의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이후 대학원을 다니면서 그 둘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불길 같던 분노가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시기에 <문>을 읽었는데,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결국 세상의 시선을 뒤로하고 함께 살아가는 부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묘했다. 결국 죄책감의 멍에라는 출구를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문의 그늘에서 서로에게로 침잠하여 도리어 깊이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해내지 못한 이야기 같기도, 그냥 그 형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소설을 읽게 된 시기가 유난히 공교롭다는 생각을 했다.


선배와는 그 뒤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닿지 않은 건지 닿지 않으려 한 건지는 모르겠다. 때로 생각이 났지만 그녀의 얼굴 한편으로 초라했고 위태했던 나의 모습이 보여 어쩐지 꺼려졌다. 순진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담배를 태워보던 나, 팔푼이처럼 '스트레이 십(길 잃은 양)'을 읊조리며 도저히 미네코에게 닿을 수 없으리라 굴욕감을 느끼던 산시로. 언젠가 나의 이십 대 초반은 소세키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할 때는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책을 뒤적여보며 그때의 순진했던 내 눈빛이 그리워졌다. 그 망설임과 흔들림이 어느샌가 일거에 내게서 확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지도 모르겠다. 뭐 어쩌면. 선배와 걸었던 아파트 단지 어딘가. 진주의 어느 여관방 쓰레기통에 버려진 시 사이에. 아니면 고속버스에서 놓고 온 <그 후>의 어느 페이지에 두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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