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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2. 2022

테무 니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으로 어둠을 밝히랴

테무 니키(Teemu Nikki),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The Blind Man Who Did Not Want to See Titanic) - 사랑으로 어둠을 밝히랴  

“그들은 자신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 저기 앞에 있는 것도, 저 아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형체가 없는, 설명할 길 없는, 잡을 수 없는, 처벌할 수 없는, 심술궂게 불가사의한 어떤 위협으로 저 위 어딘가에 있기에 더더욱 혼란스럽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밀란 쿤데라-

1952년 파리 태생의 장 도미니크 보비는 세계적인 패션 잡지인 『엘르』의 편집장을 역임한 명망 있는 저널리스트였다. 하지만 1995년 그는 뇌졸중 발작으로 쓰러져 전신이 마비되었다. 그는 오직 눈만 깜빡거릴 수 있었는데, '깜빡임'을 언어로 활용하여 『잠수종과 나비』라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1997년에 그는 사망하였으나 그의 유산인 저서는 남았고, 이는 미국의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안 슈나벨에 의해 영화화된다. 슈나벨은 그의 시점과 의식을 스크린에 옮겨오며,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던 그의 감각을 오롯이 구현한다.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기에 광각렌즈의 불투명하고도 흐릿한 미장센을 그의 시야에 대응한다. 또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프레임 바깥으로 줄곧 빠져 나가는 피사체를 따라가지 못하는 연출로 그의 마비된 육체를 반영한다. 더불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타인의 얼굴은 언제나 그를 배려하여 깊숙이 다가오던 친교 방식을 가시화한다. 한때 타인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던 보비, 오히려 그가 아버지를 보필하던 보비, 하지만 갑작스런 사고 이후 절망적인 부동을 경험하자 비로소 그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버지가 겪었을 어제·오늘·내일이 똑같이 반복되는 무기력한 시간, 더는 현재에 참여할 수 없는 보비 또한 반복되는 과거로 깊이 침잠한다. 영화는 아카이빙 푸티지, 플래시백, 보비의 상상을 활용하여, 과거를 회고해서라도 무기력한 현재를 극복하려는 보비의 의식을 구현한다. 이렇게 본 작품은 일반적이지 않은, 이질적인 타자의 감각을 스크린에 구현하여 나와 다른 누군가의 몸과 감각, 의식을 여실히 이해하는 ‘배리어프리’를 성취한다. 이러한 작품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선입견을 타파하고 의식을 확장한다. 이렇게 타자의 감각을 구현한 <잠수종과 나비>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본 글에서 다룰 테무 니키의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인의 감각과 삶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구현하여, 관객에게 간접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1975년 Sysmä 태생의 테무 니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수한 광고영상, 뮤직비디오, 장르 영화를 연출하며, 다소 작가적이라 할 수 있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와 상반되는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에서도 한 인간의 표상, 관점을 구현하는 본 작품의 작가적 색채는 분명 이어지고 있었다. 2015년 작품 <러브밀라>는 동시대 내지는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멜로, SF 코미디 영화다. 본 작품의 도입부는 연극적인 롱테이크가 사용되어 현실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비교적 일치시키나, 이후에는 현실과 전혀 무관한 존재들이 등장하며 리얼리즘에서 멀어진다. 서로 상충하는 연출 경향, 하지만 후자를 감독이나 다른 누군가의 주관적인 시선이라고 보면 마냥 비현실은 아니리라. 실제로도 영화가 강조하는 바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심장', 즉 주관적인 시선과 감정을 잃지 말라는 요지이기 때문이다. 니키는 내가 세계와 타인에게 느끼는 주관적인 정서를 공상적인 이미지로 풀어낸다. 공상적인 이미지의 예로 세상과 타인에게 불만이 많은 부모님은 항상 술을 마시며 현실에서 도피하지만, 이윽고 서로에게 더욱 흉악해지는 '좀비'가 되어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다. 난생처음 부모가 된 커플의 눈에 그들이 낳은 아기는 말을 듣지 않고 낯설어 마치 '악귀'가 씐 것만 같다. 이외에도 타인들은 결코 절충하는 법이 없으며, 보편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눈에 이해되지 않는 용모와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타인들이 '슈퍼히어로'처럼 제 역할을 하며 사회가 제 기능함을 예찬하는, 매우 산만하고 유치하지만 동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주관적이고 공상적인 시선을 앙큼하게 녹여낸 작품이다. 이후 2017년 발표한 <동물 안락사>는 <러브밀라>보단 진지하고 무거운 작품이다. 어둡고 칙칙하며 차가운 미장센 하에, 죽음만이 가득한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세계를 구현한다. 서구가 자연과 동물을 도구화하여 마음대로 그들을 처분하는 불온한 이데올로기가 영화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인간의 잣대로 동물의 삶을 지레짐작하고 명운을 결정한다. 


이를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조장한다. 수의사는 동물을 치료하는 직업의 본령보다도, 자본의 노예가 되어 동물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네오나치 집단에게 동물은 인간의 힘, 남성성을 과시하는 수단, 이에 약자인 동물들은 잔혹하게 착취당한다. 하지만 테무 니키는 본 작품에서도 개성의 존중, 역지사지를 천명한다. 주인공 베이요는 동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주인들의 판단과 다른, 동물의 실제 삶과 생각, 안락사 직전 최후의 진실을 전해준다. 그들이 동물에게 저지른 만행을 몸소 되돌려준다. 베이요의 안락사는 주인들의 의지보다도, 동물의 뜻을 최우선으로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에 있어 베이요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동물들이 겪은 상흔을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베이요의 행위는 주인들의 강압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베이요의 복수의 끝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동물·타인에게 가했던 자신의 폭력은 결국 제 자신이 느끼며 이를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테무 니키는 <동물 안락사>에서 종을 넘어선 이해를 강조한다. 니키는 사도마조히즘 정사 장면을 통해,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 것이 사랑이자 상호관계임을, 상대방의 얘기를 듣지 않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이기적인 욕망임을 구획한다. 내가 투영된 상대방이 아닌, 상대방이 실로 원하는 것을 듣는 태도, 본 작품에서도 이러한 상호이해를 추구한다. 우리가 무책임하게 상상하는 시각장애인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과 시야를 우리가 체험하게 만드는 시각장애인의 삶과 형식을 구현한다. 이는 실제로 다발성경화증을 앓으며 시력을 잃고, 거동이 불편해진 배우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을 캐스팅하며 이뤄진다. 2008년까지 연극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은 2009년 다발성경화증을 진단받은 이후 배우 활동을 포기하였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상반신만 움직일 수 있고, 상반신마저도 운동성이 둔화되어가는 상태다. 진단 이후 5년이 지나자 눈이 완전히 멀어, 그는 야외활동이 제한되었고 집에만 머무를 수 있다. 그렇게 권태로운 생활을 이어가던 페트리는 동문이자 친구였던 본 작품의 감독 테무 니키와 재회하였고, 감독은 친구가 열망한 배우의 꿈을 이뤄주고자 본 작품을 기획한다. 감독은 시각장애인과 다발성경화증을 겪는 환자들의 시선을 여실히 스크린에 구현하며, 그들과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한다.     


일단 본 작품의 도입부터 살펴보자. 고정된 카메라로 페트리가 연기하는 야코의 눈이 클로즈업된다. 우리는 그를 볼 수 있지만, 그는 우리를 볼 수 없으리라. 영화의 카메라가 멈춰있는 것처럼, 그의 눈도 사실상 정지된 상태다. 카메라도 그의 동공도 운동이 부재한다. 이윽고 영화는 부동의 숏과 상반되는 역동적인 숏으로 이어진다. 어둠 속에서 뜀박질하는 발이 리드미컬한 트래킹 숏으로 포착된다. 어둠 속에 놓여있던 발은 서서히 빛으로 향해가나, 이내 곧 또다시 부동의 숏으로 이어진다. 부동의 숏은 바로 현실 속 야코를 포착하는 형식이요, 달리 숏은 야코의 꿈이었다. 9시에 알람이 울리자 야코는 꿈에서 깨어난다. 야코는 극의 전체에 거쳐 항상 다시 뛸 수 있길 바라는 꿈을 꾸며, 도입부는 반복된다. 하지만 언제나 9시면 현실에 참여해야 하기에 깨질 수밖에 없는 꿈, 후반부에선 비로소 완주하였으나 끝끝내 목도하게 되는 것은 휠체어에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꿈을 바라보며 자신의 장애를 줄곧 외면해왔을지 모른다. 다시는 달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달려야만 한다는 강박, 타인의 손길이 필연적이지만 주체적이고 싶은 자신의 처지를 바라왔다. 이렇게 영화는 도입부에서 펼쳐진 능동적인 관념의 차원과 야코가 움직일 수 없는 물질의 차원이 교차 편집되며, 그의 정신과 육체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꿈이 야코의 바람을 보여준다면, 교차하는 야코의 현실은 우리에게 그들의 삶을 체험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에서 체험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추적하는 장이 있다. 가다머가 밝혀낸 ‘체험’이란, 해석의 발판과 구성의 소재를 직접 제공해주어 확정되고 고정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체험을 위해선 감상자가 알아야 할 대상을 수용자의 상상에 맡기지 않고, 창작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 확고하고도 정교한 표현 방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체험 대상과 이를 수용하는 내면을 완전하게 일치시켜야 하는데, 과연 테무 니키는 체험을 위한 연출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일단 영화는 롱테이크가 주를 이룬다. 야코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카메라는 흡사 그가 항상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이자,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림자와도 같다. 영화는 야코의 시간과 감상자가 놓인 현실의 시간을 비교적 일치시키며 리얼리즘을 강화한다.    


이렇게 야코의 그림자가 된 듯한 영화의 카메라는, 그의 시각을 구현하듯 야코의 얼굴을 제외한 공간과 인물을 희뿌옇게 처리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야코의 시각 그 자체라 할 수 있기에, 그의 집에 방문하는 사회복지사나 그가 향하는 기차역, 행인, 시르파 등의 얼굴, 시각성이 제시되지 않는다. 감상자 또한 야코처럼 청각에 의존하는 삶을 경험한다. 그리고 주변의 시각이 희미함에, 감상자의 눈은 모서리나 배경에 놓이지 않고, 유일하게 선명한 야코의 얼굴로 줄곧 회귀한다. 볼 수 있는 우리의 눈은 외부의 객관적인 시각을 흡수하며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볼 수 없는 야코에게 배경은 동공에 흡수되지 않는다. 확신할 수 없어서 줄곧 이것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의심하는 자신의 뇌리, 즉 얼굴로 되돌아와야 한다. 항상 선명한 얼굴로 되돌아와 희미한 배경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관객의 눈은 야코의 삶을 체험한다. 외에도 영화는 많은 부분 시각장애인의 감각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크레딧은 점자가 활용되고, 이를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기계 음성이 줄곧 나레이션으로 울려 퍼진다. 이에 생생한 감각을 마주할 수 없고, 차가운 텍스트로 환원한 음성에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의 청각을 간접 체험하게 해준다. 그들이 시각 대신 의존해야 하는 청각은 영화 전체에 거쳐 풍부하게 강조된다. 또 영화의 감각은 매우 느리다. 야코가 일어나서 휠체어에 앉고, 식빵을 굽거나 커피를 내리는 행위 등은 우리의 평균속도에 비한다면 느릴 수밖에 없다. 감독은 그것을 롱테이크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굳이 일반적인 감각에 맞춰 빠르게 자르거나 분절하지 않는다. 영화의 느린 감각, 이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타자들의 감각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해준다. 감독은 전작 <동물 안락사>에서는 소재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면, 본 작품에서는 왜곡되지 않은 생생한 감각을 구현한 형식으로 타자를 체험하는 장을 형성한다.    


왜곡되지 않은 타자의 생생한 진실을 체험해야하는 이유가 영화에서 제시된다. 일단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삶이 배역 야코에게 직접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야코 또한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다발성경화증을 앓았으며, 그전에는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시력이 상실되자 영화 보기를 멈추었다. 그의 시각은 과거에 본 경험과 영화에만 머물러있다. 그래서 야코는 줄곧 자신의 뇌리에 남아있는 과거의 이미지를 볼 수 없는 현재에 투영한다. 사회복지사에게는 영화에 등장한 여러 간호사 캐릭터를 말하고, 기차 안에서 티셔츠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이며, 야코의 부재한 시각에 영화가 채워내는 것도 시각성에 어울리는 배경 음악, 즉 예술이다. 이렇게 야코의 삶에서 확인할 수 없는 영역, 텅 비어 있는 부분을 예술이 대신 매개하고 자리를 채운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언제나 현실에 충실한, 현실의 부재를 채울 수 있는 영화를 연출한다. <동물 안락사>에서는 인간 중심적 태도로 규정되지 않은 동물의 삶을, 본 작품에서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시선으로 왜곡되지 않은 시각장애인의 삶을 말이다. 본 작품이 곧 우리가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 공백을 대신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상세하게 채우고자 우리는 체험해야 한다. 과거에 맛보았던 예술이 그의 현재를 채우고, 줄곧 과거에 달릴 수 있던 날들을 꿈꾸는 현재의 야코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줄곧 헤맨다. 이렇게 시간을 헤매는 야코의 삶을 논의하기 위해, 몸의 현상학자라고 불리는 철학자 메를로-퐁티의 ‘환각지’ 개념을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메를로-퐁티는 손이나 발이 절단된 환자의 예시를 들며, 그들은 손이나 발이 절단된 이후에도 마치 다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환각지를 느끼는 경향이 매우 빈번하다고 밝힌다. 심지어 그 부분에서 통증까지 느낀다고 한다. 환자들이 이러한 증상을 겪는 이유는 그들이 세계에 참여했던 방식이 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발로 땅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세계에 참여해왔고 그것이 옳았기 때문에, 손과 발이 절단된 이후에도 세계에 참여하고자 이전의 몸이 자각했던 상태에 머물러있다. 이윽고 손과 발이 절단된 상황에서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세계에 참여하는 현재의 방식을 만들어간다.      


즉 환자들은 환각지를 겪으며 과거의 세계에 머무르려 하지만, 이윽고 환각지에서 빠져나와 현재와 세계의 관계를 정립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야코는 현재의 세계에 일부 적응했으면서도, 아직 과거의 세계에 머물러있다. 그는 과거에 자유분방하게 향할 수 있었던 야외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실내에서 현재의 세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현재에 영화 DVD가 잔뜩 보존되어 있다. 야코는 더 이상 영화를 볼 수 없지만, 과거에 시네필이었던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그는 우리의 시선에선 불안해 보이지만, 아주 능수능란하게 커피도 내리고 토스트도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익숙한 과거를 불러오려다 휠체어에서 자빠지고, 또 과거에 수행했으니 현재에도 그럴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시르파를 만나기 위한 계획을 짠다. 하지만 시각중심적인 세계가 현재의 그와 관계 맺길 거부하니, 그는 혼자서 독립적으로 갈 수 있다는 계획을 철회해야하리. 현재의 그는 과거의 자신과 달리 사람들과의 관계가 수동적이고 일방적이다. 그는 베란다에 나가서 합법적으로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인생의 낙이다. 그런데 대마초 냄새를 맡고 옆집에 사는 노인들이 그에 대해 험담을 한다. 마약을 한다는 둥, 술이나 부동액을 마셔서 장애인이 되었다는 등, 몰이해적인 모욕을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과 달리 저항할 수 없다. 과거의 자신은 말하는 사람을 시각으로 확인하여 그에게 항변할 수 있었지만, 청각은 추상적이고 불명확하여 ‘누가’ 자신에게 험담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에 그의 관계는 '전화 통화'로만 제한된다. 누군가와 직접 대면해서 대화한다 한들, 전화 통화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집에 찾아온 사회복지사나 택시기사와의 대화, 역에서 공무원과의 대화 등은 시각이 제시되지 않아 전화 통화와 별다른 차이 없이 그려진다. 시르파에게 가는 계획이 계속 어긋나고 좌초되는 것 또한, 그가 집에 놓여 전화 통화만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에 현재의 그는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세계와 관계를 맺었다. 사회복지사나 행인의 도움 없이는 넘어진 상태에서 혼자 일어설 수 없다. 또 시르파와 화상통화를 하면, 그녀는 그를 볼 수 있지만, 그는 그녀를 볼 수 없다. 이렇게 육체적으로는 수동적이고 타율적이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주체적이다. 시네필인 야코는 존 카펜터에 대한 선호를, 그리고 <타이타닉>을 싫어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그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감상하는, 또 그가 주장하길 카메론이 너무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문법으로 만들었다는 <타이타닉>이 통속적이어서 보기 싫다. 야코는 언제나 '이상함'을 추구한다. 그가 선호하는 B급 영화의 장인이자, 언제나 주류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인 영화 세계를 추구하던 존 카펜터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자신이 싫어하는 <타이타닉>에 올라탄 상태에 다름 아니다. 승객들이 운전하는 선원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 그렇게 타인에게 의존하여 잘못된 목적지로 향할 수도 있는, 그들의 손과 발에 따라 도착과 좌초가 결정되는 야코의 운명이 곧 <타이타닉>과도 같다. 그리고 야코의 일상이 뻔한 헐리우드 문법처럼 쳇바퀴 돌듯 굴러간다. 아버지가 언제 문자를 보낼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산할 수 있고, 꿈도 일상의 루틴도 언제나 반복된다. 그래서 야코는 '모험'을 떠난다. 앞서 언급한 가다머에게 모험이란 일상적 삶을 중단하고, 이에 얽매인 제약과 구속을 떨쳐버리며 불확실한 것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는 시르파를 위해 뻔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일상을 이탈한다. 간접적으로 소통하던 기존 관계로부터,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그가 몸을 내던진 세계는 시각의 세계, 과거의 자신을 불러와야지만 가능한 모험, 이에 그는 과거의 시각을 불러올 수 없어 좌절감, 자기혐오에 빠진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잡배들과 엮이지 않았을 텐데, 과거를 재현할 수 없어 그들에게 농락당한다. 심지어 도움을 주고 싶은 시르파에게 오히려 피해를 주리라는 무력감을 느낀다.      


야코가 시력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세계와 맺은 관계는 선명하고 뚜렷했으리. 하지만 청각이나 후각에 의존해야 하는 현재는 너무나도 추상적이다. 그래서 불명확한 청각은 명확한 시각적 상상을 동원한다. 멀리서 전화로 장거리 연애하는 야코는 언제나 시르파의 손길을 상상한다. 하지만 상상하는 감촉은 그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불현듯 사라져버린다. 상상은, 상상으로 가득 찬 현실은 공허하다. 또 시각이 기의(의미)요, 청각이 기표(의미를 가리키는 것)라면, 양자 모두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기의와 기표의 일치/불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과연 기표가 올바른 기의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야코에게 제시되는 것은 오직 기표, 즉 청각뿐이다. 기의를 확인할 방안이 없으니 이를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한다.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기의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도우미 없이 외출했기에 그저 믿거나 속을 수밖에 없다. 특히 대다수가 볼 수 있기에 시각 위주로 구성된 세계에서, 청각은 굳이 시각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는다. 이렇듯 청각은 시각에 구애받지 않고 추상적인 독립성을 띠기에, 야코는 아무리 청각을 들어도 내가 누구와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두려움은 언제나 불안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불안과 공포를 구별하고, 이에 따라 경악을 논한다. 공포와 불안은 둘 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 이에 대비한다는 점에 있어서 같다. 하지만 불안은 어떤 위험인지 모르는 상태고, 공포는 특정 대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경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험에 빠져드는 상태인데, 그래서 대상을 파악할 수 없는 불안은 주로 경악으로 이어지는 반면, 공포는 잘 대비했다면 경악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두려움은 언제나 그 대상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려운 불안이다. 야코는 자신이 택시에 타고 있는 건지, 역에 온 것은 맞는지,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건지, 그 모든 것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위험인지도 모르는 채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를 지속한다. 그는 암이 심각해진 시르파의 불안을 해소해주고자 여정을 나섰지만, 그의 불안 또한 되레 고조되어만 간다.      


납치범들이 야코에게 닥쳐오며 전혀 예상치 못한 경악이 발생하고, 여전히 그가 놓인 장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초상과 신원, 심리는 모두 오리무중에 빠져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에게 세상을 조금이나마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스마트폰까지 빼앗김에, 세상은 더욱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 추상화되고, 그는 모든 것에 불안을 느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태연해지고, 불안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장면이 있다. 바로 협박하는 조폭에게 차라리 나를 깔끔하게 죽이라는 장면에서 그는 불안해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목을 내어준다. 그의 곁에 '죽음'이란 특정 대상은 언제나 산재해있던 것일까. 그래서 야코는 죽음이 구체화되자 오히려 이전보다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죽음은 대비 가능한 공포다. 시각장애인의 비극이 바로 이것이다. 시각이 존재하는 사람에게 대비하지 못할 불안은 죽음이요, 타인과 공간은 대비할 수 있는 특정 대상으로서 공포다. 하지만 그것이 뒤바뀌어 언제나 죽음을 염두 해야만 하는, 공간과 타자가 불안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은 얼마나 씁쓸한가. 더욱이 감독은 <동물 안락사>와 <님비: 우리 집에 오지 마>에서처럼 약자와 동물들을 착취하는 네오나치로 추정되는 과격분자를 본 작품에서도 연이어 등장시킨다. 장애인을 배려하고 이해하기는커녕, 그들이 가진 돈을 착취하여 사회에서 약자를 전면 배제시키는 존재로 말이다. 그들이 만연한 구조에서 야코의 곁엔 죽음이 당연했으리. 하지만 그들 중 스콜피온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대화'를 통해 야코의 삶을 이해하여 그를 죽이지 말라고, 자신이 돈을 갚겠다고 말한다. 또 그를 모르는 행인이라 할지라도 쓰러져 있는 약자를 등한시하지 않고, 언제나 우정과 사랑을 중시하는 인간의 벗 '강아지'의 태도로 그를 일으킨다. 그렇게 우리에게 혐오와 착취가 아니라 사랑이 다시 꽃필 때, 비로소 약자는 목적지에 도착하리라. 영화에서 스웨덴의 혐오 음식, 수르스트뢰밍이 시작과 끝에 언급되는 것도 그렇다. 고약한 냄새를 지닌 음식, 마냥 우리에게 불쾌한 음식, 하지만 스웨덴과 바이킹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수르스트뢰밍의 불쾌한 악취를 참을 순 없더라도 이해할 순 있으리.      


이렇게 이해를 가능케 하는 사랑이 야코의 좌절을 막고 어둠 속에 빛을 밝혔으니, 야코를 사랑하는 시르파 또한 연인의 도착으로 불안하던 자신의 삶에 희망의 빛이 도래하리니. 결핍 가득한 서로간의 의존과 부대낌, 어루만짐에 우리의 삶은 풍요롭게 피어난다. 사랑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해소한다. 이렇게 감독은 다발성경화증으로 꿈이 좌절된 친구 페트리 포이콜라이넨의 바람을 실현하고, 또 그의 삶과 감각을 여실히 스크린에 옮겨온 신작을 선보인다. 예술은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 부재한 우리의 의식을 현실 대신 채울 수 있다. 현재 야코가 부재하는 시각을 기억하는 영화로 대신 채우듯 말이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이나 다발성경화증을 앓는 환자를 다루는 영화라면 그들에게 충실해야만 한다. 충실하고 직접적이고자 하는 본 작품은 체험적이다. 앞서 언급한 가다머와 더불어, 역사학자 딜타이는 체험을 정신적 생동성으로 옮기는 작업으로서, 체험하게 되면 더 이상 덧없이 흘러가지 않고 의식, 삶과 통합된다고 말한다. 본 작품의 체험은 지금껏 유리되어 있던 시각장애인들과 감상자를 통합해주며, 더 이상 서로 평행을 달리지 않고 융합하여 공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체험의 영화에서 야코는 환각지를 겪는다. 과거를 그리워함과 더불어, 자신의 육체는 뒤바뀌었는데 현재의 세계는 그들에 맞춰 뒤바뀌지 않았다. 시각의 세계가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감독은 진단한다. 특히나 전작에서부터 줄곧 등장하는 네오나치들이 피어오르는 세계는 보편을 더더욱 갈망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를 도구화하고 착취하는 혐오의 시대를 극복해야 하리. 다시금 사랑이 피어날 때 비로소 이들도 환각지에서 깨어나 현재의 육체로 현재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으리. 사랑, 그것이 장애물을 넘어서 모두의 삶에 빛이자 목적지 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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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31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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