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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퀼티 Feb 24. 2022

생존유감

1. 원래 생각한 제목은 '재활'이었다. 글은 항상 썼다. 다만 그것이 내 것이 아니었을뿐. 내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지 않은 것에 대해 큰 감상은 없다. 공식적인 언어를 빌리자면 그야말로 '유감'일 따름이다. 누군가 내가 쓰는 말이 나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고 적었다. 그동안 나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한물간 사람의 먼지 덮인 자서전 서문처럼, 나도 부조리하게 지난 삶을 반추해본다.


2. 문장에 기름기를 뺀다. 그만큼의 진심도 뺀다. 애써 배우려 하지 않아도 쉬운 일이었다. 하고픈걸 하는 것보다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안하는 것을 더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까닭이다. 지저분한 만큼의 진심을 담은 문장을 좋아하지만, 순간일지라도 영원한 진실처럼 여겨지는 몸짓이 있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언제나 되풀이하던 직관 타령은 세월에 휩쓸려가기는커녕 해풍을 맞은 절벽처럼 단단해져만 갔다. 때론 위태롭게.


3. 언어가 단조롭다고 나의 삶이 단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었다. 셈을 해서 어떻느냐 한다면. 잃은 것은 손에 쥔 것이요, 얻은 것은 맡을수도, 만질수도 없는 것들뿐이다. 요컨대 상실감만이 가득하다는 말이다. 내가 부덕한 탓이다. 물론 값싼 겸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의 부족함을 비싸게 팔 도리를 찾지 못했다. 아직까진. 


4. 운명처럼 살지 않겠다. 흔한 그 말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거세한 수많은 소중한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자리잡은 회한과 같은 것들. 뒤돌아보면 우스운 것이다. 영원히 회귀하는 세계에 같은 선택과 번뇌를 반복하는 희극처럼. 문제는 내가 결여됐다고 여기는 부분을 모질게 내치지도 못한다는 것이겠지. 한숨을 지으며 글을 쓰는 나의 뒷 편에는 나의 지리멸렬한 고뇌를 사랑하는 내가 있다. 나는 나로서 충만하고 점차 사그라들어간다.


5. 글을 쓴 지 너무 오래됐다. 그래서 글쓰기 버튼을 누르자 2019년 임시저장한 글이 나타났다. 제목은 '생존유감'. 지금 나의 생존이 유감스럽냐고 질문하는듯 했다. 누가 이런 시시한 농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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