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퀼티 Jan 31. 2021

두 번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1. 한 번 뿐인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쓰고 그녀는 두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을 A와 B라고 불러보자. A는 그녀를 떠나간 옛 사람, B는 그녀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B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 A에게 연락이 왔다. 뉴델리 공항에서 문자를 받고 그녀는 유심칩을 사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며칠간 혼자가 된 그녀는 운명을 떠올렸다. 누가 더 연민에 가까운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A와 B의 슬픈 눈빛이 차례로 차창에 비춰졌다. 이게 왠 조화란 말인가.


2. B는 과거 그녀에게 두 번의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그때 덩그러니 놓인 그의 면도기를 한참을 바라봤다. 그가 남긴 흔적. 공간은 사유의 거대한 둥지가 아닐까 하고 혼자 남은 방에서 쓸쓸해하면서도 내심 그녀는 헤어짐이 사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B를 꽤 오랜 시간 A의 대체물로 여기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B에게는 비극적이게도, 그녀는 B를 통해 A를 더욱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서글펐으면서도 한편으로는 B가 A를 닮아가는 것을 보며 사뭇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그녀가 B에게 가장 자주했던 말은 너가 나로 인해 물들지 않길 바래 였다는 것이다. B는 그때마다 나는 너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그녀는 무겁게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3. 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 B는 그녀에게 세 번째 이별을 말했다. 너처럼 단단하지 못해 미안해. 그녀는 답했다. 아냐 내가 미안해. 부디 다가올 겨울이 너에게 많이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으로 돌아와 그녀는 힘껏 울면서도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 뱉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B에게 한 말은 A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B를 위한 애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엉엉 울며 베개를 두어번 치고 그녀는 핸드폰을 켰다. 이번주 중 언제가 좋을까. 이틀전 A에게 보낸 메시지 옆 1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가엾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4. A를 만나기 전날 그녀는 친구에게 직관을 믿는다고 말했다. 직관. 그녀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녀는 스스로도 놀래하며 표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A는 말이야. 플라톤의 <향연>을 떠올리게 해. 태초의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였는데 신이 남과 여로 갈라놓았고,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기위해 영원히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야. 그럼 A가 그 반쪽이라는 말이야? 친구가 웃었다. 아니. 그 반쪽을 찾아 끝없는 지복을 누리다가도 A가 어깨를 떨고 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지상으로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야. 어, 어느 소설에서 그 구절 본 것 같다. 그러니?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집안 캐리어 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올려져 있었다. 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5. 그녀는 초조한 듯 손톱을 매만졌다. 사실 그녀는 A를 보자마자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A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토록 사랑하는 그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안간다는 점이었다. 직관. 그 단어가 하늘에 떠오르더니 비참하게 추락했다. 이 감정의 정체를 너무 골똘히 생각하느라 그녀는 A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헤어질 때를 맞이했다. 바람이 지나치게 차구나. 감기 조심해. 안녕. 그녀는 돌아서려는 A의 코트 자락을 잡았다. 너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껴. 영원히 그럴거야. 평생 동안. 그녀는 엠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영원한 이별을 조용히 확신하며 집으로 되돌아섰다.


6. 그렇다면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B와의 새로운 시작? A의 새로운 대체재 C? 글쎄.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이제 직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A와 헤어지고 돌아와 그녀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때 그녀는 꿈을 꿨다. 그녀가 모르는 사람들 속에 A가 둘러싸여 있는 꿈. A는 연신 미안해하며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꼭 보자고 말했다. 애달픈 그의 표정. 그녀가 상냥한 음성으로 말한다. 내가 어떻게 감히 널 거절할 수 있겠어. 그리고서는 사람들을 헤쳐 테라스로 나아간다. 커다란 달. 그녀는 운명을 생각한다. 누가 이렇게 심술궃게 조화를 부리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리.


7. 어느새 해는 뜨고 그제서야 테라스에 도착한 A는 서쪽으로 힘차게 날개짓하는 흰 새를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단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