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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7. 2022

파블로 라라인, <스펜서>

이미지와 실존

파블로 라라인(Pablo Larrain), <스펜서>(Spencer) - 이미지와 실존 

“절망이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하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절망이란, 덕을 쌓고 정의롭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며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려는 온갖 진지한 노력의 결과이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있고, 절망의 저편에는 깨달은 자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

다이애나 스펜서, 인간적이고 선했던 대중적 이미지와 실제 삶이 일치하여 정파를 불문하고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은 여인, 한편 그 이미지를 노리는 왕가와 대중매체에 의해 희생된 비극적인 여인, 만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는 행복하지 못했고, 가장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애달픈 여인이 바로 다이애나다. 비극의 시작은 바로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다이애나와 얼굴을 트고 지냈던 찰스 왕세자는 성년이 되자 진지하게 그녀를 신붓감으로 고려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왕족으로서 취할 수 있는 이윤을 면밀히 계산한 결과였다. 찰스 왕세자는 현 부인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에로스의 관점에서 사랑했고, 다이애나는 그저 자신에게 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해주는 아내, 아이들의 헌신적인 어머니, 즉 도구로 사랑했다. 더욱이 왕가는 다이애나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그녀를 향한 저열한 황색언론에 협조한다. 이에 다이애나 개인의 삶은 부재했다. 대중들에게 노출되기 위해서, 왕가에 의해 얼굴과 몸이 전시 당하는 사물로 전락한다. 이혼한 후에야 그녀는 왕족 이미지를 벗어냈다. 왕가의 후광은 훌훌 털어냈지만, 그녀의 선한 정신은 실로 참이었기에 이혼 후에도 대중은 언제나 그녀를 존경했다. 그렇게 제 삶을 되찾아가나 싶었지만 1997년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조차도 다이애나의 '이미지'를 스토킹하는 기자들로 인해 발생했으며, 심지어 기자들이 죽어가는 그녀를 두고 비인간적인 촬영을 계속했기에 응급처치의 적기를 놓친 것이 사망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렇게 왕실과 언론에 의해 끊임없이 이미지가 창조되는 희생양으로 전락했던 여인, 하지만 대중들이 사랑했던 선한 이미지와 실제 그녀의 삶은 실로 진실이었던 다이애나의 일대기를 파블로 라라인이 <스펜서>로 영화화한다. 결혼 전, 그리고 이혼 후의 성인 ‘스펜서’를 제목으로 하는 영화, 왕세자비와 그녀 자신을 양자택일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 다이애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1991년 크리스마스 전후의 3일을 다루는 영화.  

   

이를 연출하는 1976년 산티아고 출신의 파블로 라라인은 동시대 칠레 시네마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칠레에서 활동할 때 그는 '피노체트 3부작'을 연출한 것처럼 매우 사회적인 영화로 유명했다. 그리고 할리우드로 향한 이후에는 주로 이미지와 실재를 넘나드는 <재키>와 같은 전기 영화를 연출하는데, 사실 이는 그의 칠레 영화에서도 예고되어 있었다. 그의 초기작 <포스트 모템>의 시작이 연극 무대에 참여하는 씬인 것처럼, 사람들은 <재키>에서처럼 실재를 알기보단 그것을 꾸며낸 가상에 도취되는 법이다. 또 피노체트 3부작의 시작인 <토니 마네로>에서 한 인물의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을 탐구하며 <재키> 형식의 직접적인 모델이 된다. 피노체트 시기, 시민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독재자적 태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서슴지 않는, 악덕이 보편이 된 군부 치하의 현실을 담아내며 라라인의 정치적인 초기 스타일이 엿보인다. 이와 동시에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가 연기한 ‘토니 마네로’라는 허상과 이미지를 위해 현실을 과격하게 희생·왜곡하고, 심지어 강도, 살인, 절도도 서슴지 않는, 보이는 것 너머의 전기 영화를 연출하였다. 라라인은 우리에게 노출되어 보이는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실재를 깜빡거리는 조명, 감독 특유의 흐릿하고 불투명한 미장센, 추의 적나라한 묘사로 선보였다. 이러한 <토니 마네로>와 그의 근작 <네루다>는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다. <토니 마네로>가 가장 솔직해야 마땅한 예술인 춤이 거짓이자 환락으로 전락하는 현실과의 경계를 드러낸 작품이라면, <네루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실제 삶과 그의 문학 사이의 탈경계성이 대두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실제 네루다를 추적하는 형사 오스카, 영화는 현실에서 시작하지만, 이윽고 네루다의 시를 읽으며 영화는 현실과 상상의 차원을 오간다. 네루다는 자신의 현실을 문학으로 승화하며, 이에 따라 현실 속 자신과 주변 인물, 사회는 시가 된다. 이렇게 네루다의 문학에 빠져든 오스카는 현실 속 자신과 문학 속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이윽고 그 자신도 오롯이 문학으로 승화된다. <토니 마네로>가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포착했다면, <네루다>는 그것의 일치를 포착하며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그의 ‘이미지’라 할 수 있는 문학 자체에서 찾으려 한 작품이다.     


칠레 시기의 <노>도 <토니 마네로>와 마찬가지로 피노체트 치하에서의 선전과 그 이면을 비춘 영화다. <노>는 현실을 비추는 방식인 다큐멘터리를 모방하는, 형식상으로 모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다. 라라인은 현실에 도래할 수 없는 허황한 약속, 허구적인 아름다움을 선전으로 규정한다. 피노체트에 대적하는 집단이라 한들 칠레에서 보편적이지 않은 '바게트'를 영상에 넣거나, 마냥 '예쁜 것'만을 약속하면 피노체트와 별 다를 바 없음을 역설한다. 중요한 것은 피노체트 치하의 현실 그 자체를 비추고, 민주주의 이식 이후 가능한 '표현의 자유'를 약속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선전에 물들지 않은, 진실한 예술의 복권임을 천명한다. 또 선전의 이면을 비추는 거친 구도와 클로즈업, 즉흥적인 줌인, 우발적인 회전은 아름다운 영상이 아니라, 현실의 시종이 되어 이에 봉사한다. 이를 통해 현실을 왜곡하는 피노체트에 대항하는 양식은 매체와 현실, 그들이 약속한 도래할 미래가 서로 유사해야함을 강조한다. 또 거짓조차 진실이라 '팩트체크'하는 군부를 비추며, 과연 가상을 전면 믿을 수 있는 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결국 우리가 영원히 ‘의심’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는 헐리우드로 넘어가 연출한 <재키>에서도 마찬가지다. 라라인은 나탈리 포트만과 협업하여, 재클린 케네디의 푸티지를 영상으로 재현하고, 또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재클린의 인터뷰와 진술을 참고하여 상상한 이면을 오간다. 하지만 라라인이 만들어낸 이면을 마냥 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존 F. 케네디 사후 재키는 위험을 무릎 쓰고 장례식에 참석하여 카메라에 노출된다. 그녀는 분명 슬퍼하듯 보이지만, 카메라 앞에 서서 이를 의식하는 그녀의 감정은 온당 참일까. 우리는 과연 그녀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재키가 몸소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와 그녀의 실재라 여겨지는 바를 줄곧 오가는 영화, 하지만 그 경계에 갇힌 우리가 과연 재키의 진실을 확신할 수 있을까? 그래서 라라인의 영화는 불명확하고 오묘하며 신비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다수 작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가상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오묘한 경계를 비추며, 진실이 폭로되려다가 다시금 거짓으로 회귀하기도 하기에, 양자 중 어느 확실한 경계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진실과 거짓 사이를 오가기 위해 선택한 16mm 필름과 35mm 렌즈를 결합한 아스라하고도 혼종적인 매체, 렌즈 플레어의 적극 사용, 어안 렌즈로 포착된 기묘한 초상과 풍광으로 연출을 탐구와 일치시킨다. 이러한 라라인의 기조가 본 작품 <스펜서>에서도 이어진다. 본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필름과 렌즈를 결합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대체적으로는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다만 몇몇 씬들은 35mm 필름으로 촬영되어, 영화 전체적으로 서로 다른 매체가 뒤섞인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러한 필름의 선택은 아직 디지털이 태동하기 이전인 1991년을 지칭하기에 탁월하다. 더욱이 영화는 대중들이 마주하는 꾸며진 다이애나와 이와 상반된 실제 왕가 생활을 유비 하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왕가가 손아귀를 뻗쳐 재창조하고자 하는 이미지, 대중들이 바라는 그녀의 이미지를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온유하고도 풍부한 색감을 뿜어내는 필름으로 담아낸 것은 탁월하다. 이러한 색채와 더불어, 너무나 쨍하고 선명한 디지털이 현실과 흡사하다면, 필름은 '매체'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형식이다. 디지털에 비한다면 다소 뿌옇고, 필름의 물리적 상태가 영사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래서 대중들이 마주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아스라이 가려진 허상임을, 심지어 본 작품이 그녀의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1991년으로부터 약 30년이 지나 그녀의 재현을 시도하는 본 작품 또한 필연적으로 하나의 가상임을, 이를 명시하는 필름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본 작품의 도입부는 고정된 카메라와 평면 구도로 포착된다. 매우 뻣뻣하고 딱딱하여 생기란 조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은 고요하고 정적이며, 생명이고 사물이고 죄다 잠들어있다. 이러한 세계가 서서히 깨어난다. 스멀스멀 카메라에 움직임이 부여되고, 평면 구도는 사선 구도로 뒤바뀌며 역동성이 감지된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임은 더디고 지난하다. 영화의 운동을 자아내는 요리사나 군인들, 그들의 움직임이 능동적이지 않고 왕가의 요구에 따른 수동적인 움직임이기에 뻣뻣하고 어색하다.     


이윽고 이러한 움직임이 뒤바뀐다. 아무런 의전도 없이 홀로 운전하는 다이애나를 카메라가 역동적인 트래킹으로 포착한다. 또 어떠한 보필도 없이 혼자 운전함에, 누군가가 받쳐주는 안정적인 스테디캠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격렬한 핸드헬드로 포착된다. 이러한 핸드헬드는 홀로 놓인 그녀의 상황을 가시화함과 더불어, 왕가와 파파라치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신경증적인 불안을 가시화하는데도 탁월한 형식이다. 영화는 이러한 움직임을 줄곧 오간다. 움직였다가 다시 붙잡히고, 흔들리다가 다시 멈춰 선다. 외부의 붙잡는 시선과 내면의 자유에서 줄곧 길을 헤매기 때문이다. 이러한 핸드헬드와 결합하는 것은 롱테이크다. 다이애나가 별장에 도착한 이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용되는 롱테이크는 그녀의 삶을 체험하는 리얼리즘임과 더불어, 숨 막히게 그녀를 조여 오는 파파라치와 왕가의 시선을 체험해보는, 실제 그녀를 둘러싼 무수한 시선들을 간접적으로 가시화한 숨 막히는 형식으로도 느껴진다. 외에 영화는 조니 그린우드의 불협화음에 가까운 배경음악과 삐걱거리는 불쾌한 전위음악 등 청각적 요소를 통해서, 그녀의 불안한 심리와 왕가의 질서에 맞물리지 않고 줄곧 어긋나는 그녀의 존재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영화는 대체로 <재키>와 유사하나, 재클린 케네디의 푸티지를 재현하는데 적지 않은 비중을 쏟았던 <재키>와 달리, <스펜서>는 대중에게 노출된 다이애나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는 큰 힘을 쏟지 않는다.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된 상황은 길을 잃은 다이애나가 다이너에서 길을 묻는 장면이나, 또 파파라치나 TV에 노출된 교회 시퀀스 정도에 그친다. 이러한 장면에서 다이애나를 연기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실제 다이애나가 담긴 푸티지들처럼 대체로 나긋나긋한 억양으로 말한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때, 스튜어트는 제 개성대로, 배역이 아닌 배우로서 자신의 특질을 드러낸다. 영국 억양이라는 점에서는 다이애나를 연기하고 있으나, 불안한 얼굴 흔들림, 뒤에서 쫓기는 듯한 재빠른 딕션은 다이애나의 것이 아니라 스튜어트의 것에 가깝다.    

파르미지아니노, <목이 긴 성모>, 1535

이렇게 다이애나를 연기하는 스튜어트와 연기를 덜 하는 스튜어트를 통해 영화는 다이애나의 이미지와 현실을 대비한다. 다이애나의 드러나지 않은 영역은 모사나 재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다이애나의 추상적 영역은 이처럼 '연기를 덜 하거나, 하지 않는 스튜어트'의 방식으로 구현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열려있다. 이렇게 현실과 이미지가 대비되는 과정에서, 이미지를 위해 다이애나의 현실이 작위적으로 왜곡·희생되었고, 촬영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영화의 신비로운 렌즈 플레어와 색채는 서서히 달리 보인다. 처음에 본 형식은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황홀했다. 아름답게 보였지만 서서히 구토하거나 괴로워하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드러나며 역겹고 창백하게, 실제 우리의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듯 느껴진다. 이러한 라라인의 미학은 매너리즘적이라 칭할 법하다. 그가 안일해졌고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매너리즘이 아니라, 전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낀 '매너리즘 양식'으로서 말이다. 매너리즘 양식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완벽하게 성취한 양식으로부터 본인들만의 특유한 아름다움과 개성을 도모하고자, 의도적으로 현실 속 정확한 인체 비율을 인위적으로 길게 늘였고, 현실의 원리에 들어맞지 않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또 장식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느라 인간의 감정을 괄시했다는 평을 받곤 한다. 본 작품도 그렇다. 다이애나에게 입혀지는 드레스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왕가를 위해 완성된 음식들은 너무나도 맛깔나 보이지만, 포착된 그 어느 것도 개인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이애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왕가가 그녀가 입어야 할 옷과 먹어야 할 음식을 시간과 행사에 맞춰 규정한다. 그녀는 흡사 주는 대로 옷을 입어야 하는, 영화 초반부 광야의 ‘허수아비’와도 같다. 다이애나는 아름다움이 그저 껍데기일 뿐이라고 대사로 말하지 않던가.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처럼, 왕가의 이미지도 오직 아름다움이란 껍데기만 있고 자유와 삶은 없다. 삶은 없고 일반 시민들과 유별나게 행동함으로써 발생하는 허울뿐인 미만 있다. 대중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나의 삶과 전혀 무관하게 창조된 아름다움, 이렇게 다이애나의 실제 삶에서 유리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에 라라인의 신비롭고도 병적인 매너리즘적 연출은 아주 탁월하다.     


이러한 연출 속에서 다이애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 길은 그녀가 선택한 길이 아니다. 그녀가 정신없이 보고 있는 지도는 왕가가 요구한 별장의 길이 그려져 있다. 혼자서 직접 운전하기로 한 그녀, 하지만 지도를 따라갈 수 없다. 길을 잃어 다이너에서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그렇게 길을 잃은 곳은 그녀의 옛 고향, 그녀는 익히 잘 아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 가고 싶은 곳, 아는 곳, 하지만 왕세자비로서 ‘의무’가 있는 그녀는 그곳을 몰라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야 하는 곳, 왕가의 의무가 요구되는 별장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양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이윽고 그녀를 뒤따라온 요원들에 의해 겨우 궁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체중을 측정하고,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왕가가 규정한 만큼 증량해야 한다. 그녀는 왕가가 요구한 '지도', '증량'에 맞춰서 만들어진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왕가에 보고한다. 대중에게 노출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자위'를 한다고 선언하는 사적 영역에서조차 그녀에겐 무수한 시선이 뒤따라온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정 규율을 누군가에게 강제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이 감시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 시선에 묶이고, 또 그 시선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특히나 그 시선이 수직적이라면 더더욱 벗어날 수 없다. 다이애나는 파파라치에게 시달린다. 하지만 파파라치를 통제하는 왕가의 시선에도 시달리며, 즉 이중적인 시선에 갑갑해 한다. 다이애나는 자신으로 살 수 없고, 시선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로 산다. 죽은 것이나 다름 아닌 자아, 대신 숨 쉬는 거짓된 자아에 그녀는 힘겨워한다. 자해하고 구토하는 그녀에게 삶과 죽음은 뒤집힌다. 이렇게 감시하는 왕가는 다이애나의 육신에 앤 불린을 소환한다. 헨리 8세의 부인 중 하나였던 앤 불린은 왕과 불같은 연애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혼 이후에는 헨리 8세의 뜻에 부합하지 않고, 또 당대의 복잡한 이혼 절차 때문에 누명이 씌워져 처형당한 비운의 여인이다.      


다이애나도 그렇다. 앤 불린처럼 처형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왕세자와 여왕이 요구하는 질서에 그녀를 맞춰야 한다. 설령 왕세자가 당시에 불륜하던 카밀라에게 그녀와 똑같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더라도, 다이애나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왕가가 그녀에게 부여하는 것은 왕세자비로서의 보편성이다. 왕세자는 다이애나에게 ‘닭은 알을 낳고, 노동자는 왕가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건넨다. 왕세자비의 목적에 충실 하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다. 왕가는 선천적으로 왕족으로 태어난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족으로서 ‘목적’을 따른다. 찰스의 말처럼 ‘목적으로서 나’와 ‘사적인 나’를 나누며 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래서 다이애나에게 그런 삶을 강요한다. 더욱이 그들은 왕가로서 타인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부여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다. 그들은 행사와 여왕을 따라다니는 보더콜리처럼, 꿩 사냥을 함께 나가는 사냥개처럼 그들의 필요에 따라 존재를 개량하는 자들이다. 그레고리 소령이 맹세한 의무에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왕가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맹세와 보편성은 거부할 수 없다. 왕가 아래서 군인과 요리사들은 그들의 목적에 맞춰 질서 정연하게 입·퇴장하고 움직인다. 그들은 언제나 ‘왕가를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을 덧붙인다. 왕가가 부여한 목적 없이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왕가가 만든 지도가 부여된 셈이다. 하지만 다이애나나 윌리엄의 개별적인 특유성이 왕가가 요구하는 보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이애나는 윌리엄이 꿩 사냥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개별성을 잘 안다. 하지만 그 개인성, 주체성을 모두 보편성이 짓밟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포착된 꿩의 주검, 꿩은 바라는 삶이 있었을 테지만 왕가에 의해 오직 '사냥당할 목적'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교회에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카밀라의 얼굴을 마주하여 마음이 뒤숭숭하지만, 무수한 카메라 앞에서 왕세자비로서 침착함과 차분함을 유지하는 얼굴로 전락한다.     


이러한 왕가는 모든 시간을 세분화한다. 시간에 맞춰 옷을 입고 밥을 먹는다. 왕가는 자신들의 공간인 별장을 지배함을 넘어서, 분과 초의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여 노동자들과 다이애나를 이에 가둔다. 영화의 결말까지 그레고리 소령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는 것처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간 속에서 현존재는 비본디적인 시간을 자신화하며, 지금껏 기재해온 시간을 기투하고 그렇게 자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자신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을, 다가오거나 되돌아오거나 현재화하면서 그렇게 시간에 나를 투영하여 '나'로 살아간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럴 수 없다. 앞서 언급한 푸코는 감시 기구가 분할된 공간에 시간조차 구획하여 반복 주기를 설정하고 이를 감시로 강제하여, 신체를 시간에 따른 특정 동작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음을 밝힌다. 다이애나가 속한 시공간은 이렇게 왕가를 위한 존재로 만들어지는, 감시기구요 교도소다. 그래서 영화는 별장의 폐쇄성을 강조한다. 출입구는 매우 좁고, 별장의 모든 공간이 빽빽하게 목적에 따라 지난하게 구획되어 있다. 아주 넓은 공간이지만, 너무나도 갑갑한 별장은 식자재가 목적에 따라 각각 담긴 딱딱한 상자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모든 것이 목적에 따르는 공간, 시간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 국민들보다 하루 일찍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전통, 그녀가 원치 않는 과거란 시간이 빽빽하게 별장을 채우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필름에 의한 영화의 풍부하고도 신묘한 빛깔은 흡사 영국에 잦은 안개처럼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비어있다기보다는 무언가로 가득 차서 숨 막히게 만드는 추상성, 그것이 곧 다이애나가 말하는 왕가의 숨결, 호흡, 소문, 역사에도 해당할 수 있으랴. 왕가의 전통, 그리고 스펜서 가에서 배출한 앤 불린이란 시간이 그녀를 규정하려 한다. 또 다이애나의 시간은 여왕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여왕보다 결코 늦어선 안 되고, 음식에 입을 대는 것도 여왕이 숟가락을 뜬 후에 가능하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늦거나 참석하지 않거나 먹지 않으며 자신의 시간을 되찾는다. 또 공간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며 자신을 회복한다. 다이애나는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길을 잃는다. 음식을 내오는 길목에 세로로 서 있어서 왕가가 집행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존재, 갑자기 조리실에 들이닥치는 존재로 자신을 복권한다.      


별장의 창문은 파파라치들이 그녀의 이미지를 수시 때때로 노리고 있는 공간이다. 이와 동시에 왕가가 바라지 않는 시간에 노출될 수 있는, 즉흥이 가능한 창구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창문에 다가가 봉합된 커튼을 뜯어버린다. 그녀는 파파라치나 대중이 바라는 자신 대신, 자해한 육체를 내놓는다. 그렇게 창문을 바라보는 현미경과 같은 시선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중에게 노출되기 위해 식사를 하지 않고,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야심한 밤에 몰래 음식을 취식한다. 먹어서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욕구에 반하는, 탐미적으로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하는 왕가의 악취미를 거부하고, 그저 먹길 원하는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며 나를 회복한다. 왕가가 체중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서 벗어나 구토를 한다. 미사 때 입을 옷과 식사 때 입을 옷을 바꿔 입는다. 그레고리 소령과 대화할 때 언급한 ‘길들지 않음’, 또 왕궁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광인’으로서 그녀는 자유를 되찾고자 한다. 예외가 없는 공간에서 그녀는 예외로 살길 바란다. 또 아들들과 진실게임을 하며 솔직한 감정표현과 말하기, 자유롭게 시간에 참여하는 법을 가르친다. 다이애나는 선물을 뜯고 싶어 하는 해리에게 마음대로 뜯어도 좋다고 허용한다. 크리스마스라는 외부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말이다. 규칙에서 벗어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실현한다. 왕가의 의무,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실존이다. 실존이 불가능한 다이애나는 고향에 돌아가려다 들킨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도, 그렇다고 타자도 아닌 '헛것'으로 존재한다. 실존은 한때 환각 수준에만 그쳤다. 찰스가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끊는 것, 해고된 매기와 다시 재회하는 것 등 그녀가 바라는 실존은 모두 환각이었다. 그녀의 주관적인 시선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은 달랐다. 거울은 도우미가 매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서히 그녀는 자신이 진정 바라는 환각을 실현한다. 앤 불린이 실현하지 못했던 왕가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철조망과 목걸이를 '끊기', 이로써 자신이 진정 바라는 옛 저택으로 향한다. 물론 그렇게 도착한 과거는 현재와 같지 않다. 플래시백으로 포착된 과거의 모습과 현재에 썩고 무너지는 옛 저택의 계단은 대비를 이룬다.  

   

과거는 다이애나의 접근을 불허한다. 과거의 저택은 그녀가 발을 디디면 디딜수록 무너질 것 같이 불안하다. 발을 디딘다면 왕가에 의해 처형된 앤 불린처럼, 그들의 바람대로 죽게 될 것이랴. 현재가 괴로우니 다이애나는 즐거웠던 유년기를 회고한다. 플래시백에는 희망찬 결혼을 기대한 것은 오직 그녀 자신, 그래서 결혼식에서 '혼자' 달려 나가는 모습이 담긴다. 또 발레를 좋아했던 다이애나는 춤추는 자신을 회고하나, 그 옆에 현재의 자신이 서 있고, 카메라는 이를 360도로 회전하며 비춘다. 끝없이 돌고 돌면서 현재와 과거가 순환한다. 현재의 슬픈 존재는 기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고 다시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에 실현해야만 한다. 과거에 뜀박질했고 발레를 했던 것을, 현재의 다이애나가 실현하며 기쁨을 되찾아야 하리라. 이에 그녀는 서서히 현재에 자신이 바라는 뜀박질을 실현한다. 도입부에서 왕가를 위한 차량 행렬에 차갑게 짓밟히는 꿩의 운명이 아니라 결말, 사격을 중단하고 제 자신이 바라는 목적 없는 실존을 향해 날아간다. 특정한 목적으로 입어야 하는 옷은 마찬가지로 특정한 목적을 가진 허수아비가 입으면 그만이다. 자유로이 실존하는 그녀는 옷을 다채롭게 바꿔 입는다. 그녀를 진정으로 즐겁게 하는 자유분방한 대중음악을 듣는다. 더 이상 왕가의 우아한 클래식으로 자신을 옥죄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좋아하는 대중음악이 왕궁을 휘감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부재로 과시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녀는 대화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길을 잃은 다이애나가 위치를 물으려 다이너에 갔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이애나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다이너의 시민들은 다이애나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다. 대중매체에 송출되는 그녀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왕세자비로서 숭배의 대상, 아우라 있는 인물이기에, 그녀에게 경외심을 느끼는 대중들은 낯설고도 멀리 떨어진 롱숏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그녀는 목적이 있는, 즉자로서 자신을 내려놓고 대화한다. 그레고리 소령이나 요리사에게, 심지어 사냥당해야 하는 꿩과도 대화한다. 대화가 목적이 아닌 존재, 그리고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소통한다.      


이렇게 후반부에 다이애나는 자신이 실로 사랑하는 친구, 매기와 밀착하여 모든 것을 터놓으며 대화한다. 매기와의 관계는 서로가 목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우정과 사랑으로, 그녀들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서로의 시선 하에 심정을 자유로이 터놓는다. 다이애나는 자신이 미래에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솔직한 자신을 노출하고, 그간 그녀에게 찾아볼 수 없었던 웃음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 이러한 웃음과 관련한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현실과 부조화하며 터무니없는 행동을 할 때 웃음이 발생한다는 ‘유머의 부조화 이론’, 다른 하나는 불안, 문제로부터 해방될 때 웃음이 나온다는 ‘해방 이론’이다. 그녀의 웃음은 둘 다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왕가의 질서라는 기존의 범주를 위반함에 발생하는 즐거움이자, 자신의 실존이 해방하는 웃음으로 말이다. 이렇게 웃고, 자유롭게 실존하며, 극단적인 자해가 아닌 즐거운 감각으로 살아있는 나를 느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숏, 다시금 피아노 연주가 엄습해온다. 왕궁에 붙잡힌 정적인 연출은 다이애나가 두 아들을 데리고 별장에서 빠져나올 때 능동적인 움직임으로 바뀌었으나, 결말에서 아들과 다이애나의 삶은 정적인 연출에 다시 붙잡힌다. 이는 잠시 일탈이었던 실제 스펜서의 삶, 다시금 파파라치와 시선, 비극이 엄습해올 그녀의 삶을 명시한다. 이렇게 영화는 효과적인 형식으로 다이애나의 일대기를 집필한다. 특히 병적이고 창백하며, 현실로부터 역겹게 왜곡되었다는 것이 자명한 매너리즘적 연출을 통해, 다이애나의 실존과 왕가와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대비한다. 이는 라라인의 <재키>와 많은 부분 유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더욱 발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키>가 재클린 케네디가 만들어낸 푸티지를 ‘모사’하는 라라인의 연출, 나탈리 포트만의 기교에 공이 있었다면, 본 작품은 모사의 의존도를 낮추고 다이애나 스펜서를 바라보는 라라인과 스튜어트의 개인적인 시각, 상상력, 독창성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기하지 않는 재클린'을 ‘연기하는 나탈리 포트만’이 풀어낸 <재키>보다, '연기하지 않는 다이애나'를 '연기를 덜 하거나 하지 않는 스튜어트'의 과감한 선택에서 흥미로운 부수미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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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317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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