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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Jul 12. 2016

헤픈 거.. 그거 나쁜 거야?

영화 <가족의 탄생>, <바람난 가족>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


    아침 토크쇼의 단골 질문, ‘부부간의 스킨십’에 대한 흔한 대답은 “스킨십은 남이랑 하는 거지. 아내는 가족이잖아”. 이 우스갯소리에 반응하는 남자들의 공감대 섞인 분위기만으로 결혼에 대한 어린 시절 나의 환상은 깨져버렸다.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되는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더 이상 이성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가족이 무엇이기에 이런 끔찍한 비극들을 양산해낸단 말인가. 이 질문에 영화 <바람난 가족>과 <가족의 탄생>은 우리가 가진 하나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무너뜨림으로써 우리에게 오히려 되묻는다.


들을 준비는 되고 이 자리에 앉았니?


    두 영화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에 대해 표현한 말처럼 ‘누가 보는 사람만 없다면, 어디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들이다. <가족의 탄생>에서 미라의 남동생인 형철은 어린 시절 집에 나가 연락도 없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20살이나 많은 애인 무신과 나타나 미라의 집에서 살림을 꾸린다. “내가 책임질게.”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무신과 전남편의 아이를 제멋대로 집에 받아들이고는 훌훌 떠나버린다.



    한편 <바람난 가족>의 영작은 누가 봐도 번듯한 직업과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게 평온하진 않다. 그에게는 아내 몰래 깊은 내연의 관계를 가진 여자가 있다. 영화 속에서 그가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은 드물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는 빈번히 애인을 찾아 잠자리를 갖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내와의 섹스에는 더 이상 충실하지 않다. 그는 그저 밀린 일을 해치우듯 정사를 마치며 아내의 욕구를 외면한다. 영화 속 남자들은 가장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흔히 우리가 가장에게서 요구하는 책임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외롭다. 영화에서 영작의 애인은 말한다.

   

“땀 뻘뻘 흘리며 섹스해봐야 외롭긴 마찬가지죠?”

   

    그들의 외로움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역설적이지만 사랑의 ‘관계’ 속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영작의 아버지 창근은 6.25 한국 전쟁 당시 어머니와 누이들을 두고 이북에서 피난 내려왔다. 그는 평생 잃어버린 가족들을 그리워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와 정신이 혼미한 순간에도 그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과거의 가족에 극도로 집착한다. 하지만 그는 정작 지금의 가족들에게 어떤 애착도 느끼지 못하며 가족들 역시 그를 노망난 늙은이로 여길뿐이다. 가족에 매달려 살아온 인간이 외로움 속에서 죽다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영화는 한 장면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상습적인 절도를 일삼는 한 부인을 변호하는 영작에게 판사가 “가정은 어떤가요?”라고 묻자 그는 “남편은 회계사인데요.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막상 부인은 그 질문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 대조 속에서 경제생활을 하는 남편이 주축이 된 이상적인 가족 ‘관계’와 그런 관계에 종속된 일원으로 기능하는 가족들은 교차한다. 영화는 기형적인 부계 관계의 집착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도리어 현대 사회의 남성일 수 있음을 우편배달부를 통해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우편배달부는 경제력이 떨어져 가족 관계에서 역할을 잃은 가장이다. 결국 가족에게서 소외받은 그는 여전히 관계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처남인 주니어 웰터급 5위 광국이를 아냐고 묻는다. 당연하게도 “챔피언도 모르는데 어떻게 아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주니어 웰터급 5위라는 어정쩡한 위치만큼 애매한 관계인 처남을 계속해서 되뇐다. 교통사고의 가해자인 영작의 거짓말에 분노한 그가 영작과 호정의 아들 수인을 죽이며 “니들이 광국이를 알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부계 중심의 가족관에서 소외받는 남자의 아이러니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장면을 전환해보자. 당연하게도 가족 놀이에 지치기는 호정 역시 마찬가지다.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결혼을 하면 더 많이 섹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호정의 기대는 결혼 생활 속에서 좌절되고 아내라는 역할에 매몰되어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취급을 받는 사실이 실망스럽기만 하다. 이때 호정은 그녀를 몰래 훔쳐보던 옆집 고등학생 지운의 시선에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그녀는 얼마 동안 연애나 하자는 지운의 당돌한 요청에 응한다. 섹스를 하기 위해서 갖은 수를 쓰는 지운을 귀엽게 여기면서도 호정은 그를 애타게 만들며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호정은 어떤 관계에서도 벗어난 지운과의 일탈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정작 지운과의 섹스는 영화의 말미가 되어서야 일어난다. 그것이 수인이 죽고 난 이후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수인은 전통적인 가족관에서 벗어난 아이이다. 입양아인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인은 왜 자기한테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호정은 대답한다.

   

“그게 진짜니까. 너한테만 비밀로 하는 건 좀 불공평하잖아.”
“근데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놀릴 때마다 나는 왜 엄마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

   

    이 대목에서 영화는 무엇이 정말 가족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영화에서 수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종속된 관계를 떠난 하나의 주체로써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가 남인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 내내 혈연과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영화 속 남자들을 대조시킨다. 이 대조를 통해 영화는 애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과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가족이라는 두 세계관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결국 이 두 상반된 가족관을 지탱해주던 수인이 죽음으로써 사실상 관계의 가족상은 파멸을 맞이한다.



누난 연애만 하는 게 좋아

   

    <가족의 탄생>의 선경은 이 딜레마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경에게 가족이란 짐 덩어리다. 사랑을 위해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엄마의 모습에 선경은 치가 떨린다. 그래서 그녀는 어서 빨리 한국에서 벗어나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고 힘쓰지만 엄마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서 갈등한다.



    영화 속에서 선경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거절하면서도 집착하고 있다. 그녀가 배다른 동생 경석에게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것과 똑같은 시계를 빼앗으려는 장면은 실상 그녀야말로 전통적인 가족관에 대해 얼마나 애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경석과 엄마의 애인 운식을 보며 엄마에 대해 배신감을 반복적으로 느끼고 이들의 관계에 파국이 올 것이라며 저주한다. 선경은 계속 답답해한다. 엄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선경과 그녀의 전 남자 친구인 준호의 대화는 그녀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너. 왜 그래 나한테?”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나?... 넌 왜 그래 나한테?”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변했다고 공허하게 외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그저 사랑이 식었을 뿐이다. 감독은 애정을 전제로 한 관계에서 애정이 사라진 빈틈을 비추어줌으로써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덧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어떤 관계도 애정 없이는 계속될 수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선경은 엄마에게 묻는다. 아저씨들이 엄마한테 돈을 원해왔냐고. 하지만 엄마는 그들이 자기에게 원한 것은 사랑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그녀를 선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석의 체육대회에서 경석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발견한 선경은 엄마를 부정하고자 운식의 집으로 향한다. 선경은 운식의 가족들 앞에서 엄마를 사랑하냐고 물으며 운식이 비겁해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운식은 “사랑한다. 진심으로.”라며 선경을 절망으로 빠뜨린다.


    결국 선경의 엄마는 죽는다. 드디어 선경은 엄마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 선경은 엄마가 갑작스럽게 집에 들어와 놓고 갔던 가방 속에 가득한 선경의 사진과 기록들을 통해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패티김의 노래 ‘이별’은 선경에게 엄마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그들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오직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선경은 관계보다 사랑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엄마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되고 배다른 동생 경석을 거두어 가족처럼 키운다. 그리고 어느덧 큰 경석에게 선경은 “누나는 연애만 하는 게 좋아.”라고 말하며 엄마와 화해하고 이해하게 되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족관의 갈등은 세대를 넘어 경석에게도 남은 모양이다. 경석은 선경에게 말한다.

   

“누나가 이상한 거지. 누나 엄마랑 똑같잖아.”
 “네가 엄마에 대해서 뭘 알아?”
“알아, 구질구질해.”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 거야.”

   

    선경은 엄마와의 갈등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냈지만 그 과정을 겪지 못한 경석에게 엄마는 이전의 선경이 그랬던 것처럼 구질구질한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과연 경석은 엄마와 화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애정을 전제로 해서 가족을 바라보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감독은 이 두 가지 질문을 답하기 위해 경석을 엄마와 똑같은 헤픈 여자 채현과 만나게 한다.



헤어지면 밥도 안 먹니?


    경석은 선경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한다. 경석은 모두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여자 친구 채현이 불만스럽다. 그는 거듭해서 자신과의 관계에 집중해달라고 채현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채현은 넘쳐나는 사랑을 베푸는데 여념이 없다. 결국 잃어버린 아이를 찾느라 선경과의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현에게 경석은 이별을 통보한다.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어. 나 네 옆에 있으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너 꼭 나 아니어도 되잖아.”

   

    경석은 독점적으로 자신만이 채현의 유일한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채현이 경석을 정말 좋아한다면 그녀가 관계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결혼을 하고 가족이라는 관계로 재구성된다면 경석은 덜 외로울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니라 애정이다. 결국 경석도 채현을 떠나지 못한다. 그가 채현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능청스럽게 돌아온 경석에게 채현은 냉담하다. 돈을 안 갚는 채현 선배의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낸 경석에게 채현이 이제 상관없잖아 라고 말하자 경석은 또다시 열을 낸다. 채현은 그런 경석에게 나 헤프잖아 라며 선을 긋는다.



    그래도 경석은 채현을 사랑하기에 그녀를 계속 따라나선다. 채현을 따라 길을 건너던 경석이 사고를 당할 위기를 겪자 채현은 경석을 꽉 안아주고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경석은 채현을 위해 이벤트를 준비한다. 그는 엄마의 흔적이 담긴 시계를 개조해 그 시계가 보물을 가리키고 있으며 채현이 바로 그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우리는 채현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된 경석이 오로지 애정을 중심으로 채현과 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석에게 확인하듯 채현은 묻는다.


헤픈 거.. 나쁜 거야?


    흔히 헤프다는 말은 관계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다. 헤픔은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특권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관계는 경석과 채현의 첫 만남처럼 헤프게 애정을 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 아닌가. 영화는 무엇이 먼저인지를 묻는다.

   

“엄마! 보내줘. 우리 헤어졌어.”
“근데 뭐? 야 헤어지면 뭐 밥도 안 먹니?"

   

    채현은 사실 극 초반에 미라의 집으로 형철이 데려온 무신과 전남편 사이의 아이였다. 채현의 고향 집 앞에서 경석과 마주친 미라는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채현의 말에 헤어지면 밥도 안 먹냐고 응수한다. 그리고 함께 들어선 미라의 집에는 무신이 가족으로 기다리고 있다. 미라와 무신, 채현은 과거의 그 날에서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가족들과 경석이 함께 텔레비전에 나오는 경석의 누나 선경의 노래를 듣게 함으로써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아무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 가족으로 모이는 가장 큰 구심점에는 애정이 존재했다. 영화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계 속에 애정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 있는 곳에 관계가 깃든다는 원초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므로 관계가 끝이 나버렸다고 해도 애정이 있으면 언제든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그렇기에 헤어져도 밥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바람난 가족>에서 관계에 매몰된 가족은 호정의 표현대로 ‘아웃’되었다. 15년 동안이나 섹스를 하지 못하다가 바람이 나서야 비로소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영작의 어머니 병한은 한국을 떠나면서 호정에게 수인을 입양해올 때 미안했다고 이야기한다. 비로소 그녀는 가족이란 관계의 관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편 <가족의 탄생>에서 미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고 불쑥 찾아온 형철을 단호히 내쳐버린다. 형철은 비록 그녀의 가족이지만 껍데기만 가족인 남동생 형철과 아무런 연고는 없는 남이지만 애정을 통해 가족으로 거듭난 무신을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가족은 가족 역시 완전히 남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 비로소 새롭게 탄생할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유지해주는 유일한 구심점은 오직 애정에 있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광국이를 찾으며 울부짖느니. 조금은 헤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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