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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Apr 19. 2017

은하수를 채운 책장

안나가 책을 읽을때마다 어른들은 혀를 찼습니다. 안나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는 일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릴때부터 안나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안나는 빛나는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세상이 궁금했습니다. 비록 지금 안나의 세계는 미싱 공장의 지하방 한 켠 침대뿐이었지만, 언젠가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올려다보며 잠이 들 것이라고 안나는 다짐했습니다. 가끔 너무 외로워 홀로 눈물을 훔칠 때에도, 안나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안나의 가슴 속에서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늘 책을 귓가에 두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안나는 맑은 말씨를 쓰고 아주 근사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습니다. 안나가 웃음을 머금고 눈을 반절로 접으면 달이라도 입꼬리에 걸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나의 빛나는 미소에서 자신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안나를 외면하였습니다. 어느날 안나가 잠이 든 사이, 언니들은 안나가 아이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안나는 심장이 두근거려 두 눈을 초롱하게 뜨고 있다가도, 언니들이 속삭이듯 징그럽다고 한 말에 눈물이 터져나와 눈을 감았습니다. 안나는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사랑하는 별들이 등장하는 시를 떠올리며 다시 사람들에게 근사한 웃음을 짓곤 하였습니다.


언젠가 안나는 엄마를 따라 천문대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안나가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에 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안나는 엄마와 함께 담요를 두르고서는 어머니가 해주는 별자리 이야기에 별보다 더 눈을 반짝였습니다. 안나는 특히 사수자리 이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엄마는 사수자리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를 안나에게 해주었습니다.


봄동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요정들은 단 하루만 세상을 구경하러 나오곤 합니다. 요정들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기적들을 그 하루에 이루어내곤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적을 지켜보기위해 꽃이 요정을 마중나오는 것이라고 안나의 엄마는 안나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치 벌이 침을 쏘아내면 죽는 것처럼 요정들도 신비한 힘을 쓰게되면 그 자리에 죽어버리게 되는데, 누군가 그것이 가여워 죽은 요정들을 하늘로 데려가 별로 수놓는다고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안나는 요정의 운명이 안타까워 엄마의 품에 안겨 벌개진 눈을 숨겼습니다.


그 날. 요정은 어느 목동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소년은 그 날 밤 마굿간에서 병들어 쓸쓸히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아무도 소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정은 그런 소년을 위해 죽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정은 기적을 이루어주는 활 시위를 바로 당기지 못하였습니다. 요정은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를 내가 사랑한단다. 그 말을 남기지 않는다면 소년에겐 이 모든 기적이 저주로 느껴질 것이었습니다. 요정은 소년의 운명이 가여워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요정은 마굿간 너머로 다른 요정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꾀를 내었습니다. 요정은 숲속에서 쉬고 있던 요정의 활통을 훔쳐 소년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한 발, 소년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한 발을 쏘았습니다. 동이 트고 소년의 호흡이 차츰 안정을 찾을 때쯤 요정은 잠든 소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의 미래에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찰거야. 너의 운명은 너가 온전히 원하는대로 흘러갈거란다."


요정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소년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초런 나뭇잎 위에 올라가 또 울다가 이슬이 되었습니다. 요정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별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안나는 엄마의 차가운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엄마는 안나의 머리칼을 넘겨주고서는 말을 이었습니다.


소년은 지난밤의 열병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깨어나, 자기가 원하는대로 솔직하게 살았습니다. 때로 고독한 날들도 있었지만, 소년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갔으며 마음이 아픈 누군가를 어루어만져줄 너른 품을 가진 어른이 되었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소년이 별이 되던 날. 소년은 단 하나의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요정의 눈물을 거두어 달라고. 예정된 곳으로 소년은 떠나고, 소년을 어여삐 어긴 누군가는 아직도 맺혀있는 요정의 활자루를 거두어 밤하늘에 걸어두었습니다.


안나는 이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해 이슬이 되도록 운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뭇잎에 내려앉은 요정의 힘없는 어깨를 상상하니 어쩐지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나는 요정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울음이 나는지 모르겠어."


엄마는 안나를 조용히 힘주어 안아주었습니다. 엄마는 안나에게 떠나간 안나의 아빠도, 자신의 건강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가엾은 요정만큼 아끼고 사랑한단다. 언젠가 내 말이 너에게 이슬로 남는 날이 온다면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렴.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


엄마는 그 때 너무 많이 울지 말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가슴이 답답하도록 자신을 감싸안을 때, 안나는 조용히 운명에 대해 생각 하였습니다. 안나는 어딘가 슬퍼보이는 엄마에게 예의 그 근사한 미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엄마도 안나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사수자리는 엄마의 별자리.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안나는 하늘의 별만큼 책장 가득 책이 채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둥근 언덕 위에서 엄마를 뿌리며, 안나는 은하수로 가득 찬 책장을 손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책장의 한편에는 어쩐지 작은 오소리가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습니다.



* 간헐적으로 계속될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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