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r 24. 2022

호나스 트루에바, <어거스트 버진>

처음의 결실

호나스 트루에바(Jonas Trueba), <어거스트 버진>(The August Virgin) 

- 처음의 결실     

“여행이란 고달픈 것이지만 저는 여행하지 않고는 아마 살 수 없을 겁니다.” -프란츠 카프카-

① 8월: 본래 한 해를 10개월로 나뉘었던 로마력의 섹스틸리스에 해당하는 월. 아우구스투스 이전 독재관이었던 율리우스는 로마력을 폐지하고 율리우스력으로 개정한다. 이는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그레고리력의 원형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가 태어난 7월을 july로, 자신이 태어난 8월은 august로 개정한다. 그리고 위대한 독재관과 황제의 달을 하루씩 늘리기로 한다. 어거스트의 기원이 이러한 역사에 있기 때문에 8월의 상징은 조롱박, 멜론 등 여름에 만개하는 풍요로운 작물이다. 또 8월에 피는 것으로 유명한 글라디올러스, 제비꽃은 아름다움과 사랑, 결혼, 가족을 상징하며 8월은 인류 본원적인 번성의 힘을 상징·긍정하는 계절이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작물들이 열매를 맺는 계절, 청춘과 성숙의 사이에 놓여 있는 계절 8월, 아우구스투스의 승전을 기념하는 승리의 계절이 곧 8월이다.

② virgin: 본래는 성관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였으나, 현재에는 특정 성별에 국한되지 않고 사용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발견되는 처녀성 및 순결의 요구는 고대의 금욕주의 및 결혼제도와 연관된다. 모계사회에서 특정 시기에 폭발적으로 성교를 나누며 번식하는 난혼제의 경우 여성들의 처녀성은 중요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계로 전환된 이후 결혼제도에서 처녀성 및 순결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당시 여성은 남성이 보유한 화폐로 상대 씨족에게 처녀성은 마땅한 값어치와 결혼을 할 수 있는 자격에 해당한다. 처녀를 유혹하거나 처녀성을 잃게 한, 즉 값어치를 훼손한 남자가 지참금을 지불해야 하는 규율이 성경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문화권에선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막대한 에너지가 수반되는 성의 쾌락을 조절할 필요가 있던 고대에 명예, 순수와 결부된 순결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성을 조절하는 장치로 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헤스티아, 아테나, 아르테미스와 같은 처녀 여신들로 순결을 성스럽게 숭상했고, 기독교에 이르러선 쾌락 없이 오직 순수하게 번식을 위해 임신한 성모 마리아를 예찬하였다.

무언가가 시작된 이후 결실을 보는 8월, 그 계절에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virgin, 이 두 개념을 접목하는 호나스 트루에바의 <어거스틴 버진>은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최근 엠앤엠 필름에서는 기욤 브락에 이어, 호나스 트루에바의 신작까지 수입하며 단출하고 소박한 ‘여행 영화’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여하간 <어거스트 버진>을 연출한 1981년 마드리드 태생의 호나스 트루에바는 스페인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로메르를 연상케 하고, 동 세대 감독으론 기욤 브락, 다미앙 매니블과 유사성이 있다. 그들의 영화처럼 트루에바의 작품도 여행 영화이자, 소박한 일상을 미니멀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로맨틱 엑자일>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현실의 행인들이 통제되지 않는 것은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나 기욤 브락의 <다함께 여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실에 크게 개입하지 않고 허구와 절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한편 그들에 비해서 트루에바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차이점으로 꼽을 수 있으리라. 초기 알모도바르의 영화처럼 트루에바는 공연하는 밴드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곤 한다. 트루에바의 음악은 가시화되지 않는 그들의 감정, 생각을 가사와 추상적인 음률을 빌려 대신 전달한다. 또 현재에 집중하고 롱테이크나 롱숏을 선호하는 앞서 언급한 감독들과 달리, 트루에바는 <재회>에서의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꿈으로 거슬러 내려가기도 하고,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하는 연출을 보이기도 한다. 여행 영화로서 그의 유랑은 기욤 브락의 영화처럼 욕망이 목적지를 결정한다. <로맨틱 엑자일>에서는 현대의 낭만주의자들을 그려낸다. 낭만주의는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질풍노도의 정념을 강조하던 19세기의 시대적 이데올로기, 예술 사조라 할 수 있는데, 감정을 중시하는 여행객들이 그의 영화에서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들은 망명객으로 뒤바뀐다. 세 친구의 낭만이 결정한 세 개의 목적지는 모두 그들의 연인들이 거주하는 프랑스의 동네다. 하지만 중시하는 것은 내 마음이지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다. 내 마음에 정신이 팔려 다른 두 친구로부터 떠돌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음에 그에게 마음을 둔 나는 대상으로부터 추방, 즉 망명자가 되기도 한다.      


항상 목적지에서 추방되고 망명하는 그의 영화는 실존적이다. <재회>도 그렇다. 청소년기에 연인이었지만, 그들이 당시 미래에 기투한 삶과 지금의 삶은 다르다. 남자와 여자는 나라에도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자신에게도 붙잡히지 않는다. 배우고 떠나는 그들은 과거에 정해진 자신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바라본다. 결말에서 현재의 감상자를 향해 눈을 맞추는 주인공처럼 말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트루에바는 언어를 탐구한다. <로맨틱 엑자일>의 시작이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남자가 불어를 구사하는 여자에게 한 단어를 번역하는 것처럼, 자신이 말하고 현실에서 이뤄지고자 하는 언어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의 언어는 모두 현실에서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낭만과 연관된다. 그렇기에 이들의 언어는 언제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아이를 낳은 친구나 지인이 단 한 명도 없음에도, 내 마음이 바라는 자손의 이름 짓기를 대화 소재로 삼는 것처럼, 낭만에 따른 망명은 곧 내가 바라는 언어가 현실에서 부재함에 발생한다. <재회>에서도 그는 언어를 탐구한다. 보다 직접적으로 ‘생각을 전송하고 싶어서 언어를 사용한다.’는 대사를 삽입한다. 그의 영화는 카메라가 비출 수 없는 내면, 심리를 보여주기 위해 대사에 의존하거나, 감정과 가장 밀착한 음악에 깊이 의존하며, 영화가 맡을 수 없는 역할을 보충한다. 트루에바의 낭만, 그리고 여행은 마냥 우발적이고 즉흥적이지 않다. 그것은 <로맨틱 엑자일>에서 이미 알고 있는 연인들처럼, 또 그의 <재회>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이미 알고 있는 정해진 욕망을 거슬러 내려간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과거, 즉 현재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거기서 우연과 타협한다. 트루에바는 언어와 현실, 과거와 현재 등 즉자와 대자, 본질과 실존의 간극을 드러낸다. 한편 이는 그가 영화 속 주인공들로 내세우는 밀레니엄 세대들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본인들의 것이 없고 부모님의 차를 빌리는 존재, 정해진 거주지도 없이 떠돌고 유랑하는 존재.      


그러한 여정이 <어거스트 버진>에서도 이어진다. 이를 형식으로 승화하는 영화의 편집에 일단 주의를 기울이자. 본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15일간의 일대기에서 전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겪었던 사건들이 이후에 온전하게 지속하거나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 만난 사람들과 연속하여 만나지 않는다. 1~2회 정도로 끝이다. 특히 영화의 8월 5일, 주인공 에바는 즉흥적으로 만난 웨일스인 남자와 둘이서 즐거운 밤을 보낸다. 하지만 밤은 거칠게 잘려 나가 이윽고 5일 아침으로, 둘은 하나가 된다. ‘밤’과 ‘둘’은 이어지지 않는다. 설령 재회한다 한들 다른 형태로, 다른 사람들과 껴서 만난다. 에바는 율렌의 어머니로만 국한되었던 4일의 소피아를, 6일에 어머니이자 그녀 자신인 소피아로 새롭게 만난다. 또 에바는 유일하게 올카와 반복하여 만나긴 하지만 4일부터 6일까진 남자들과 소피아가 껴 있다가, 13일에는 마리아가 껴 있고 올카는 연인을 새로 사귄다. 그런 식으로 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이전과 이어지지 않는 파편적이고 느슨한 서사가 특징이다. 언제나 새로운 공간에 뛰어들어서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virgin인 이들의 여행을, 축적해가지만 이어지지 않는 파편적인 전개로 보여준다. 이를 에릭 로메르가 선호했던 '날짜 구성'으로 보여주는 트루에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변화하는 에바를 고요하게 좇아간다. 명확한 서사라는 특정한 목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 실존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조심스레 붙잡는다. 영화는 개개인들의 말에 의존하긴 하지만, 이야기에 의존하진 않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니라, 에바가 겪는 단편들의 연속에 가깝다. 8월 1일부터 15일까지의 일대기, 하지만 모든 날이 똑같은 분량을 갖고 있진 않다. 분량의 차이는 기존의 유한한 나로부터 무한한 나로의 확장, 이를 가능케 하는 타인과의 접촉, 사건에서 발생한다. 기존의 유한한 나는 익히 익숙한 것으로서 기억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 무한한 나로의 확장과 타자와의 만남은 내가 기억하고 축적해야 함을 길이의 차이가 보여준다. 퍼레이드만 펼쳐지는 7일, 과거와 별다를 바 없이 프란체스코와 극장에서 재회하는 8일은 너무나도 짧지만,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새로운 타인인 두 명의 마리아와 만나는 9일, 이로써 기억할만한 사건이 발생하는 10일은 길게 포착된다.     


영화는 이를 움직임이 도드라지지 않는 고정된 카메라로 주로 포착한다. 운동이라 해봤자 패닝 수준에 그치며, 적극적으로 좇아가지 않는다. 카메라는 깊숙하게 개입하기보단, 인물과 현실이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수동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담아낼 뿐이다. 이전 작품들의 몇몇 숏에서 현실 속 행인들이 스쳐 지나가던 것처럼, 본 작품도 현실의 풍경과 사람들 사이에 감독이 깊게 개입하여 곡해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포착'하는 수단으로서 촬영을 지향한다. 이러한 촬영으로 포착되는, 영화의 또 다른 눈여겨볼 만한 형식은 ‘색감’이다. 여름의 뜨거움, 그 와중에 바람과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시원함과 서늘함, 그리고 여름과 맞물린 청춘의 싱그러움을 언어로 변환하기 어려운 시각적 감각으로 풀어내는 것이 황홀하다. 이러한 여름의 빛깔, 8월의 색채와 더불어 에바의 의상에 주목해야 한다. 에바가 입는 의상의 색깔은 주로 붉다. ‘붉음’은 여름의 뜨거움에 상응할 수도 있지만, 그간 서구 미술사에서 ‘물질적인 색채’로 여겨진 빨강의 상징성에 더 주목할법하다. 파랑이 관념, 이상의 색채라면, 빨강은 우리의 몸과 피, 지상, 물질, 현실에 상응하는 색채로 여겨졌다. 본 작품에서 에바의 일대기는 관념이 이끌지 않는다. 관념이 계획한 일정은 불완전하고 즉흥적인 육체에 의해 파기되기 일쑤다. 물질, 공간이 영화 감상 계획을 변경하고, 차크라 의식을 경험하게 해주며, 아고스의 집으로 이사까지 가게 한다. 올카도 자신이 계획한 임신보다는, 5%라는 즉흥적인 몸과 시간의 확률에 따르려고 한다. 또 에바와 소피의 대화에서 친구라는 관념보다, 서로가 멀어짐에 서먹해진 물질적 관계가 강조되듯, 옆에 누가 있고 개인이 어디에 놓였는지에 따라서, 물질이 관념을 규정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있었고, 기억 속엔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물질적으로 그들이 부재함에 ‘고아’가 되었다는 집주인의 말처럼 말이다. 항상 빨간 옷을 즐겨 입는 에바, 이를 통해 트루에바는 몸에서 비롯하는 실존을 탐구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자.      


일단 영화는 청년을 탐구한다. 일단 청년들은 자신들보다 오래된 세계에 쉽게 진입할 수 없다. 오래된 문과 청년 에바는 서로 맞물리지 않아 삐걱거린다. 또 2일에 에바는 창문을 열어 아른거리는 빛을 실내에 들어오게 만들고, 자신의 셔츠를 풀러 빛으로 맨살을 밝히고 드러낸다. 타인이 쓰던 물건과 흔적으로 인해 후덥지근하고 갑갑한 공간에서, 진정한 자신을 밝히고 싶은 청년의 심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6일에 에바는 부모님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오롯이 자신이 된다고,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머무르지 않는다. 에바는 20살 때 함께 살았던 소피아와도 몇 년간 연락하지 않았다. 또 과거에 연인이었던 프란체스코에게 붙잡히기 싫어서 영화 관람을 포기한다. 내지인들 대다수가 휴가를 떠나는 8월의 마드리드에 남는 것도 그렇다. 다른 때 보다 다른 것을 하기 좋은 시간, 휴가임과 동시에 구성원들이 줄어들어서 좀 더 느슨해지는 시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기존으로부터 나를 되찾아볼 수 있는 시간에 ‘진정한 자신’을 탐구한다. 그렇게 나로 살기, 하지만 이들의 내면은 빈곤하다. 에바는 3일에 루이스를 만난다. 그는 현재 프리랜서 기자다. 에바는 그에게 분량을 채우기에 급급해하지 말고, 자신의 요구에 충실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것이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사실 에바도 자신의 원칙과 요구가 모호하지 않았던가. 그저 다른 사람이 집필한 책만 읽으며 무료하고도 따분하게 일상을 보내던 에바는 3일에 외부로 나가, 한 관광객의 뒤를 쫓아다니며 흥미로운 시간을 보낸다. 즉 타인을 통해서 말이다. 타인과 구별되는 나 자신은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스스로가 무얼 해야 할지 그들은 도통 모르겠다. 분명 그들은 원칙을 상정한다. 루이스는 지난날의 사랑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연애와 관계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원칙을 설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치하는가? 그들과 대비되는 것은 아기 율렌이다. 율렌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아기는 제 자신이 두텁다. 이와 달리 얕아 보이는 젊은이들의 원칙은 흡사 사물과도 같다. 영화 초반 그들은 어떤 공간, 어느 시간에도 특정한 원칙과 근거, 목적을 상정하여 산다.    

  

물론 우리의 삶은 근거가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존재자 개념에서, 존재는 하나의 근거가 있는 존재자를 세계에 기투하여 살아간다. 이에 존재는 유일해도 존재자는 여럿이며, 존재자 각각은 시간에 의해 구별된다. 진정한 나 자신은 특정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를 만들어내는 존재여야 하며, 현재에 참여하여 존재자의 근거를 되묻는 현존재여야 한다. 현재에 과거의 특정 존재자임을 고집한다면 공허하고 궁핍하리,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육체가 정신에 요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자신을 찾는 영화의 여정이 이러한 관점을 따른다. 아고스가 에바에게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라는 것처럼 몸의 반응,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루이스는 사람들과 엮이면 자신을 망친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에바가 따라다니던 관광객과 연애를 시작하며, 우울하던 얼굴을 활짝 핀다. 에바는 자신의 모호한 할 일이 아니라, 관광객을 따라다니고 싶은 자신의 눈과 발에 솔직해진다. 또 옛 연인 프란체스카와 재회했음에도, 그와 연인이던 과거의 자신을 불러오지 않고, 일기 쓰는 현재의 자신을 직시한다. 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어제의 몸이 정신에 요구한 원칙은 달라진 시공간에 놓인 오늘과 같지 않으니. 그래서 3일 이후에 에바는 적극적인 몸의 여정을 떠난다. 책을 읽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에바로부터,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에바로 변해간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무한한 타자와의 접촉으로 유한한 나의 인식과 자아를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한한 나의 인식과 자아, 그것은 곧 책만 읽고 집안에만 갇힌 2일의 에바와 같다. 물론 접촉은 에바와 루이스가 말하듯 자신을 망친다. 기존에 갖고 있던 관념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그로써 몸은 즐겁고, 무한한 사람들과 만나며 인식은 확장된다. 또 아무리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일감을 받아야 한다는 루이스처럼, 독립적인 사람도 구속되지 않을 뿐 필연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렇게 접촉하는 무한한 타인은 에바에게 새로운 관점, 용기, 거처를 제공한다. 또 현재에 잊힌 소피를 집이라 여겼던 에바의 감정, 과거에 에바가 가졌던 아이디어를 샘솟게 만든다. 에바 또한 타인에게 그들의 작업 멘트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정보,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회복한 소피, 밴드가 파악하고 싶던 관객의 반응을 제공한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앎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에바가 만나는 타자들은 주로 마드리드에 놓여있다. 떠나지 않는다면 재회할 사람들이지만, 이러한 재회 또한 타인을 ‘알아야’ 가능하다. 올카, 아고스, 밴드를 알게 되니 거리나 술집에서 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러한 앎과 신비로운 경험은 변화에 열려있는 실존적인 몸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실존하고자 하는 영화 속 몸은 '그릇'과 '배우'에 비유된다. 일단 마리아와 만났을 때, 그녀들은 자궁에 무언가를 채우는 그릇으로 여성의 몸을 규정한다. 여성의 몸, 하지만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인간의 몸 또한 그릇이다. 사람과 엮이려 하지 않던 에바, 하지만 관광객을 따라다니며 '마드리드 토박이'가 모르는 공간 구석구석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또 엄마가 된 소피를 만나고, 이후 올카와 임신과 난자 냉동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영화관에서, 평소 같았으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생리 이야기가 흥미롭게 귓가를 맴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릇으로서 채워가고, 그렇게 채운 것과 어울리는 것들을 알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또 에바와 아고스는 배우다. 그래서 이들이 만나는 영화 말미에는 배우론을 설파하는데, 에바는 배우가 현실을 뛰어넘는 사람이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며, 아고스와 따귀를 때리며 기존을 초월하는 연습을 한다. 본 과정에서 아고스는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고 털어놓는다. 그 이후 딸 비올레타를 돌보는 그는 에바가 말한 배우로서, 아버지의 책임에 아쉬움이 있던 기존 현실을 탈피한 모습이다. 이러한 폭력은 곧 '자극'이다. 자극에 의해 우리 몸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배역을 뒤바꿔 입는다.’ 마리아가 에바에게 해주는 차크라 의식도 그렇다. 기존의 몸이 느끼지 못했던 관점을 깨우쳐준다. 이러한 자극은 새로운 공간이 부여하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공간에 놓이는 몸, 공간이 계속 변화함에 따라 몸은 새로운 자극이 더해져 배역을 변화한다. 강에 간 에바, 그녀는 수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친구가 그녀를 물에 빠트리며 새로운 자극이 몸에 가해져, 수영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으로 변한다. 이후 유성우가 내리고 또 콘서트가 열린다. 배우로서 인간은 공간에 따라 몸이 반응하는 요구를 적극 긍정해야 한다. 그렇게 빈곤한 그릇, 배우이길 포기했던 에바는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릇이자 배우로서 충만해진다.     


이렇게 영화는 배우이자 그릇으로 실존하며 전통을 따르지 않는 청년들의 태도를 강조한다. 8월의 마드리드는 축제의 달이다. 무수한 종교 행사와 행진이 거리에 가득하다. 하지만 에바는 여기에 관심이 없다. 거리에서 노인들이 추는 전통춤, 전통의상 출라포에도 관심이 없다. 한때는 흥미로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반복되었을 전통,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들, 그래서 현재의 그들에게는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것들, 그래서 이들은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전통춤을 따라 추지도 않는다. 루이스도 어린 날에 출라포를 입어 봤으니, 성인이 돼서는 시큰둥하다. 그때는 새로워서 의미 있었지만, 지금은 별 의미 없는 것, 행진만 등장하는 7일이 매우 짧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 에바는 아고스에게 구름다리의 전설을 말한다. 한 부유한 가문의 여성은 가족이 반대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이 서 있는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녀는 가까스로 생존하였고, 가족이 그녀의 짝을 선택해주는 전통을 전복하여 주체적인 사랑을 쟁취했다. 이를 얘기하는 그들은 보호 스크린을 넘는다. 기존의 원칙을 위반하여 실존하고 자유를 쟁취한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이기에, 그녀들이 기존 남성적 관점을 탈피하여 자유를 쟁취하는 몸을 강조한다. 이는 본 작품에서 에바를 맡은 주연배우임과 동시에, 각본에 참여한 잇사소 아라나의 영향으로, 남성 감독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의 한계를 넘어선다. 에바와 마리아는 생리를 논한다. 그녀들은 육체의 70%가 물이니만큼, 생리가 조석에 큰 영향을 받으리라 추측한다. 또 남성들은 생리 휴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도 생리한다면 이를 이해할 것이라 말한다. 마리아는 어머니, 할머니들이 여성에게 요구했던, 생리하는 날 조심스럽게 지내야 하는 태도를 뒤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약점을 노출할 필요가 없다는 것, 약점을 드러내지 않게끔 평범하게 지내자는 것이다. 이제는 생리를 숨기거나, 이에 위축되지 않는다. 12일의 에바가 아고스와 만나서 생리를 앞두고 있음을 터놓는 것처럼 말이다. 진취적인 여성들과 만나 고루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에바, 그녀들과 접촉하여 여성의 자유로운 몸을 회복한다.      


또 그녀들은 임신과 난자 냉동에 대해 얘기한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바로 임신이다. 에바는 올카와 냉동 난자와 임신에 대해 얘기하고, 엄마가 되어 여성만이 가능한 몸의 변화를 경험한 소피가 그녀에게 새로운 영향을 끼친다. 물론 영화 속 임신은 언제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에바가 박물관에서 감상하는 네로의 아내 포파이아의 흉상, 그녀는 임신한 상태에서 네로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또 소피는 그녀의 선택이긴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 사회적 왕따가 된 기분이라 말한다. 아이의 친부, 그리고 태어난 아기에 의해 여성들은 기존 자신의 사망을 겪는다. 이러한 존재 박탈, 고정된 존재자를 피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 말미 에바는 성모 마리아처럼 혼자 임신했다고 말한다. 또 어쩌면 그녀는 진짜로 임신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루 만에 배와 가슴에 변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에바는 임신을 통해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성만이 가능한 변화를, 새로운 그녀의 존재자를 낳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한때 텅 빈 그릇이었던 에바, 영화 초반부에 그녀는 무언가를 채우러 버스에 올라타서 ‘떠났다.’ 이후 여러 사람과의 경험·기억을 품은 에바는 이제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봉긋해진 그녀의 배와 가슴, 이는 그녀의 몸이 여행으로 충만하게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랴. 그리고 앞으로도 변할 여지는 다분하다. 인간이란 그릇은 채워짐과 동시에 넓어진다. 그래서 에바는 아고스의 눈, 트루에바의 카메라, 감상자가 그녀를 볼 수 있는 시야에서 떠나간다. 그렇게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고 무한히 자신과 만남을 확장하는 에바는 실존하리. 이렇게 트루에바는 8월에 마드리드에 놓인 처녀의 이야기로 실존을 탐구한다. virgin이란 단어에서 중요한 요소는 '처음'이다. 관계에서의 virgin은 새로운 공간·사람과의 처음, 변화한 상대방과의 처음이라 말할 수 있으랴. 이러한 처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과거에, 기존에 구속받지 않는 실존이 곧 우리의 자유다. 그래서 영화는 새로운 사람들의 '노래'에 이끌린다. 생경한 타자들의 삶과 감정에 접촉하기, 이전 작들과 유사하지만 음악에 의존적이진 않고, 오히려 영화 매체와 균형을 이루었다. 이러한 처음을 채워나가며 우리는 8월에 결실을 보리, 바로 새로운 나 자신을 봉긋하게 품고 간직하게 되리. 그렇게 우리는 무수한 처음으로 새로운 나의 맹아를 맺고 그것이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

감상일: 220324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파블로 라라인, <스펜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