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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02. 2022

마하마트 살레 하룬, <링귀, 모녀는 용감했다>

신성한 결합을 위한 신성한 이해

마하마트 살레 하룬(Mahamat-Saleh Haroun), 

<링귀, 모녀는 용감했다>(Lingui, The Sacred Bonds) 

- 신성한 결합을 위한 신성한 이해   

“아이들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녀의 몸이 그녀가 정한 방향과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가는 느낌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

카이로스(Καιρός): 고대 그리스어에서 '적절한 순간'을 의미하는 단어. 고대 그리스인의 성 관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카이로스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성 윤리가 기독교의 금욕적이고 합리적인 성적 윤리관과 전혀 다른 양태를 띠는 이유가 바로 카이로스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도덕의 체계는 언제나 전체 체계의 틀에서, 모든 이가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성적 통념을 따라야 한다. 기독교의 성적 규범은 '모든 이에게 적절함'을 지향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성적 규범은 기독교의 윤리보다 열려 있다. 상대방과 나의 적절한 순간에, 절제된 성행위를 계산하여 가장 적합한 성행위를 교육하였기에, 고대 그리스의 도덕은 비교적 개별의 자유를 존중한다. 나이, 성별, 개인의 조건에 따라 각자의 카이로스는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비단 성행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성의 결과인 번식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모름지기 필멸을 피할 수 없다. 이를 간접적인 형태로 극복하는 것이 바로 번식이다. 내가 설령 죽더라도 나와 닮은 자식을 보며, 자신이 기억되고 보존되기를 바라는 영생불멸의 욕망이 바로 번식 욕구다. 이러한 한 생명을 낳는 일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필적하는 위험을 수반한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 발생되는 파열과 무수한 출혈, 그리고 막대한 에너지를 낭비해가며 자라나는 자손, 그렇기에 번식 또한 카이로스가 필요하다. 자손으로 불멸하고자 하는 자가 느끼기에 모든 여건이 적절히 갖추어져 있다고 느낄 때, 가족계획을 시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10개월간 아이를 품는 여성의 적절한 순간과 주체적인 선택이 좌우해야 한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생명을 잉태하기에 그녀의 몸이 적절한 순간이 아니라면, 이를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여성의 카이로스를 남성, 종교, 국가가 강제로 통제한다면, 그래서 자신만이 실로 알 수 있는 적절함을 침해한다면, 그녀와 자손의 삶은 비극으로 치달으리라. 한 생명이 극도로 쇠약해지는 번식, 가장 나약한 상태로 세상에 내던져지는 자손, 적절한 순간이 아니라면 양자 모두가 간접적인 영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땅 아래로 서서히 꺼져만 가리라.   


차드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마하마트 살레 하룬의 신작 <링귀, 모녀는 용감했다>에서 나타나는 임신과 출산, 낙태라는 소재도 바로 이 같은 여성의 카이로스를 강조한다. 하룬은 카이로스를 가로막는 구조,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1961년 차드 태생의 마하마트 살레 하룬은 현 중앙아프리카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기자로 활동한 이력을 자양분 삼아 현실에 밀착한 영화를 연출한다. 그의 작품 중 <다라트>와 <절규하는 남자>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 차드의 혼란한 정치적 지평을 반영한다. <다라트>는 부패한 정부 밑에서 일하는 군인들이 시민을 수호하기는커녕, 오히려 힘으로 위협하고 법을 유린하는 실상을 고발한다. <절규하는 남자>는 국민 영웅으로서 사랑을 받은 만큼 이에 책임을 져야 할 가장들의 무책임, 외면을 고발한다. 또 다국적 자본의 유입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외부에서 결정되는, 독립 이후에도 주체적이지 못한 비극을 담아낸다. <그리그리>에서는 열악하고 값비싼 의료체계와 이에 의해 불법적 휘발유 밀거래에 가담하게 되는 구조적 재생산을 비판한다. 감독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을 지금까지 ‘부자 관계’로 풀어냈다. <다라트>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강요하는 할아버지의 그림자가 손자에게 드리워져, 내전의 상흔은 아물지 못하고 오히려 복수가 연쇄를 이루며 분열이 악순환 된다. <절규하는 남자>에서는 이웃이 새로 이사하거나 아버지의 자리를 아들이 차지하는, 마땅한 변화와 흐름을 가장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다가, 오히려 전쟁을 가속화하고 아들의 삶을 위협하는, 아버지의 욕심에서 비롯한 비극을 써내려간다. <그리그리>에서 주인공 술레이만은 그리그리란 이름을 직접 선택하고 무대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서, 장애를 극복한 자신의 육신을 널리 자랑하는 댄서다. 그는 다리에 장애가 있지만, 댄서로서 이를 장점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스튜디오에서 그는 수동적 요구에 반응하는 조력자로 전락하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삶을 일련 희생한다.      


하지만 하룬은 <다라트>에서는 총 대신 빵을 강조하여 아버지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것을 천명하고 진정한 성장을 논한다. 과거의 잔재 때문에 총을 들었던 아들은, 생명을 유지하고 피워내는 빵을 구워내며, 비로소 무언가를 창조하는 어른으로 거듭난다. <절규하는 남자>에서도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지만, 하룬의 영화에서 반복 포착되는 ‘임산부’들 앞에서 회개하는 남성을 담아내며, 미래를 위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그리>에서도 어머니 혼자 출산하고 양육하게 만드는 방종한 아버지 대신, 계부임에도 불구하고 제 자식처럼 책임지는 어른의 덕목을 비춘다. 혼자 아이를 낳는 여성과 그녀들 곁에 계부로 자리하는 남성의 구도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을 연상케 하는 본 작품은, 부조리한 아버지상 대신 '요셉 되기'를 강조하며 극복해야 할 아버지상과 승계해야 할 아버지상을 대비한다. 그리고 하룬의 연출은 롱테이크를 통해 현실 속 날 것의 시간을 담아내고, 카메라는 크게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인물이 움직인다면 함께 따라가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부동하여 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서사가 분명 존재하지만 세밀하지 않고 듬성듬성, 숏의 사이사이에 여백이 존재하며, 고요하고도 적막한 분위기나 이미지 그 자체에서 비롯하는 감각에 집중한다. 이는 <절규하는 남자>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감정을 괄시하는 물결에의 저항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출로 지금껏 부자 관계에 주목하던 하룬이 이번에는 모녀 관계로 시선을 튼다. 하룬의 작품에서 여성은 <다라트>에서처럼 남성 중심적인 결혼체계 내에서 훈육되며 매 맞는 여성, <절규하는 남자>에서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없고 남편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그리>에 이르러서 남성들에게 버림받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그녀들만의 공동체, 남성 중심적 세계의 대안이 그려졌다. 또 <그리그리>에서 남편 없는 홀어머니에게 태어나고, 딸들은 방종한 남편에게 버림받아 홀로 아이를 낳고 책임져야 하는 악순환이 적발됐는데, 본 신작은 이러한 관심을 지속하여 이어간다.      


우선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볼까, 이전 작품들에 비한다면 탐미적이라 말할법한 발전이 눈에 띈다. 물론 그것이 기술이나 형식 자체로는 발전일 수 있으나, 과연 극의 진보까지 맞닿아있는지는 다소 의문이 든다. 일단 본 작품의 탐미적인 요소는 도입부의 편집이다. 극의 시작, 타이어에서 철제를 빼내어 스토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아미나, 감독은 타이어를 가르고 철제를 빼내어 옮기는 그녀의 노동을 일정한 박자에 맞춰 컷하며 리드미컬한 시퀀스를 형성한다. 또 이전 작품들이 롱숏을 여러모로 활용했던 것과 비교하면, 본 작품의 거리감은 매우 가까운 편이다. 가까이서 정교한 오버 숄더 숏을 활용하는 본 작품의 연출, 이는 유럽으로 카메라를 옮겨간 그의 전작 <프랑스에서의 한 철> 이후 유러피언 필름의 영향을 받은 여파일까, 서구 영화들의 정교한 구도 일부가 본 신작에 활용된다. 이러한 안정적인 구도로 하룬이 나고 자란 차드의 자연, 투박한 환경, 여성에게 힘겨운 종교와 법을 포착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대상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탐미적인 연출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연출에서 비롯하는 미적 속성이, 줄곧 그가 다루는 차드의 정치적 실정, 전쟁 등에 맞닿아있었다면, 본 신작에서 발전된 기교는 단지 기교일 뿐 대상과 부응하지 못한다. 그나마 안정적인 구도, 부드러운 스테디캠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면, 그 이후 ‘핸드헬드’가 사용되는 숏과 대비를 이루는 연결에서다. 핸드헬드는 아미나가 마미타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딸의 퇴학 소식을 들었을 때, 낙태를 위해 마미타가 거칠게 달려 나갈 때 활용된다. 또 영화 후반부에서 낙태를 앞두며 시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기대하는 삶과 기대하지 않는 삶의 ‘기로’에 선 이들을 포착할 때도 사용된다. 이전의 삶으로부터 거세게 흔들리며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듯이,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이던 이전의 삶이 흔들리며 무너질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핸드헬드가 기교적인 연출에 의해 대비를 이루며, '흔들림'의 상징성을 강화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유럽에서나 어울릴법한 기교적인 연출은 대상 그 자체를 다루는 것으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기교적 연출과 핸드헬드의 대비 외에 영화의 연출로는 ‘방향’에 주목할 법하다. 영화는 아미나와 마미타의 발걸음을 강조하고, 그녀들의 발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포착하기 위해 평평한 구도를 활용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달려 나가는 여성들의 방향, 오른편과 왼편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일단 오른편은 아미나가 스토브를 팔러 갈 때, 마미타가 어머니를 거부하고 달려 나갈 때 주로 활용된다. 오른편은 생산적인 노동, 이슬람과 법에 순응하지 않는 자유, 진보 등에 상응한다. 반면 왼편은 임신한 마미타의 퇴학 사실을 들었을 때, 아미나가 달려 나간 마미타를 찾아 나설 때, 브라힘에게 매춘을 시도하고 되돌아올 때 사용한다. ‘나아감’으로부터 ‘되돌아옴’, 그렇게 되돌아옴은 기존의 법과 이념에의 순응, 마미타가 바라지 않는 어머니로의 퇴보에 상응하리. 이렇게 매끈한 연출, 흔들리는 연출, 방향을 가리키는 연출로 영화는 무엇을 담아내는가. 다시 도입부터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미나가 노동하는 과정이 담긴 숏들을 일정하게 잘라내고 이어 붙여 규칙적인 노동에 상응하는 리드미컬한 시퀀스를 만든다. 본 숏의 형식성 외에, 타이어의 고무를 가르고 손을 집어넣어 그 안에서 골격을 이루는 철제를 빼내는 행위에 주목할법하다. 영화의 주된 소재가 임신인 것처럼 이는 흡사 ‘출산’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모체인 부드러운 타이어로부터 뼈를 가진 철제(=아이)가 분리된다. 타이어에서 빠져나온 철제는 이후 여성의 손을 거쳐 스토브가 된다. 그리고 다소 낙후된 전원에서, 유동인구가 바글바글하고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도심부로 향해 나아간다. 즉 여성은 낳고 길러, 기존 자신이 놓인 곳으로부터 더 나은 곳으로 자식을 나아가게 만든다. 아미나가 놓인 장소에 폐타이어도 가득하지만, 브라힘이 운영하는 공장에도 폐드럼통이 가득하고, 마을 자체도 쓰레기가 즐비해 있다. 이렇게 황폐한 공간에서 버려지고 쓸모를 다한 사물을 재활용해 새로운 사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임신과 출산을 관장하는 여성의 노동으로 본다. 한편 남성의 노동은 이보다 거칠다. 브라힘이 일하는 곳에서 철제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폐드럼통이 즐비해 있긴 하지만 진정 재활용, 탄생과 관련해 있는지는 다소 오리무중이다.      


의문이 드는 이유는 영화 중반부에 아미나가 브라힘에게 매춘을 시도하는 사실, 그리고 후반부에 브라힘이 마미타를 강간한 사실이 폭로되며 그들이 생산과 무관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라힘에 의해 마미타가 퇴학당하고 풍문에 시달리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여성은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있고, 또 여성의 노동과 남성의 노동은 경제적으로 격차가 상당하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여성이 안정적이기 위해선, 경제원리의 중심에 있는 남성에게 성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남성은 권력자다. 무슬림들을 관장하며 막대한 권력을 획득한 이슬람 종교지도자 이맘, 부를 과시하는 아미나의 매부, 공장을 운영하는 듯한 브라힘의 모습이 권력자 남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브라힘을 아미나가 유혹하는 모습과 공장에서 철제끼리 부딪치는 노동의 소리는 한 공간에서 공존한다. 전자 또한 후자처럼 노동이라는 듯이, 남성에 의해 여성의 성은 자유롭지 못하고 노동이나 경제로 환원된다. 또 남성은 철제를 파괴적으로 두들겨 이를 다른 것으로 뒤바꾸듯, 스스로가 바라는 자연스러운 마미타를 억지로 변형시킨다. 여성은 안정적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 자유로운 성과 삶을 희생해야 한다. 이렇게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 대비를 이루며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와중에, 하룬은 본 작품에서도 <그리그리>처럼 춤을 강조한다. 스토브를 만들고 파는 과정에서 소비자를 계속 설득하는 아미나는 자신을 일부 내려놓아야 한다. 또 브라힘에게 제안한 성매매는 결국 자신이 바라는 성을 브라힘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노동에 의해 자신은 포기된다. 하지만 <그리그리>에서처럼 노동 이후 자신의 감정, 기분, 몸의 이끌림대로 춤추는 주체의 복권을 이뤄야 함을, 장애를 이겨내고 독립성을 되찾아야 함을 하룬은 강조한다. 아미나의 동료인 빈터우는 판촉에 실패해도 기분 상하지 않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아미나도 브라힘에게 매춘을 시도한 이후 집에 돌아와 춤을 춘다. 원치 않은 자신으로부터, 바라는 자신, 솔직한 몸을 회복하고 싶은 하나의 의례다, 객체로부터 주체로 변화하는 여정.     


그녀들이 춤을 춰야만 하게 만드는 경제적·사회적으로 우위에 선 남성, 그들은 종교와 법에 따라 비호받는다. 무수한 신도를 거느리고, 그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이맘의 영향력은 이슬람에서 비롯된다. 마미타와 아미나는 그를 귀찮아한다. 그녀들이 바라지 않는 ‘무슬림 여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으로 결혼이 장려된다. 남성은 원하지만 여성은 원치 않는 결혼이 말이다. 아미나는 홀로 마미타를 낳은 이후, 지금까지 쭉 미혼모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브라힘이 자꾸 회유한다. 사회는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늘여놓고, 마미타는 아미나가 이러한 풍문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을 봐왔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을 이유로 낙태를 원한다. 법은 여성에게 불리하다. 임신한 여성은 교육받을 수 없다.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더욱이 브라힘이 마미타를 강간한 사실을 여성들이 사회에 항변할 수 없다. 그래서 아미나는 사적으로 그를 처벌한다. 현재 법과 사회를 관장하는 아버지들에 의해 사적으로 복수하는 여정을 떠난 <다라트>처럼 말이다. 방탕한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은 법에 따라 불이익을 받으나, 진정 방탕한 남성은 사회적 위신이 실추되지도 않고 처벌받지도 않는다. 또 아미나는 마미타를 가졌을 당시, 가족에게 추방되어 쫓겨났다. 사회는 자유로운 여성, 홀로 놓인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아, 남성에게 소유되는 메커니즘을 재생산한다. 이러한 법에 따라 여성의 몸이 규정된다. 법은 여성이 남성에게 소유되거나 규정되는 것을 장려한다. 이러한 법의 기원이 된 종교를 하룬은 비판한다. 아미나의 딸은 마미타로도 불리지만, '마리아'로 불리기도 한다. 흡사 동정녀가 성령에 의해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한 것처럼, 마리아 또한 브라힘에 의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종교에서 기원한 마리아는 여성은, 사후에도 종교가 결탁한 법과 사회에 여전한 영향을 끼치며 ‘마리아들’을 양성하는 것은 아닌가.      


하룬은 양성되는 마리아가 아닌, 실제 여성의 목소리가 드러나야 함을 강조한다. 집에 돌아온 마미타는 곧장 흰 옷을 입는다. 학교에서 그녀에게 방탕하고 추잡한 이미지를 덧씌워 내쫓았다면, 마미타 자신의 몸은 결백하고 순수하다는 듯이 말이다. 또 마미타는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이 거북하다. 아미나가 자신을 만지는 것조차 파르르 떨며 거칠게 막는다. 한편 이는 트라우마임과 더불어, 타인의 손아귀로 인해 나의 몸, 여성의 몸이 변화돼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랴. 그리고 종교와 법이 원치 않는 마리아를 양성한다면, 그녀들은 기꺼이 법을 넘어선다. 이맘이나 브라힘에게 좌우되지 않고, 두 모녀는 자유를 위해 낙태를 시도한다. 이러한 낙태의 여정에서 감독은 공간을 강조한다. 일단 ‘물의 공간’인 강과 수영장이다. 먼저 강은 아미나가 스토브를 팔기 위해서 강물을 따라 도시로 향하는 숏, 임신 사실이 밝혀진 마미타가 강을 애달프게 바라보고 이후 스스로 개울에 빠지는 장면에서 포착된다. 강은 인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 흘러가며 씻겨낸다. 신발을 벗고 강에 빠진 마미타는 남성 중심적 법이 더럽힌 자신의 몸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강물로 정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한편 수영장은 흐르지 않는다. 강에서 흐르는 물은 목적 없이 흐르지만, 수영장에 갇힌 물은 인간에 의해 목적이 부여받아 고착된다. 파티가 벌어지는 수영장으로 향한 마미타, 한 친구가 그녀에게 다가와 임신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들의 시선과 타인의 입으로 만들어진, 마미타 자신의 자연과 상반된 인위적인 상(狀)이 수영장에서 범람한다. 똑같이 물의 공간인 강과 수영장, 하지만 이러한 물을 가둔 수영장에서 만들어진 여성의 이미지는 더욱 고착화되고, 그녀들은 강에서의 흘러감, 진짜 삶을 그리워한다. 현실에 맞춰서 변화하던 종교 이슬람, 강과 같았고 자연스레 흐르는 여성의 권리 또한 보장했던 종교 이슬람, 하지만 강과 같던 관용은 어느새 좁다란 수영장에 갇혀 남성 우월적 이념으로 변질되고야 말았다.     


이는 마을과 자연의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무슬림 공동체인 마을에서는 자신의 욕구보다 기도를 우선시해야 한다. 마을은 자연스러운 자신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 스토브를 팔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여 흥정하듯, 종교 외로도 나를 일련 내려놔야 한다. 상대방의 내부에서 피어나는 가치를 긍정하기보단, 외부 가치체계를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고 판가름한다. 하지만 자연에 놓인 사람들은 이와 상반된다. 마미타가 물에 빠졌을 당시 그녀를 구해준 순박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편견에 가득 찬 눈초리로 그녀를 왜곡해서 바라보지 않고, 위태롭고 쓸쓸한 그녀 자체를 바라본다. 어떠한 이득도, 욕망도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구한다. 그들이 마미타를 집에 데려다주자 아미나는 그들에게 돈을 주지만, 목적이나 이득을 바라고 그녀를 구한 것이 아니기에 돈을 받지 않는다. 영화 후반의 시술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미나를 자매라 선언하고, 가족끼리는 순수하게 이해하고 돕기에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인위적인 공간과 자연스러운 공간, 인위적인 관계와 순수한 관계, 우리는 자연과 순수를 회복하여 서로의 자연스러움을 시선으로 가두지 않아야 한다. 한때 마미타는 인위적인 외부 세계에 도무지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때로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되었다. 하룬은 초기작 <아부나>에서도 이상형을 만난 소년의 의식, 현실에서 유리된 요동치는 내면에의 집중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준 바 있다. 본 작품의 슬로우 모션도 현실에서 유리되는 맥락은 유사하나, 그 이유는 훨씬 부정적이다. 바로 여성이 참여하고자 하는 외부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강과 수영장, 마을과 자연에 이어 강조되는 공간은 바로 '미로'다. 여성이 바라는 공간은 드러나 있거나 트여있지 않다. 낙태가 가능한 시술소를 찾는 것도, 브라힘을 징벌한 이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일도 쉽지 않다. 또 아미나의 조카는 할례하고 여러 어른에게 둘러싸인, 미로와도 같은 인파를 헤쳐 나오는 의례를 거쳐야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심지어 이러한 공간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도망치거나, 총을 들고 다니는 남성들의 시선이 감시하기도 하니, 여성들은 이러한 미로에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랴.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어떤 시선도 없는, 오직 자신이 바라는 내면에 침잠하여, 외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유리되고 싶은 것이랴.      


비로소 그녀들이 이해받을 때, 그녀들은 구불구불한 미로를 통과하여 현실에 참여한다. 앞서 언급한 시술사와 강에 있던 사람들에게 포착된 순수한 우애도 이해의 한 과정이다. 영화는 여성이 이해받지 못하는 미로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이해를 강조한다. 일단 하룬이 보기에 차드는 남성 중심적인, 여성은 언제나 몰이해의 수모를 당하는 세계다. 남성인 이맘은 그녀들이 어째서 예배에 나올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의 중반부, 모녀가 지나가는 와중에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들을 관조하는 남성 무리가 포착된다. 남성들은 먼 위치에서 여성들의 피상을 관조한다. 또 그녀들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않고, 남성이 여성을 규정하고자 하는 결혼, 할례 등을 강요한다. 이렇게 영화가 그려낸 차드의 남성들은 진정으로 대상을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의 용법이 어느 나라나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독어에서 이해는 ‘실생활에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함께 가리킨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닫혀있던 자기 내면의 무엇인가가 열리고, 과거 자신과 달리 이해하게 된 자신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해하지 못한 대상은 낯설다. 영화 초반, 커튼으로 아미나와 마미타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었다. 딸과 엄마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 어느 순간 달라져 버린 딸이 아미나에겐 낯설었으리라. 더욱이 부모에게 자식은 분신이다.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분신인 자손을 낳음으로써, 영생불멸의 소망을 간접적으로 성취하려 한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과 유사한 자식을 마냥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손은 부모를 닮은 분신임과 동시에 명백한 타자다. 그렇기에 낯설다. 영화에서도 서로는 분리된다. 마미타를 낳은 아미나와 아이 낳길 원치 않는 마미타는 서로 지향하는 삶이 다르고, 또 아미나 또한 마미타가 자신의 핸드폰을 마치 제 것처럼 만지는 것이 불쾌하다. 그렇게 닮았지만 서로는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철학자 가다머에게 이해의 과정은 나 자신의 개인적 특수성과 상대방의 개별적 특수성까지 극복하는, 상이한 지평들이 상호융합하며 고양되는 과정이다. 다르고 낯선 서로는 배타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부단히 합쳐져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이 영화에서는 수직적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방향으로 가시화된다. 마미타의 낙태가 안전하게 끝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골목길을 파고드는 아미나, 브라힘을 징벌하러 가는 아미나를 뒤따라간 마미타 등 영화는 피상적으론 알 수 없는 서로의 삶을 깊이 파악하는 과정에서 심오하게 파고들어 가는 수직적인 구도를 사용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아미나와 판타가 평평한 구도에서는 교착상태에 놓였지만, 이후 떠나는 판타를 입체적인 구도로 포착한 골목길에서 붙잡아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는 장면도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멀리서 서로를 관조하지 아니하고, 깊이 파고들어서 이해하며 그들의 사고로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미나가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것처럼 그들의 배고픔을 헤아려야 하리. 또 빈터우와 아미나가 서로 질문하는 것처럼, 상대를 지레짐작하지 않고 진짜 상대방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영화의 제목 ‘lingui’는 차드어로 '신성한 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성한 결합이 곧 이해에서 기인하랴. 형식적인 가족은 그들의 명예와 위신을 위해 아미나를 이해하지 않고 내쫓았다. 하지만 현재에 비로소 이해하게 된 판타와 아미나는 개인의 이기심을 위해 상대를 추방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으며 상호 결합한다. 아미나는 가짜로 할례해주는 시술소를 소개해주고, 판타는 낙태 자금을 위해 팔찌를 내어주며, 서로의 요인은 상대에게 융합되고 더 폭넓게 인식할 수 있다. 마미타가 처음 낙태하려 했던 병원이 경찰에게 급습당한 순간에 간호사는 다른 시술소의 전화번호를 내어준다. 마미타의 처지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미나도 마미타가 바라는 삶을 이해하고, 마미타도 자매의 삶을 이해하며 낯섦을 친밀함으로 극복한다.      


미혼모의 삶, 그리고 할례 받을 딸, 그들의 부모가 마땅히 그랬다는 이유로 자식도 같을 순 없다. 자식을 이해하며 기존의 편협한 자신을 뛰어넘어 열린 자신으로 고양되어야 하리. 그것이 곧 현재를 살아가는 유한한 부모가 자식을 통해 경험하는, ‘닮은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무한하고도 새로운 지평이랴. 그리고 이를 위해서 부당한 합법을 뛰어넘어 신성한 불법을 시도한다. 부당한 합법이 개개의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의식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신성한 불법은 여성 개개의 카이로스에 복종하며 자유를 되찾는다. 또 아버지의 과오가 아들에게 미치지 않을 것을 촉구하던 하룬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그늘이 딸에게 미치지 않는 카이로스 또한 되찾는다. 이렇게 보편적인 시간으로부터 카이로스를 회복하는 하룬은 신성한 불법의 지평으로 뛰어넘으며 진정으로 차드의 여성들을 이해한다. 할례와 임신의 공포, 부당한 남성 권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두려움을 헤아린다. 다만 최근 함께 공개된 <레벤느망>에 비한다면 여성들의 삶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다소 빈약하다. 그간 하룬이 '부자 관계'를 부친살해 신화로 깊게 탐구하여 다룬 영화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깊숙하게 파고드는 영화의 연출이 하룬의 시선까지는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특히 곁가지로 언급되는 할례는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또 촬영은 더 매끄러워졌을지 몰라도, 기교가 눈에 띄는 만큼 차드의 풍경과 삶과 감각은 눈에 덜 띈다. 더욱이 저널리스트 출신인 하룬의 장점이 단점으로 활용된 사례일까, 예술의 감각성보다 정보전달에 귀착한 본 작품은 예술로서 다소 안일하다.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영화 고유의 시각, 차드의 투박하고도 자연적인 감각성을 강조하던 그간의 작품과 달리, 대사에 의존하는 그의 신작은 다소 나태하다. 그마저도 나열되는 여성 혐오의 사례들이 다소 얄팍하니 말이다. 그가 사는 오늘날의 차드에 꼭 필요했을 작품, 하지만 남성 감독이 여성의 삶과 신성하게 결합하고자 했다면 좀 더 깊게 이해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한계가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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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0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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