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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31. 2022

페드로 알모도바르, <패러렐 마더스>

X자로 교차하는 순간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 <패러렐 마더스>(Parallel Mothers

- X자로 교차하는 순간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데 일정한 대가를 치른다. 변호사의 자식은 학자로서도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시대, 같은 국가, 같은 지역, 같은 집단에서 살아가고, 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같은 성별을 갖는 어떤 사람은 나와 인생의 많은 부분 닮았으랴.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은 분명 다른 존재다. 그래서 한날한시에 똑같이 태어난다거나, 똑같은 상황에 부닥친다 하더라도, 단지 그것만 같을 뿐 각각의 사람들은 너무나 특유하다. 사람의 선택은 때로는 이성이 좌우하나 때로는 감성이 좌우하고, 때로는 예측 가능하나 때로는 우연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개인과 개인은 똑같은 시작점에서 똑같은 시간에 출발한다더라도, 그들은 각자의 직선을, 평행을 달린다. 한편 우리의 현실에서 완벽한 평행을 달리리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둥근 지구에 사는 우리는 평행을 달리더라도 서로 X자로 맞물려 만날 수밖에 없다. 또 평행을 달리다가 필연적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교류하고 사랑함에 우리는 직선을 포기하고 곡선을 선택한다. 평행과 불가능한 평행,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패러렐 마더스>는 이러한 평행에 관한 두 어머니의 궤적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1949년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 출생의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여성 영화, 에로티즘 영화로 유명한 스페인의 거장이다. 여성과 성을 담아내는 그의 영화는 매우 감각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쨍한 원색을 적극 사용하고, 이성적인 전개보다는 비이성적이고 초현실적인 전개를 따르기에 충동적이다. 자유분방한 형식도 이에 일조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전개와 연출이 자못 다듬어졌으나, <내가 뭘 잘못했기에>까지 그의 연출은 매우 거칠고 키치적이었다. <마타도르>를 기점으로 도발성은 여전하나 비교적 다듬어진 연출을 지향했고, 90년대에 거친 연출과 다듬어진 연출의 경향은 뒤섞여 나타난다. 이후 2000년대에 디지털 시대로 옮겨간 이후의 그는 새로운 매체가 선명하고도 쨍한 색감을 강조한다는 성질에 주목하며, 20세기 키치적인 원색을 활용하던 그의 형식을 더욱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또 최근에는 플랫폼의 다변화로 장편을 고집할 필요가 없게 되자, 틸다 스윈튼과 함께한 단편 영화인 <휴먼 보이스>를 선보였다.     

 

이렇게 시대에 능동적으로 따라가는 감독이긴 하지만, 그와 협업한 스윈튼이 '알모도바르 언어'라고 그의 문법을 고유하게 지칭할 만큼,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알모도바르는 고유한 예술혼은 치열하게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알모도바르 언어 중 하나인 ‘여성영화’부터 살펴보자. 그의 여성영화는 느슨한 유사성으로 이어진다. 그의 뮤즈 중 한 명인 카르멘 마우라가 등장하는 <내가 뭘 잘못했기에>가 약 20여 년 이후 <귀향>으로 이어진다. 또 후술할 본 작품의 '홀어머니' 전통 또한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귀향>, <줄리에타> 등을 거쳐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라이브 플래쉬>, <귀향>에서 ‘홀어머니였고 홀어머니가 된 페넬로페 크루즈’도 본 작품까지 이어진다. 일단 카르멘 마우라가 이어서 등장하는 <내가 뭘 잘못했기에>와 <귀향>은 가부장제를 첨예하게 비판한다. 똑같이 노동하더라도 남성은 휴식 시간이 있고 더 생산적인 노동으로 평가되는 반면, 여성은 밖에서도 집에서도 휴식은 없고, 그녀들의 일은 평가 절하되기 일쑤다. 가장인 남성은 번 돈을 자유롭게 쓰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반면, 여성은 그들이 남긴 찌꺼기, 탄 부분만 먹는다. 문해 남성은 성별에 따라 특권적인 능력으로 문맹 여성을 속이고, 여성의 성은 언제나 자본과 깊이 결탁되고 수동적이나, 남성의 성은 능동적이고 방종하다. 이러한 폭거로부터 여성은 남성을 살해한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에서 남편을 살해한 카르멘 마우라는 이후 <귀향>에서 남편을 살해한 이후 사라졌다가 돌아온 어머니로 등장한다. 이렇게 가부장제를 전복하며 남성들이 사라지거나, <줄리에타>에서처럼 불의의 사고로 여성만 남거나, 후술할 본 작품에서처럼 임신과 출산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여성과 그로부터 유리된 남성에 의해 홀어머니들이 발생한다. 가부장제에 의해 어머니는 자식을 싫어하기도 한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에서 한 이웃은 딸에게 남편이 보인다는 이유로, <마타도르>에서 앙헬의 어머니는 기독교적 관점과 더불어 남편과 닮았다는 명분으로 자식을 증오한다. 하지만 알모도바르는 남편,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대상을 역겹거나 혐오스럽게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다른’ 초능력을 가진,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긍정해야 함을 촉구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도 편견 없이, 트랜스젠더가 된 전남편이라 할지라도 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여성의 포용력을 강조한다. 홀어머니가 된 그녀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끈질긴 존재다. 떠나가고 방종한 남성과 달리 말이다.     


두 번째 알모도바르 언어인 성적인 요소를 짚어보자. <내가 뭘 잘못했기에>에서는 모든 행동과 삶의 저의가 성의 추동임을 밝힌다. 주부가 받는 생활비와 매춘부가 받는 요금은 별 다를 바 없다. 페도필리아인 한 남성은 아이가 좋아서 그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치과의사가 됐으며 입양도 순수하지 못하다. 또 안토니오가 뮐러 부인과 불륜을 하는 이유도 그녀의 부유함이 저변에 깔려있다. 성의 이면에 경제가, 경제의 이면에 성이 있다. 그리고 안토니오가 글로리아에 의해 사망하니, 그만을 바라보던 뮐러 부인도 자살한다. 성은 곧 삶이다. 남근의 상징인 도마뱀이 잠시 동면하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또 도마뱀의 죽음이 곧 욕망, 사랑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욕망은 잠시 잠들 뿐 거세할 수 없다. 죽음과 함께 거세된다. 이러한 삶 그 자체인 욕망을 알모도바르는 투우에 빗댄다. <마타도르>와 <그녀에게>에서 등장한다. 폭력적인 욕망, 남근이 곧 황소, 뿔에 대응하며, 이러한 남성적 욕망에 들이받히는 여성이 황소를 자극하는 ‘빨간 천’에 상응한다. 합법적으로 창을 든 투우사들이 양성되는 학교에서, 알모도바르의 카메라가 강조하는 불룩 튀어나온 남근, 파괴적인 욕망이 함께 교육된다. <마타도르>에서 이를 배운 앙헬은 강간을 시도하고, 반면 <그녀에게>에서 붉은 천을 든 리디아는 그대로 들이받혀 여성의 욕망은 좌절된다. 강간을 가르치는 학교는 <마타도르>의 변호사에 의해 비호되거나, 또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서처럼 부패한 경찰, <내가 뭘 잘못했기에>나 <마타도르>에서의 사건 그 자체보다는 성에 정신이 팔려 있는 무능력한 경찰에 의해 수호된다. 그래서 알모도바르의 세계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 <키카>를 더해서 강간이 만연하게 발생하고, 심지어 절대 보편적이어선 안 될 강간이 보편화되어버리며, 피해자들은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나 <키카>에서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처럼 마초적 욕망, 강간을 낭만화한다. 그래서 처벌은 사법 제도에 의존하기보단, 매우 개인적인 형태를 띤다. 앞서 언급한 여성 영화인 <내가 뭘 잘못했기에>나 <귀향>에서의 사적인 징벌 등으로 말이다.      


그래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성과 결탁한 정치적인 색채를 띠기도 한다. 데뷔작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서부터 프랑코 체제 속 사복경찰들의 초법적 만행을 고발한다. 경찰은 페피의 마약, 여성들의 자유로운 성적 충동을 통제하지만, 정작 남성 자신의 남근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중성, 그들은 강간의 죗값에서 자유로운 뻔뻔함을 말이다. <나쁜 버릇>에서도 수녀원이 가부장제, 파시스트들에게 희생된 여성들과 깊이 결탁되어 있음을 고발한다. 알모도바르는 그들이 억제하는 성과 쾌락이 그들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고 위선을 띤다는 것을 논증하며 성 해방으로 자유를 천명한다. 이렇게 기성의 이데올로기에 당돌한 태도를 띠기에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언제나 도발적인데 본 작품도 이러한 그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나타난다. 어머니, 도발적인 욕망, 성별에 대한 탐구, 프랑코 독재 치하와 관련한 정치적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풀어낸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나 <귀향>을 연상케 하는 어머니들의 드라마,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쁜 교육>에서의 정치적인 드라마, 두 개의 장르 또한 평행을 달린다. 과연 과거와 현재, 정치와 미시적 삶 또한 평행을 달리다 서로 만나게 될 수 있을까? 

일단 본 작품에서 눈에 띄는 연출부터 살펴보자. 가장 먼저 주목할 만한 것은 리버스 숏이다. 영화 속 많은 인물의 대화가 리버스 숏으로 포착된다. 하나의 숏에 함께 놓이지 않고, 서로가 각각의 숏에 놓여 평행을 달리듯이 말이다. 그들은 다른 존재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평행만을 달리지 않는다. 도입부, 야니스와 아르투로는 사진작가와 모델의 관계다. 각자의 목적에 따라 평행을 달린다. 서로는 각각의 숏에서만 포착된다. 이윽고 역사기억법에 대한 공통된 화두를 나누며 평행을 포기하고, 이후 사랑에 빠져 더욱 달라붙는다. 야니스와 아나도 마찬가지다. 병실에서 진통을 겪으며 처음 만난 그들은 리버스 숏으로 나뉘었다. 이윽고 호흡법을 공유하고, 양자 모두 싱글맘임을 밝히자 하나의 숏에 놓여 같이 걷는다. 서로 모녀관계가 아닌 것 같아서 평행을 달리던 야니스-아니타, 아나-세실리아도 모녀사이로서 하나의 숏에서 만난다. 아니타의 곁에는 야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전화기가 함께 놓이고, 서로 분리되었던 세실리아와 아나는 다시 한 몸이 되어간다. 우리는 닫혀있지 않은 채로, 영화의 도입부에서 강조되는 '열린 창문'처럼 개방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하고 교류하고,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이끌리며 X자로 맞물린다. 그렇게 두 직선이 맞물리는 순간은 공통성을 찾았을 때다. 

하지만 각각의 인류는 닮은 요소들이 있지만, 개개의 인생은 무수히 다르다. 그래서 함께 놓였다가도 멀어진다. 똑같이 ‘실수’로 아이를 가졌지만 야니스는 기뻐하는 반면, 아나는 슬퍼한다. 그래서 출산 도중 그녀들은 다시 리버스 숏으로 나뉜다. 이후 세실리아를 두고 하나로 모인 야니스와 아르투로, 하지만 그녀를 친딸이라 생각하는 야니스와 달리, 친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아르투로는 서서히 멀어져가 두 개의 숏으로, 프레임 바깥으로 분리된다. 그렇게 멀어지다가 우리는 대화하며 다시 만나게 되리. 이러한 리버스숏과 하나의 숏에 함께 모이는 만남, 그것은 영화의 페이드아웃에도 상응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는 연극의 암막 커튼이 내려오는 듯한, 아주 부드럽게 어둠이 내리 앉는 페이드아웃을 사용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도 두 개의 시간을 나누는데 페이드아웃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영화 속 개인들이 인생의 다른 국면을 맞을 때 사용되는데, 페이드아웃 이후 개인은 다른 사람, 환경,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방향이 꺾이게 되는 전환을 페이드아웃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감각적인 알모도바르의 연출 또한 여전하다. 극 중 야니스는 사진작가로 정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을 아주 아름답게 붙잡는 데 탁월하다. 마찬가지로 클로즈업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 컴퓨터 등을 강조하는 영화의 섬세한 태도는 흡사 그들의 진실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야니스의 눈을 보여주듯 매우 감각적이다. 그는 일상 속 주목하지 않던 오브제들의 조형성과 감각을 매개하고자 세밀하게 카메라를 밀착해간다.      


그리고 알모도바르는 여전히 색채의 마술사다. 본 작품 또한 야니스와 아나의 삶과 성질을 규정하는 배경의 색채가 인상적으로 사용된다. 일단 야니스는 노란 배경에 놓여 있다. 노랑은 밝고 뜨거운 색채, 그래서 무한히 외부로 발산하는 색채로, 이러한 노랑처럼 그녀는 외부, 바깥을 향해 열려있다. 아르투로와 우정을 넘어서 내 몸에 그를 받아들이고, 이후 아니타를 자궁에 품어낸다. 반면 아나는 녹색이다. 녹색은 노랑과 파랑이 결합한, 그래서 밝지도 어둡지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색채로, 어떠한 운동성도 없는 부동의 색채다. 세실리아를 임신한 그녀는 스스로 열림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를 강간한 한 남성이 강제로 몸을 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을 닫아놓을 수도 없다. 세실리아가 곧 세상 바깥으로 나오기에, 바라는 닫힘과 어쩔 수 없는 열림, 이 사이에 놓인 아나를 밝음과 어두움, 차가움과 뜨거움, 양자 사이에 놓인 초록으로 보여준다. 이후 초록은 긍정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야니스의 집 벽지가 녹색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에 아나가 들어와 야니스와 조화를 이룬다. 서로 자연스레, 능동적으로 뒤섞이며 말이다. 출산 이후 아나는 어머니의 집에 놓여 노란 배경에 놓이기도 한다. 노란 배경은 테레사의 집이기에, 주부로 머물지 않고 외부로 뻗어 나가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테레사의 성미를 투영한 것이랴. 또 부모로부터 달아난 테레사처럼, 아나도 부모에게서 달아난다. 그래서 향후 그 집에서 탈출할 아나를 예고한다. 외에 야니스의 집에 걸려있는, 그녀가 발굴하고자 하는 유해의 생전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다. 죽음, 그것은 색채의 앗아감, 하지만 그 흑백사진의 테두리는 빨강이다. 국가는 한때 존재한 그들의 역사를 말소하고, 유해 발굴에 미온하다. 하지만 야니스는 이에 반대한다. 그들에게 다시금 빨강, 즉 한때 살아있어 뜨겁게 끓어올랐을 피라는 삶의 증명을 완수하고 싶다. 이렇게 알모도바르는 여전히 상징적인 색채로 마술을 부린다.      


영화 제목의 parallel은 평행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유사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본 작품에서 강조되는 운명적인 유사성을 제목과 연관하여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야니스와 아나는 운명처럼 한날한시에 출산하였고, 같은 병실에 놓여 있으며, 서로가 임신하게 된 것을 '실수'라 말한다. 이후 아이가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는 것까지 유사하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임신하고 낳을 수 있는 특권, 그래서 항상 아이 곁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 같다. 심지어 아이와 멀어지더라도 다시 다가가고 싶어 한다. 테레사는 전남편에게 아나의 양육권을 빼앗겼지만, 항상 아나를 그리워했으며 결국 영화에서 아나 곁에 있는 것은 어머니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달라붙은 어머니와 자식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강조한다. 야니스와 아나가 막 아이를 낳았을 때, 서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녀를, 더욱 밀착한 근거리에서 포착하고 확대한다. 이러한 여성과 달리 아르투르, 아나의 아버지와 세실리아의 친부 등은 자식 곁에, 또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 항상 놓여있지 않다. 멀어져 있다가 이후 다가오거나, 심지어 다가오지도 않는다. 아나의 아버지는 강간당한 딸을 내치고, 현재는 양육비라는 강제 조치로 묶인다. 야니스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남성들은 아이로부터 멀어진 것이 서로 유사하다. 이렇게 각 성별들은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똑같지 않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서 관찰실까지 함께 간 아기들이지만 서로 다른 이유로 인큐베이터로 향한다. 그리고 아르투로는 돌아오지만, 아나의 아버지나 세실리아의 친부 등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같지만 다르게 우리는 평행을 달린다. 알모도바르는 운명적으로 같은 공통의 순간을 포착하지만, 결국 개인이기에 평행을 달리는 ‘다른 인생’을 parallel의 이중성으로 고찰한다.      


딸과 어머니들, 그녀들도 닮음과 동시에 평행을 달린다. 아나와 테레사는 닮았다. 둘 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그렇다. 한편 서로가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닮았기에, 각자는 서로에게서 떠나며 평행한다. 테레사가 참여하는 연극에서 그녀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아내와 어머니라는 조연, 그럼으로써 뒤처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인생의 주연이 되어 주체성을 회복하고 싶다. 그리고 아나 또한 주연이고자 한다. 부모님에게 구속된 조연이고 싶지 않다. 세실리아와 아니타도 마찬가지로 모체에 있을 때는 어머니와 하나다. 하지만 외부로 나오면서 그녀들은 멀어진다. 모체에 있던 당시의 세실리아, 아니타와 달리, 그녀들은 뒤바뀔 수 있다. 뒤바뀐 세실리아는 아나와 멀어지는 방식으로, 가족에게 내내 반복되는 '부모에게서 멀어지는 자식'이다. 그리고 유아 돌연사에 의해 아이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며, 야니스는 아이를 바랐지만 아르투로는 바라지 않았기에 아니타는 떠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자식과 부모도 서로 멀어지며, 심지어 삶과 죽음으로 평행을 달린다. 이러한 평행이 도래하는 이유는 ‘시간’ 때문이기도 하다. 야니스와 아르투로는 아니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아르투로는 가정을 잃기 싫어서 아니타를 바라지 않았다. 한편 야니스는 가문의 여성들이 홀어머니였던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서, 지금 아르투로를 사랑할 때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이때 아르투로와 야니스는 각자의 리버스 숏에 놓였다. 여기까지가 ‘과거’다. 하지만 현재는 뒤바뀌었다. 아니타가 태어난 현재에 아르투로는 딸을 보러 가고 싶고, 야니스도 그가 오기를 바란다. 과거에 자신이 바란 평행과 달리, 현재가 바뀌어서 인간은 평행과 직선을 포기한다. 아르투로는 야니스와 세실리아의 숏에 방문하며, X자로 맞물리고 합치된다. 아나의 아버지도 그렇다. 테레사와 이혼할 당시에는 그녀에게 양육권을 뺏었다. 과거에는 분풀이로 아나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가 강간을 당해 임신하자, 현재의 그는 딸을 테레사에게 보낸다. 테레사와 그가 엮인 과거, 그리고 아나가 강간당하고 임신한 현재, 이렇게 달라진 현재와 그에 따른 마음에 평행을 포기한다. 과거와 현재가 일직선이 아닌 사람들.    

  

그리고 영화의 또 다른 평행은 바로 현실과 예술이다. 일단 연극에 참여하는 테레사는 알모도바르의 <브로큰 임브레이스>나 <페인 앤 글로리>를 연상케 한다. 테레사는 자신의 현 상황을 극복하고 싶은 노처녀를 연기한다. 어머니인 테레사는 노처녀는 아니지만, 현 상황을 극복하고 싶다는 점과 이혼에 불이익을 받아 뒤쳐졌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배우는 거짓을 연기할 수 없다.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그래서 더욱 현실의 시간과 혼동되는 테레사의 연기, 인간은 진실을 연기한다.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유사한 연극과 현실은 잠시 조우한다. 또 야니스에게 남겨진 아니타의 사진은 죽음과 삶이 평행을 달리는 와중, 아주 잠깐 야니스가 아니타를 만나게 해준다. 그렇게 예술과 현실도 유사함으로서 parallel이지만, 다른 차원의 평행으로서 parallel이 되어, 양자는 X자로 가끔 맞물린다. 현실에서 태어나는 예술은 선천적으로는 현실을 닮는 것일까, 그래서 예술과 현실은 가족일까. 이러한 가족은 선천적으로 닮는다. 본 작품에서 반복되는 유전자 검사, 이는 예술을 낳은 현실, 그렇게 예술이 현실을 가리키는 것처럼, 자신을 낳아준 원형을 찾아 헤매 닮음을 확인하며, 닮아가야 하는 것을 알고 싶은 열망에 상응하랴. 아기와 어른, 산자와 망자, 크기도 형체도 너무나 다르지만, 그들은 가족이기에 어떻게든 유사하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세실리아도 친부를 일련 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르투로와 야니스는 자신들과 닮지 않은 세실리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닮게 태어나는 것은 단지 핏덩이, 육체다. 정신은 충분히 후천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야니스는 가문의 여성들이 항상 홀어머니였으므로, 자신도 미혼모가 되리라 다짐한다. 철학자 니체에게서 가업, 전통 등은 오랜 옛날부터 좋은 기술로 여겨진 것, 증명된 것, 완성된 일이기에 야니스는 이를 기꺼이 따른다. 후반부에 야니스가 유해를 발굴하는 와중, 그녀의 여성 가족들이 서로 화기애애하게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녀의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가늠할 수 있다.     


반면 아나는 앞서 언급했듯, 부모와 남편에게서 달아나는 테레사를 닮았다. 부모님에게서 달아나려 했지만 이와 동시에 아나를 갑갑하게 만든 테레사였기에, 아나는 자라나며 테레사를 닮을 수밖에 없었으랴.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그렇게 되리라 다짐하지 않는다. 후천적으로 닮음을 선택한다. 즉 닮음은 마냥 선천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친부모를 닮았지만 세실리아의 삶은 야니스를 닮을 수 있다. 아나와 친부가 세실리아를 선천적으로 만들었다면, 아나와 야니스, 그녀의 두 어머니가 서로 키스하고 정사를 나누며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세실리아가 아나 뿐만 아니라 야니스도 닮아갈 것을 예고한다. 세실리아는 그 둘 아래 놓일 뿐만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은 닮아감이기 때문이다. 아나는 야니스의 감자 오믈렛를 조리하고, 그녀와 함께 세실리아를 돌보며, 야니스의 방식으로 세실리아를 키우는 법을 알게 된다. 야니스를 사랑하는 아나는, 때로 그녀가 자신의 마음과 일치하지 않고 아르투로와 함께 있는 것이 질투가 난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합하고 후천적으로 가족을 이루면, 일반적인 형태의 가족에서 통속적으로 닮아야 하는 것들 대신, 사랑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닮을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세실리아는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야니스의 증조부가 놓인 유해 앞에 선다.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야니스와 그들을 사랑한다면 충분히 닮을 수 있다. 세실리아는 더 이상 부모를 떠나는 테레사와 아나의 운명을 답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엄마 되기를 긍정하는 야니스를 닮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영화의 말미에 아르투로와 야니스가 재결합하여 다시 아이를 갖는다. 야니스는 아이가 딸이라면 아나의 이름을, 아들이라면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일 것이라 말한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나 또한 야니스의 자식이 닮을 수 있는 원형이다. 야니스가 가족들을 닮음과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따온 가수 재니스 조플린을 닮은 것처럼 말이다. 후천적으로 만나 가족을 이루고 닮으며 하나의 숏에 융합될 수 있다.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숏에 함께 놓인 세실리아, 아나, 야니스처럼 우리는 분리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사랑한다면 선천적인 가족이든 후천적인 가족이든 항상 곁에 있고 싶다, 무덤까지도.      


진실한 사랑, 거기에는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기존의 ‘위반’이 필요하다. 아나와 야니스가 정사를 나누는 것은 이상야릇하고 충격적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친모와 계모, 하지만 사랑하는 두 연인이 통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사랑과 미래를 써 내려감에, 그들의 밑에 놓일 아이도 진정 사랑하는 것을 닮을 수 있으리. 가족들은 당연하게 답습한다. 아나와 테레사의 불화가 그렇다. 하지만 외부에서 그녀들의 불화는 당연하지 않게 보인다. 야니스가 테레사와 아나의 화해를 종용한다. 더 이상 자식이 부모를 억지로 떠나지 않도록 말이다. 또 테레사는 알모도바르의 <줄리에타>처럼 즉자이자 객체로 전락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이기 이전 자유롭게 실존하는 대자다. 그녀들이 화해하지 못한다면, 아이가 있음에도 실존할 수 있는 남성·아버지들과 달리, 실존하는 어머니들의 가능성이 불발될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실존하는 어머니와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 곧 이를 닮아갈 세실리아의 미래 또한 열어두는 일이다. 위반, 그것은 우리가 거짓 위에서 살아간다면, 그 지반을 파괴하고 다시 진실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할 지다. 야니스가 간직하고 있는 전사자들의 흑백사진이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력이 그저 침묵하고 거짓 속에 살 것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은 카메라가 포착한 진실을 가리킬 수 있어서, 사진은 진실 위에 마땅히 놓여야만 한다. 그것은 곧 도입부의 현란한 오프닝 크레딧과 같다. 야니스가 아르투로의 사진을 찍는다. 그녀가 사진을 찍고 그것이 필름에 담기면, 영화는 편집으로 다시 현실의 아르투로에게 되돌아가 사진과 현실을 이어낸다. 그들이 촬영하는 동안 두개골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야니스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야니스는 법의학자 스타일로 프로필을 촬영할 때는 항상 두개골이 동원되는데, 그렇게 '햄릿' 스타일로 촬영하는 것이 아르투로와 어울리지 않아서 사용하지 않았다. 즉 두개골과 함께 놓인 아르투로의 사진은 그의 진실이 아니기에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어서 야니스는 사용하지 않은 것이랴. 오히려 그의 배경을 법의학자와 어울리는 백골에 가까운 색채로 처리한다. 진실한 정물과 배우의 육체, 성애의 진실을 찍는 야니스는 허황한 것을 담지 않는다. 사진은 아르투로와 전사자들의 백골, 존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솔직하고, '그것다운' 일이다. 야니스는 이러한 그것다움으로 되돌아가는 자다. 야니스는 아니타와 세실리아가 뒤바뀐 것을 확인했고, 이후 아니타가 사망한 것을 알았다. 처음에 그녀는 미혼모로 살고 싶어서, 과거를 덮고 외면하고자 번호를 바꾸고, 그간 자신의 숏에 융합되었던 관계와 단절하며 평행을 달렸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미혼모로 사는 것은 거짓이요, 세실리아가 친모 아나를 찾는 것이 진실이다. 야니스가 아나에게 과거를 외면하고 미래만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하는 것처럼, 야니스도 더 이상 과거를 외면하지 않는다. 유해의 진실, 흑백사진이 진실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자는 자신을 둘러싼 진실 또한 복권한다. 영화는 세실리아의 안위를 확인하는, 요람에 놓인 흑백 모니터가 인상적이다. 모니터는 항상 세실리아만 보여준다. 세실리아와 야니스는 함께 포착되지 않는다. 리버스 숏과 같았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이후 딸 세실리아와 엄마 아나의 팔이 함께 모니터에 놓인다. 그렇게 영상은 모녀의 진실을 가리키고, 친모 관계라는 진실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아나도 세실리아의 친부에 대한 진실을 묻어놓고 산다. 여성의 강간 트라우마를 다시 재현하는 제도가 너무나도 폭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면해야 한다. 닮을지 말지, 백골과 함께 묻힐지 말지, 그것은 결국 진실을 인지해야만 선택할 수 있다. 선천적인 진실이 괴롭더라도, 그것을 알아야지만 후천적으로 다른 선택을 내리고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나니. 영화의 말미, 알모도바르는 클로즈업으로 찻잔에 채워지는 커피를 포착한다. 까맣다, 그것이 곧 전쟁이 집어삼켜 흙의 품 안에 가라앉은 백골과 같으랴. 하지만 그 어둠 속에 파동을 일으킨다.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중천의 햇볕이 쨍하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처럼 살아생전 오색 찬연한 색채를 꽃피우던 생명의 진실은 마땅히 드러나야만 한다. 흑백사진이 잃어버린 피사체의 진실과 색채의 진실, 그리고 백골이 잃어버린 삶의 진실과 살과 색채의 진실,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이 진실과 멀어져 서로 평행을 달리고 있다. 제도에 의해 전사자들의 가족은 진실을 회복할 수 없었고, 병원에 의해 아나와 야니스의 아이는 뒤바뀌었다. 하지만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고, 태어난 이후에도 다시 자녀를 찾아가는 어머니들은 평행을 포기하고 아이와 진실을 만나러 간다.      


이렇게 알모도바르는 진실로, 책임으로 향하는 어머니들을 통해서, 제도에 의해 역사와 현재, 진실과 거짓이 서로 다른 차원의 평행을 달리는 과오를 반성한다. 알모도바르의 이전 작품들에서 경찰들을 믿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그는 제도를 불신한다. 제도는 역사기억법 예산을 축소한다. 여전히 사회의 고위층들은 과거를 묻고 미래만 바라보자고 선동한다. 그래서 뒤바뀐 아이, 백골의 진실을 발굴하는 것은 모두 개인, 어머니의 몫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실로 향해가는 어머니들에 의해 평행의 비극이 충분히 X자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역사극과 드라마, 두 장르가 뒤섞인 본 작품의 구성도 처음에는 서로 평행을 내달렸다. 하지만 역사적 삶, 개인적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함에, 어머니에 의해 결말은 분리된 두 개의 장르 또한 만나고 결합하게 만든다. 40대인 야니스는 딸뻘인 10대 아나, 갓 태어난 세실리아의 숏으로 향하고, 그렇게 만나 진실을 물려준다. 이로써 거짓을 물려주는 기성이 아니라, 진실을 물려주는 기성의 반성을 촉구한다. 또 선천적·불가항력적으로 규정되고 답습되는 삶이 아닌, 사랑하여 선택할 수 있는 삶을 긍정한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나 <마타도르>처럼 아나는 아이의 친부를 증오하는 어머니다. 하지만 앞선 작품의 그녀들과 달리, 아이가 친부를 닮았다는 이유로 싫어하지 않는다. 아이와 아버지는 닮았지만 결국 평행을 달리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닮을 수밖에 없지만, 그 가족 또한 사랑으로 선택하고 만들어질 수 있나니. 그렇게 알모도바르는 강요된 유사성이 아니라, ‘선택한 유사성’으로 나아간다. 강요된 유사성과 내가 사랑하는 삶, 그것이 현실과 이상으로 평행을 이뤄선 안 된다. 이상은 현실과 만나고 접촉하여 실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알모도바르는 여전히 파격적인 위반을 감행한다. 일반적인 것, 통속, 자연스러움, 이데올로기가 거짓이라면 위반하여 진실로 향해야 하니. 아이가 뒤바뀐 채로 살지 않고, 거짓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드러난 진실과 솔직한 사랑으로 살아가고, 그렇게 평행이 아닌 서로의 포옹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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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33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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