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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Jul 11. 2016

왜 아이유는 철이 들어야 하나요?


    여기 뜨거운 감자가 있다. 아이유의 곡 <Zeze>. 도발적인 소년, 은밀한 톤의 목소리, 묘하게 해석될만한 가사. 화자의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화자가 그린 대상을 통해 청자에게 관능적인(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야한 느낌)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대중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그 모티브가 된 대상이 청소년 권장도서 주인공인 학대받는 5살 아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가지 의구심이 든다. 이 노래가 정말 어린아이에 대한 성적 욕망을 제재로 한 노래인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윤리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이 곡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이 곡을 폐지시켜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이(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으레 용서받는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그 어떤 것. 그 어떤 것을 만든 결핍 그 자체, 또는 결핍을 통해 잉태된 상징적인 인간. 사실 아이유가 다룬 소재는 그녀가 싸구려 성 도착증을 앓고 있어서 다룬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재생산된 진부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유에게는 ‘세 번 입천장에서 혀 끝으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롤. 리. 타.’가 험버트를 몇 마디로 지옥에 빠뜨리듯, 알렉스가 자유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장황하게 선언하듯, 누나에게 얻어맞은 제제가 개년이라고 외치는 그 순간 이 상징을 발견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상징의 속성이 외설적인가, 그렇지 않은 것을 떠나서 그것을 관능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고착된 성적 욕구를 의미한다 말할 수 있을까? 아이유의 <Zeze>가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성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과 성적으로 교제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 5살의 학대받는 어린아이를 소재로 삼아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그것을 소재로 쓰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면 시리아 내전으로 피난을 가다 숨진 어린이들의 시체 사진 역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없음은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을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소재 그 자체가 아니라 소재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느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고결할 때에만 허락되는 소재가 있을 수 있을까? 비참하다고 그것이 꼭 엄숙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징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이 혐오든 섹시함이든 그것은 전적으로 청자의 몫이며 창작자는 자신이 그려내고 싶은 것을 자신의 생각하는 최적의 소재와 방식을 통해 드러낼 뿐이라는 점이다. 아이유는 제제의 결핍을 소재화 했다. 그것이 미적으로 뛰어난 방식이었는가? 하는 점에는 수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물음은 이미 물음이 아니다. 답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창작자에게 ㄱ, ㄴ, ㄷ을 빼고 언어를 쓰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다.


에곤 쉴레, 벌거벗고있는 소녀


    이렇듯 예술이 도덕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출판사 동녘처럼 저급하게 작품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해석의 몫을 출판사가 짊어지려는 시도 역시 우스꽝스럽지만 가장 심한 것은 예술이 대중들의 도덕적인 목적에 복무할 때 그 의미를 가진다는 태도이다. 동녘의 논리대로라면 마틴 쉴레의 작품이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은 도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제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포르노그래피인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 처형의 근거가 되는 세가지


    아마도 우리는 액자가 간접적으로 그림의 감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만약 액자가 걸기에 너무 무겁다거나, 너무 웅장하고 화려해서 소박한 수채화를 감상하는 데 집중하기가 어렵다면, 이 경우는 액자는 그림 감상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액자가 그 수채화의 예술적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매튜 키어런, 예술과 그 가치, p.208)


    니체는 “예술이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예술의 도덕적 성향에 대한 저항, 즉 예술이 도덕에 복종해야 한다는 데 대한 저항이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의미하는 바는 도덕은 악마에게나 줘버리라는 것이다.”라며 예술과 도덕이 분리되어야 함을 아주 거칠게 주장했다. 이 말에 온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이 대중들의 도덕적 교화에 복무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일 때, 사회가 낳을 수많은 졸렬한 유산들과 함께 어쩌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역시도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운명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던 충분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은 대중들의 커다란 공분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글일 수도 있다. 사실 사람들은 <Zeze>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아이유라는 인간이 어떤 혐오스러운 생각을 했는지를 더 궁금해한다. 아이돌이라는 예술의 장르에서는 화자 역시 예술의 제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을 듣고 불쾌감을 느꼈다면 듣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사람들이 굳이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녀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질문한다. “너는 어쩜 그렇게 교활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니?”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대중 예술이 가진 속성이라고. 대중 예술의 위치는 대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며. 나도 그 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녀가 대중과 괴리된 채 대중적이지 않은 곡들만을 계속 발표한다면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의 방식에 대해서 찍어 누르려는 교조적인 시선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개인의 생각에 대해 제한하려는 시도이다. 하물며 예술의 영역에서는 다를까.


티에르니 기어른, Home


    2001년 3월 사치(Saatch) 갤러리의 <나는 사진기 I am a Camera> 전시회가 런던 경찰청의 외설 출판물 담당 부서에 의해 수색을 당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작품 때문이다. 사진작가 티에르니 기어른은 자신의 6살짜리 딸과 4살짜리 아들을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채 가면을 씌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 작품은 구도와 설정, 배경 모두에서 관능적인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법 당국에 고소를 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방식이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불러일으키려는 감정이 어린아이를 향한 성적인 욕망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며,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욕망이 인간에게 중요한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의 전제에는 생각은 그 자체로 처벌할 수 없다는 중요한 자유의 원칙이 있었다.


    물론 아이유가 표현을 위해 사용한 제재인 제제는 적합한 표현의 수단이 아닐 수 있다. 제제라는 캐릭터가 가진 수많은 속성들 중 아이유가 선택한 단면은 너무 상업적이었으며 그것을 다루는 방식 역시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노래가 몇십 년 뒤에 회자되거나 교과서에 실릴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서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기나긴 사과문을 쓰고 죄인처럼 지낼 것을 강요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세계에서 진부한 것들은 외면을 통해 사라져 나갈 뿐이다. 그 밖의 방식으로 어떤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통해 인류가 이루었던 수많은 진보를 한 순간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는 것과 같다.  


영화 롤리타 스틸컷


솔직히 말해 우리는 애들이 노브코프가 가르치는 과목에는 절대 등록해선 안 된다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애들이 사적인 대담에서 그와 얘기를 하거나 어두워진 뒤 교정에서 부딪히거나 할까 봐 걱정이랍니다!(Andrew Field, Nobokov: his life in part, p.277)


    위의 내용은 <롤리타>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에게 학부모들이 보내온 항의 편지이다. <롤리타>가 출판사로부터 포르노 취급을 받으며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뻔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 결국 진부한 결론이다. 아이유가 나보코프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아이유의 사과 한 마디로 수많은 나보코프들은 스스로에게 검열의 칼을 씌우고 펜을 멈칫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유의 다음 앨범은 보다 지루하고,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들로 대중의 사랑을 구할 것이다. 그 세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디스토피아의 모습 이리라. 그리고 대중들은 지루한 것을 못 견디며 그녀를 내칠 것이다. 마치 어른이 되어버린 듯. 밍기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글은 2015년 11월 8일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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