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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Jul 18. 2016

취급주의: 샤샤샤

나의 살인에 대한 참회록


살인


    한여름, 그 친구의 집 앞을 서성이면서 나는 때아닌 열병에 괴로워했다. 그 친구가 나를 스쳐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때. 나는 밤새 옮겨 적은 수많은 마음들이 멀어져 감을 느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까치발을 들고서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로 그녀의 앞에서 나는 초라했다. 어쩌다 그녀가 내게 미소를 비춰주는 때에는 헐벗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마음 한구석의 서늘함은 떠날 기별조차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결국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 일이 갑작스레 그렇게 되었다. 땅과 하늘이 바뀐 것처럼 좋아했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것 이상으로 불안했던 것 같다. 으레 어리고 약한 영혼들이 그런 것처럼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대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고 허우적댔다. 하지만 나를 가라앉게 만든 것은 해일 같은 파도가 아니었다. 바다라고 덤벼든 곳이 알고 보니 호수였다는 사실. 이 거대한 괴리감이 나를 상실케 하였다.


    사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멋대로 착각한 것은 나 자신이다. 나는 정말로 그녀의 미소가 햇살보다 더 밝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노여운 목소리는 천둥처럼 위엄이 있었고 쓸쓸한 눈빛이라도 내비치는 날에는 온 세상이 주저앉았다.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고 생각할 법하건만 그때의 나는 이것을 낭만으로 이름 붙였다.


    얼마 되지 않아 예정된 일처럼 연애는 끝이 났고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녀라는 관념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허황되기 그지없었음에도 나의 렌즈에 비추어진 그녀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 어떤 사실보다도 그녀가 고작 그런 놈과 사귄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공주님이 한순간에 마구간 소녀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로 결정했다.


    그 날,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죽였다.



발견


    트와이스의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미소녀들의 파티에 불청객처럼 끼어든 나를 비추며 시작한다. 그녀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귀찮아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내가 신비의 렌즈를 들어 그녀들을 비추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의 입맛대로 코스프레한 그녀들은 내게 말한다.



“난 너무 예쁘고 모두가 나를 좋아해. 하지만 아무 하고나 만나진 않을 거야. 내가 무관심하게 굴어도 힘을 내 봐. 날 우아하게 만들어 줄 사람이 너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 렌즈에 의하면, 사실 그녀들이 나에게 무관심하게 굴었던 것은 그래야 내가 그녀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온다면 도리가 없다. 열심히 스트리밍하고 음악 방송에 문자 투표를 할 수밖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저렇게 멋진 애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같은 의미로 뮤직비디오의 말미에 내가 렌즈를 벗어버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마법의 렌즈를 벗었지만 그녀들은 코스프레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녀들은 여전히 세일러문이고 히로코이며 페이이다. 그리고 내가 파티의 주변인이란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 그녀들은 애초에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코스프레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녀들은 나를 내심 좋아하고 있던 소녀가 아니라, 연기를 즐겁게 하고 있을 뿐인 아까 나에게 무관심하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cheer up> 뮤직비디오는 렌즈가 벗겨지는, 즉 판타지가 일시에 사라지는 이 장면을 굳이 삽입함으로써 그 허무함을 보여준다. 나의 현실은 시궁창인데 여전히 밝고 청량한 그녀들의 모습은 은근한 조롱으로 느껴질 법하다. 그런데 조롱이 향하는 대상은 어디인가? 현시창인 나인가? 아니면 기만적인 미소녀들? 이 뮤직비디오는 노골적인 은유를 통해 우리의 손가락을 집중시킨다.



    덕후 안경을 쓰면 트와이스의 시큰둥하고 짜증 섞인 시선은 사실은 ‘나에게 더 다가오라’는 신호일뿐이다. “여자의 No는 Yes”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뮤직비디오는 판타지를 위태롭고 극단적인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2분 55초 지점에서 겁에 질려 움츠리는 나연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그리고 그 장면에 붙는 가사 “지금처럼 조금만 더 다가와”는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미소녀의 힘, 맛있는 파히타, 아이돌로지)


    그렇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마법 렌즈가 문제다. 이 렌즈는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의 눈과 귀를 앗아갔다. 렌즈로 비추어진 세계에서 나는 언젠가의 소년이다. 나는 열심히 소녀를 사랑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을 다 줄 것이다. 그녀가 외면한다고 해도. 외면이 사실은 나의 모험을 위한 준엄한 시험대인 줄 누가 알겠는가. 나는 매일같이 파티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면 내심 나를 바라고 있을 그녀들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모험을 하다 보면 렌즈 밖 소녀들이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균열


    오스카 와일드가 예의 그 시니컬한 목소리로 “각 남성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궁금했다. 왜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 내 사랑의 완결일 수 있을까. 그 물음의 답을 찾을 새도 없이 세상엔 참혹한 소식들이 넘쳐났다.



A.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며 살인을 예고했던 한 남성이 강남역 화장실에서 여성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 살인했다.

B. 일본 아이돌 가수 도미타 마유는 전날 오후 7시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오후 5시쯤 도쿄도 고가네이시의 공연장으로 걸어가던 중 팬으로부터 흉기로 20차례 찔렸다.


    우리는 결단코 이것을 낭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히로인을 너무 사랑하고 갈구해서 죽인다는 서사의 구조는 우리가 때때로 매혹적으로 여기는 낭만과 닮아있다. 이 서사에서 히로인은 주인공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숭배받는 여신이기도, 무서운 팜므파탈이기도 하다. 언제나 주인공은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며 헌신을 다짐한다. 하지만 이 서사는 균열의 지점에 봉착한다.


A. 주인공이 그녀를 얻으려는 시도가 좌절된다.

B. 성녀인 줄 알았던 그녀가 사실은 타락한 창녀였다.


    남성적인 낭만주의의 결말은 모든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녀가 <무기여 잘 있거라>의 캐서린이든 그리스 항아리든, ‘그녀가 완벽해야 한다는 긴장’은 그녀가 반드시 죽어서 남자 주인공의 위대한 연인이라는 지위를 도전받지 않는 상태로 남겨두어야 함을 의미한다.(Germaine Greer, The Female Eunuch, 1970)


    과연 내가 그녀를 평생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한 것과 사랑하는 대상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내 입맛에 맞게 바람을 잔뜩 채워 넣어 허공으로 띄웠을 뿐. 나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잔뜩 그리워만 했다. 그러다 그것이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 어린아이가 실망을 배신으로 착각하듯,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내던지고 만 것이다. 결국 나의 그리움은 나를 위한 한 편의 연극에 불과했다. 나는 이 연극이 완벽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여자 주인공을 보잘것 없는 남자에게 떠나보내는 길보다는 차라리 없애버리는 길을 택했다. 나 역시 사랑하는 것을 죽였다.


    이 무도함에 남성, 여성의 생물적 구별이 중요한가. 그건 아니다. 잘못은 낭만에 있다. 정확히는 낭만이라는 렌즈에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 중요하다. 낭만의 서사에서 남성은 어떻게든 여성의 시선을 받고 있어야만 하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여성은 항상 남성의 시선 속에서 지배당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질문은 왜 항상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 질문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여인을 숭배하고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궁정식 사랑'이 '로맨스'로 이름 붙어있기 때문이다.


    헌신 아래 나는 용서받을 수 있다. 내가 그녀를 죽인 것도. 그녀를 숭배해 온 마음의 깊이를 생각하면 아주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쯤 쓰다 보니 한 가지 불안이 내 온 마음을 흔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누군가 사랑해서 죽이면 어쩌지?



진술서


    나는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 온갖 싸구려들과 가짜들로 뒤덮여 있는 세계가 그녀의 영혼에 생채기를 일으킬 때면 나는 무너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가가 먼지를 털어주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만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마음에 삐뚤게 모나 있는 혹마저 보듬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시간보다 가만히 안아 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손에 땀이 많던 그녀를 위해 자주 그녀의 손을 닦아주었다.


    그 연애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이나 목소리의 톤 같은 중요한 것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 속에서 실제 그녀는 존재할 틈이 별로 없었다. 나는 부재하는 그녀의 존재를 위해 나의 헌신을 제물로 열심히 제사를 지냈다. 그녀가 아닌 나의 여신을 위해서.


    나와 헤어진 후 그녀는 요란한 남자와 만났다. 그 남자는 별로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인 것 같았고 나는 그를 증오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그때의 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그녀는 온전히 빛이 났다. 나의 여신은 아니었지만 멋진 여자였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여신과의 사랑을 위해 그녀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절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The Metastases of Enjoyment, Slavoj Žižek, 1994) 나의 연극은 나의 시선에 지배당하는 그녀에 대한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헌신을 통해 나의 살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이제야 나의 오래된 좌절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그녀를 혐오해서 살인한 게 아니다. 사랑해서도 아니다. 숭배했기 때문에 죽였다. 마법 렌즈 속에서 분명히 페이는 나를 보며 손짓했다. 누군가 알려주었어야 했다. 그 렌즈는 더 이상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라고. 렌즈 밖 세상에서 그녀는 내게 손짓을 한 게 아니라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것이라고. 멋대로 착각해서 제멋대로 그녀를 페이로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이 엉망진창인 물건을 세상에 잔뜩 풀어 두었으면서 내게 말한다. 렌즈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 이 정신병자야!


    그렇게 말하면 억울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다소 어이가 없다.



해방


    나는 이 글이 구호나 선언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누군가를 죽인 그 이유로 잃고 싶지는 않다. 해서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고백을 속죄할 뿐이다. 그런데 나를 망쳐버린 그 마법 렌즈가 새로 포장되어 시중에 버젓이 유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품의 하단에는 작게 <이 제품은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꽃받침을 한 미소녀가 수줍게 '샤샤샤' 라고 외치는데 그 문구는 보일 턱이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끔찍스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우리의 특이하고 짐승 같은 동거 기간에, 결코 남과 다를 바가 없는 롤리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가족과의 삶이 내가 이 고아에게 줄 수 있었던 최선의 삶, 이 근친상간의 패러디 같은 삶보다는 더 나았으리라는 것을 점차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Vladimir Nabokov, Lolita)”

 

    언젠가 샤샤샤를 외치던 미소녀도 렌즈는 사기였고 내가 사실은 당신 시선 속에 있지 않다고, 나같이 멋진 여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백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이들은 손수 입으로 분 풍선이 바람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울고 말겠지. 하지만 괜찮다. 다른 한쪽 마법 렌즈 판매대에서 피에로 아저씨가 더 팽팽하고 예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이 피에로에게로 옮겨가고 난 뒤. 바닥에 뒤집힌 풍선은 비로소 자기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통으로 가는 삶일지라도 공중 위에 목이 매달려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 나을 테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조금 더 굵은 펜으로 팔리지 않은 마법 렌즈에 <취급주의>라는 문구를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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