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Hours
<빌리 엘리어트>가 거친 현실을 거슬러 투쟁하는 소년의 희망을 그려냈다면, 같은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 <디 아워스>는 영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빌리 엘리어트>의 성공에 이어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 <디 아워스>를 토대로 이 영화를 연출한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1923년, 1951년, 2001년을 배경으로 한 세 여자의 하루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도발적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 믿어요. 그대가 준 행복 말로 다 할 수 없고 당신이야말로 내게 정말 소중했으나 나로 인해 무너지는 그대 모습 더 이상 볼 수 없어 나 이렇게 떠나요. 꼭 행복하세요.
버지니아 울프는 실제로 정신질환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 그녀가 자살 직전에 쓴 편지를 인용하여 막을 연 이 영화는 1951년 로스앤젤레스에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임신 중인 주부 로라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한다.”를 읽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2001년의 뉴욕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클라리사는 애인인 샐리에게 “꽃을 사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1923년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나타나듯 이 영화는 <댈러웨이 부인>을 매개로 시공을 달리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시키고 있다.
로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놀랍도록 확신에 찬 여인이 파티를 열려고 하는 날, 그녀는 행복해 보이지만 그건 남들이 만든 모습이었고 진실은 달랐어.”라고 간단히 요약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 울프가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 기법으로 써낸 소설로써 삶에 대한 권태로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셉티머스라는 사람의 자살을 통해 의식이 변화하게 되고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소설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 속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댈러웨이 부인이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1951년, 로라가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으로 옮겨간다. 이윽고 그녀의 친구인 키티가 방문한다. 자궁에 문제가 생긴 키티는 애를 갖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를 위로하던 로라는 키티와 키스하게 되고 무언가 꿈틀대며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전쟁 이후 집안에서의 삶을 강요받은 여성들의 억압과 궤를 같이 한다.
결국 버지니아 울프의 예언과 같이 그녀는 이 작은 사건으로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곧 그녀는 약을 챙겨 아들을 이웃집에 맡긴 후 호텔 방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둘째 아이를 낳은 후 가족에게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장면들 사이에 버지니아 울프가 조카들이 연 새의 장례식에서 새를 골똘히 바라보는 씬은 <댈러웨이 부인>의 서사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했을 때 의미심장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새의 죽음을 되새김질하며 생의 찬란함과 그에 대비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영화 속 버지니아 울프는 전지적으로 소설을 쓰는 주체이나 영화가 보여주는 그녀의 삶 역시도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신병으로 교외 지역에서 유배당하다시피 요양하게 된 그녀는 끊임없이 런던이 상징하는 주체로써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갈망하지만 결국 그녀가 유일하게 온전히 그녀로서 존재하는 공간은 소설 속의 세계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녀에게 일종의 도피처일 뿐, 그녀를 해방시키진 못했다. 그녀가 친언니인 바네사에게 격정적으로 키스하며 “언젠가 지옥 같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짓눌린 감정들이 폭발한다. 비로소 자신의 감정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녀는 소설 속에서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안에서 그 누군가는 셉티머스라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셉티머스의 자살은 무슨 의미를 가졌는가? 소설 속에서 셉티머스는 사실 댈러웨이 부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전쟁 후유증을 앓던 전역군인이었으며 권위적인 의사가 정신병을 이유로 그를 요양소에 가두려 하자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의 처지가 버지니아 울프의 처지와 상당 부분 대비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셉티머스의 운명과 같이 결국 자살한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소설 속에서 셉티머스의 자살을 받아들이는 댈러웨이 부인의 의식 변화로 짐작할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를 모르지만 영혼의 자유를 억압당한다는 점에서 그의 처지에 공감한다. 그래서 자살의 충동에 휘둘리게 되지만 결국 그녀는 셉티머스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세세한 변화를 영화라는 시각적인 매체에서 다루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 속의 ‘댈러웨이 부인’들의 의식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리처드라는 인물을 통해 표현한다.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옛 애인으로 에이즈 투병 중인 작가이다. 클라리사는 그의 병시중을 돕고 있다. 영화 속 그 날, 클라리사는 그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는 파티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한다. 계속 파티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클라리스에게 리처드는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여는 것은 침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순간 로라가 가족을 버리고 떠날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밝혀진다. 과연 그 침묵이 무엇이기에 모두가 외면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침묵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중요한 함의를 남긴다. 그것은 침묵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어서 리처드와 클라리사는 대화한다.
“이 파티 누굴 위한 파티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난 당신을 만족시키려고 살아왔다는 거야.”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냐? 사람들 모두 서로를 위해 살아가잖아 당신은 금방 죽지 않을 거야. “
“당신을 위해 살던가 죽던가 하라는 거야? 그럼 당신 인생은 뭐야? 당신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도피처로 삼고 당신 인생은 뒷전이겠지.”
클라리사는 그의 집을 나오며 가쁜 숨을 내쉰다. 그녀가 정곡을 찔린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침묵이 가져다 줄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로 리처드의 간호 역할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그녀의 영혼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리처드가 말한 것처럼 그 역할은 고독을 맞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 방어적 정념에 가깝다. 그러나 그 답을 그녀가 스스로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리처드는 그녀의 눈앞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장면을 전환하여 로라가 결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과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 속에서 꼭 누군가가 죽어야 하냐는 남편의 물음에 “남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죠.”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교차시킨다. 그러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시인도, 환상도 죽어 사라지죠.”라고 말하는데 정교하게 배열된 이 장면들은 곧 리처드가 누군가에겐 파티가 끝난 후의 침묵과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환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는 리처드와 자신의 자살이 살아나갈 사람들에게 도피처에 머물지 말고 자기 자신의 고독과 직면하라는 외침임을 공공연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고민한다. 침묵을 맞이한 댈러웨이 부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그 답을 로라와 클라리사가 하나의 공간에서 대면하게끔 만듦으로써 대답한다.
리처드가 자살한 그 날, 로라는 클라리사의 집을 방문한다. 로라가 버리고 떠난 아들이 바로 리처드였던 것이다. 리처드를 중심으로 연결된 두 여자의 만남으로 극의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로라는 1951년의 그 날을 클라리사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선택은 숙명이었다고 말한다.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 자신은 파티를 끝마쳐야 했다는 것이다.
죽음 같은 현실보단 삶을 택한 것이에요
대화가 끝나고 클라리사는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파트너인 샐리에게 키스한다. 영화에서는 버지니아와 그의 친언니 바네사, 로라와 키티, 클라리사와 샐리 이렇게 세 번의 키스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앞의 두 키스는 사회가 가로막은 그녀들의 욕망이 폭발하는 것이 격정적으로 그려진 반면 클라리사와 샐리의 키스에서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옅은 미소가 배어 나온다. 마저 다루어지지 않은 댈러웨이 부인의 운명이 이 장면에서 극적으로 암시된다.
앞서 파티를 준비하는 클라리사를 방문한 리처드의 전 애인 루이스는 그녀에게 말했다.
리차드를 떠난 그 날 나는 기차로 유럽을 여행했어. 그런 자유로움을 수년 만에 느꼈지.
영화는 침묵이라는 단어로 은유한 그것의 정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주인공들이 양성애자나 레즈비언 등의 개인적 억압을 가지도록 설정하여 관객이 미루어 짐작할 만한 흔적만 보여줄 뿐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주인공들이 가진 고독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듯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말한 것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가 가진 고독에 대해 직면하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결국 파티를 마치고 침묵을 맞이한 댈러웨이 부인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찬미하게 될까? <댈러웨이 부인>을 탈고한 버지니아 울프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영화는 자그마한 위트로 그 힌트를 제공한다. 영화 속에선 전반에 걸쳐 예정치 않은 시간에 방문객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일찍 도착해서 무례한가요?” 이것이 첫 번째 힌트다. 그리고 여기 클라리사의 대사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새벽녘 잠에서 깼는데 뭔가 될 거 같았어. 그런 느낌 아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이제부터 계속 행복할 거야. 이건 시작이고 더 큰 행복이 올 거야. 다 헛된 기대였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 행복했고 바로 그 순간이 전부였던 거야.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일상의 어떤 날이었다. 생각했던 그때에 행복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우리가 그것을 무례하게 여기거나 그 순간을 거절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생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순간이 영원한 그 시간(the hours)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일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일상의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일상의 행복 또한 찾아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영화가 버지니아 울프의 수많은 하루 중 그녀가 자살하는 날이 아니라 <댈러웨이 부인>을 구상하는 하루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바로 그녀가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워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본인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살했다고 해서 이 영화가 비극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녀의 자살을 은유로 하여 영화 속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우리가 삶과 직면함으로써 주체적인 삶의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예고한다. 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영화는 놀랍도록 정교한 서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한다. 영화가 묻는다.
파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