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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09. 2022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 <나의 집은 어디인가>

디아스포라의 집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Jonas Poher Rasmussen), <나의 집은 어디인가>(Flee) 

- 디아스포라의 집     

“우리가 떠나온 환경으로 되돌아갈 때면 우리는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며, 부인된 만큼이나 보존되어 있는 나 자신과 만나게 된다.” -디디에 에리봉-

1926년부터 1973년까지 존속한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의외로 진보적인 국가로, 외교와 국가산업, 여성 권리를 개혁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슬람이 유연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언론과 매체에 원리주의를 따르는 극단적인 무슬림만 송출되기에, 이슬람이 폭력적이고 교조적인 종교로 선입견이 새겨지곤 하나, 서구 식민주의 이전 이슬람은 그 어떤 종교보다 정치적이고 세속적이어서 유연했다. 이슬람은 정치적 성공이 곧 신앙의 충만함과 결부되기에, 현실에서 성공하고자 노력했다.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의 개혁도 이와 결부될 것이다. 그런데 1973년 모하마드 디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수립한다. 모하마드는 종교적인 아프가니스탄을 근대화하고자 아프가니스탄 왕국에서의 개혁보다 더욱 급진적인 정책을 내놓았고, 무슬림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곧 원리주의자들이 탄생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종교를 불문하고 원리주의는 근대화가 경시하는 전통과 종교를 지키고자 하는 반동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의 원리주의는 이러한 근대화, 특히 서구의 식민주의에 따른 강압적인 근대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후 1978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을 암살하고 쿠데타에 성공한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타라키는 이전 정부보다 더욱 거세게 무슬림을 탄압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선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반정부 게릴라가 생겨났으며, 이들은 근대화를 거부하고 신정국가로 회귀하는 원리주의를 띠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내전이 발발하고, 공산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이 개입한다. 당대의 세속적 이념과 적대함에 따라,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의 본령과 반대로 현실에서 멀어지는 보수성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폐쇄성은 원리주의자들의 보수성을 더욱 강화했다. 이 같은 역사가 동시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에 여전히 파장을 미치고 있다. 근대화와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투쟁 수단으로 전락한 전통과 종교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그늘을 드리우는 구름과 같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나고 자랐고, 그 시대에 난민이 되어 모국을 탈출한 ‘아민’이란 남자의 삶을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이 <나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담아낸다. 1981년 칼룬버그 태생의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은 덴마크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지금까지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그의 이러한 예술관을 이어가는 작품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허공으로 재빠르게 흩날리는 윤곽선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던 도입부, 이윽고 윤곽선이 서서히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다리다. 윤곽선이 흩날리던 이유도 밝혀진다. 그 다리들이 다급하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불명확한 윤곽선은 공간을 구성한다. 건물들이 붕괴하고 있는 공간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세계는 흑백이다. 회색으로 가득 차 있다. 칸딘스키는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 놓여 움직이지 않는 회색을 절망적인 부동의 색채라 여겼는데, 이러한 회색으로 멈춰버리거나 퇴보하는 개개인의 삶을 그려낸다. 이러한 ‘회색 양식’ 속에서 말살되는 것은 개개인의 인격을 포함한다. 도망치는 그들의 얼굴은 익명적이다. 이목구비가 그려지지 않고, 누구나 다 비스무리한 획일화, 단지 키의 차이로 아이인지 성인인지만 구분될 뿐이다. 도입부의 붕괴하는 도시는 만인을 누구나 다 똑같은 피난민의 처지로 전락시킨다. 이후에도 회색 양식은 반복된다. 일단 다큐멘터리가 기록하는 주인공 아민이 아버지가 체포되던 당시를 회고할 때 사용된다. 1978년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 정권을 수립한 이후, 그들에게 반하는 국민 및 무슬림을 체포하였는데, 아민의 아버지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군인들에게 체포된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생사도 확인할 길이 없는, 죽음도 삶도 아닌 상태에 놓인 아버지의 기억을 어렴풋이 흔적만 존재하는 추상적 연출, 절망적 색채로 보여준다.      


또 아민이 직접 겪지 못한, 그저 상상만 가능한 누나들의 밀항도 이러한 양식으로 표현한다. 직접 겪지 않아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성, 하지만 숨이 막힐 듯한 절망적인 느낌을 이에 걸맞은 형식으로 승화한다. 아민 또한 에스토니아의 수용소로 향하는 과정에서의 내면이 회색 양식으로 그려진다. 볼 수 없는 개개인의 내면, 하지만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 영역을 감각적으로 가시화한다. 또 아민은 덴마크에 입국하기 위해 가짜 인생으로 위장했다. 가족은 없는 셈 치부되었고, 또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약점이 잡혀 협박당하기도 했기에, 그의 회고는 처음에는 흐릿하다. 아스라한 세피아 톤과 앞서 흩날리는 회색 양식으로, 존재가 부정당한 가족과 뇌리에 남아선 안 될 기억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추상 내지는 표현주의적 경향으로부터 구상으로 발전된다. 윤곽선은 명확해지고, 색채도 회복된다. 본 작품은 아민이 과거를 회고하는 장면에서는 일반적인 만화 영화지만, 그가 이를 말하는 현재 장면에서는 실제 촬영된 다큐멘터리 영상의 시각을 단지 만화로 뒤바꾼 것뿐이다. 전자에서 인물들의 음성은 성우를 활용하지만, 후자에서는 실제 촬영된 인물들의 목소리가 그대로다. 이렇게 영화는 픽션을 통해 유폐된 과거를 만화로 되살리고, 조심스럽지만 존재해야만 하는 현재를 비교적 명확한 다큐멘터리로 기록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화에 당대의 현실을 기록한 푸티지들을 인서트하여 허구가 아님을 명시한다. 본 작품의 감독과 그가 담아내는 아민은 친구 관계다. 그들은 열차에서 처음 만났는데 고등학생 시절 라스무센에게 아민이 눈에 띄었다. 이후 두 친구는 작금에 이르러 다큐멘터리로 상대를 기록해주는 관계로 발전하는데, 어쩌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자신의 미덕은 ‘밝히는 자’임을 역설하는 것이랴. 세상은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는 것처럼, 동성애자인 존재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아민이 처음 만난 고양이와도 능숙하게 교감하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 말하고 듣는 존재, 그렇게 서로를 밝히는 존재다. 이를 통해 부정당하던 존재의 진실과 기억을 발굴한다. 

     

이러한 본 작품의 매체는 만화다. 하지만 장르는 다큐멘터리다. 물론 픽션에 가까운, 만화다운 측면도 있다. 아민의 회고를 단순히 말로만 기록하지 않고, 이를 만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허구적 요소, 상상력이 첨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해진 것, 언어를 시각으로 상상하는 것은 기록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 같은 아민의 과거를 제외하면 본 작품에서 허구적 요인은 없다. 단지 촬영하고 기록한 영상을 만화로 고스란히 뒤바꾼 것뿐이다. 만화라는 시각 매체만 다르지, 촬영된 인물도 행동도 공간도 음성도 모두 같다. 만화로 된 다큐멘터리, 사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어로 쓰인 역사, 그리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촬영하고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마주한다. 냉정하게 기록된 언어와 숏은 현실과 유사하여 다시 그들이 놓였던 장소로 다시 돌아간다. 언어로 쓰인 역사는 당대의 세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재연한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마주하는 이유는 비단 객관적 사실만을 알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느낌, 감각 또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보여주기에 언어는 다소 불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회화로 된 역사, 만화로 된 역사, 영화화된 역사를 마주한다. 그것은 생생한 당대의 감각을 전달한다. 일반적인 형태의 기록은 아니지만, 당대를 ‘느끼기’에는 이러한 매체들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언어보다 더욱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려가 뒤따른다. 이러한 매체들이 현실과 닮지 않기도 하고, 또 축약 내지는 왜곡, 주관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또한 현실을 글자로 뒤바꾼 것이다. 언어, 그림, 캐리커쳐, 모두 다 재현할 시에 현실을 다른 매체로 바꾼다. 더욱이 본 작품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를 복원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과거가 일부 왜곡되는 무력이 동반되지 않겠는가. 즉 우리가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역사는 온전하게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역사와 기록에 대해서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본 작품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만화 다큐멘터리다. 객관적으로 촬영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다르다. 현실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서, 이중으로 촬영된 숏을 그림으로 뒤바꾼다. 이중 모방이라는 관점으로도 접근할 수 있으랴. 이러한 만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 불가능한 것, 누군가에 의해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을 자유로이 그려내고 창조할 수 있다. 본 작품에서 만화라는 매체는 카메라로 포착되어선 안 되고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어야 하는, 또 존재 불가능한 현실에서 만화라는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한 사람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영화 속 포착되는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의 동성애자로, 러시아의 합법적 거주자로, 덴마크의 ‘진실한 나’로 존재할 수 없었던 남자다. 본 영화를 통해 서서히 존재하게 되는 아민과 그의 기억을 따라가 보자. 일단 아민의 눈에 비친 어렸을 적의 누나,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은 서구적이다. 온몸을 칭칭 둘러싸고 살갗을 은폐한 차도르가 아니다. 제 몸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복장이다. 그리고 연예인 카드를 파는 친구와 흥정을 한다. 카드에는 당대에 내로라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수록되어 있다. 누나는 제 욕망에도 솔직하다. 그리고 어렸을 적 아민은 낭창낭창한 치마 입기를 좋아했다. 음악을 들으며 자유분방하게 질주하고 춤추기를 선호했고, 당대의 액션 스타인 장 클로드 반담을 선망했다. 치마를 입고 당대의 보편을 거부한 아민은 서서히 커가면서 자신이 게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가 가족에게도 위축되듯, 원리주의 이슬람은 그들의 존재에 불관용을 고수한다. 또 1979년 12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공산 정권은 아버지를 빼앗아가고, 이후 창궐한 무자헤딘은 아민의 형을 앗아가려 한다. 하지만 형은 징병을 거부한다. 이렇게 영화에서 만화로 표현한 아민과 그의 남매들은 자유를 추구한다. 훗날 여성과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는 원리주의자로부터, 그리고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에 불복종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사라짐이다. 국가가 승인하지 않고, 바라지 않은 이들은 모두 카불에서 떠난다. 그렇게 아프가니스탄에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가족들은 러시아로 향한다. 러시아인들과 비교하여 가족은 생김새도, 피부색도, 언어·억양도 다르다. 또 러시아인이 그들에게 특정 기대를 걸거나 요구 사항이 있으니, 이를 버티지 못해 러시아를 떠나 스웨덴으로 향할 배에 밀항한다. 작디작은 어선에 올라탄 그들은 폭풍우를 버티기 어렵다. 이윽고 거대한 크루즈를 만난다. 크루즈에 탄 사람들도 난민을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전시장의 유물처럼,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이야깃거리,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이후 에스토니아의 수용소로 보내진 난민들을 방송국이 취재하지만, 저널리즘의 수준은 황색 언론에만 그친다. 시청자들의 쾌를 자극하기 위한 존재, 방송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 이에 난민들의 처절한 진짜 삶은 소외된다. 난민에 대한 보도가 그 어느 시대보다 늘어난 작금, 하지만 오늘날에도 과연 난민들의 삶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감독이 인서트하는 푸티지나, 개인을 파괴하는 거대 구조에 초점을 맞춘 숏들을 보건대, 우리는 여전히 난민의 삶을 모른다. 그래서 감독은 아민을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난민의 여정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한다. 밀입국을 위한 막대한 금액, 과정의 험난함, 소외되는 자신… 그렇게 겨우 사회에 정착한 난민,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제 자신을 감히 드러낼 수 없다. 덴마크에 입국한 직후, 만화가 아카이빙 푸티지로 이어지며 흡사 가상이 현실로 실현된 것만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화된 것은 아민의 거짓 인생이다. 브로커가 말한 대로, 덴마크에 머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삶이 난민들에게 강요된다. 종교에서 부정당하는 성 지향성, 국가에서 거부당하는 서류, 이에 아민은 덴마크로 향한 이후에도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서 동성애를 약으로 치료해달라고 호소한다. 사라지고 은폐되어야 하는 존재의 시선에서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당연시된 보편의 야만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삶, 통상적인 인정을 위해 거짓이 진실이 되어선 안 되리라. 영화의 결말은 덴마크에 입국할 당시의 아민을 포착한 시퀀스와 유사하다. 만화가 현실을 기록한 숏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말에는 거짓이 없다. 캐스퍼와 정착하고 결혼할 아민, 아민이라는 정체성과 게이라는 성 지향성으로 살아가는 진실이 현실로 이어진다. 아민의 정착이 결말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이뤄진 이유, 그것은 거주할 수 없는 집에 의해서다. 부를 재분배하여 빈자와 부자의 격차를 줄이고 공평함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의 이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들의 종교 탄압과 무슬림 학살은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이론과 모순된다. 소수자와 약자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정신이 그들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었으니 말이다. 영화 속 국가라는 거대한 집은 이렇듯 자신이 내세운 본령을 잃고 있다. 집에 머물 수 없게 된 가족들은 카불을 떠나 러시아로 향한다. 하지만 새롭게 이주한 집도 그들에게 편치 않다. 러시아 경찰에게 아랍인은 착취당하여 돈과 시계를 내주는 존재, 형제가 경찰차에서 만난 중앙아시아 여인은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존재로서, 여전히 그들은 집에 동등하게 놓이지 못한다. 인간보다 서류가 우선하고, 난민들은 컨테이너의 짐짝으로 전락되며, 북유럽으로 가기 위한 행렬에서 약자인 할머니와 반짝이는 신발을 신은 소년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 약하고 이질적이라는 진실이 탄로 나면 보호시설로 추방될 삶, 특정 자격과 신분을 가져야만 거주할 수 있는 집이기에 아민은 정착을 경계한다. 아민은 연인 캐스퍼에게도 자신의 기억이나 진실을 온당 밝히지 않는다. 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달지, 또 ‘그가 나를 믿어주기는 할까’ 등의 의심이 자꾸만 차오른다. 연인도 사랑하는 나를 품어주는 하나의 집, 하지만 한 평생 조건 불충분으로 유목했고, 더욱이 언제나 누군가가 희생하여 집에 이주했고 머물렀기에 사적인 집에서 사적인 상태로 머물지 못한다. 집에서조차 타인을 위하고 의식하는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집은, 그리고 가족은 조건 없이 그들을 품어줘야만 한다. 여자 친구가 있지 않느냐고, 사귀지 않느냐고 캐묻는 남매에 의해 아민은 커밍아웃한다. 진실을 밝힌 동생에게 큰 형은 돈을 쥐어주고 게이 바에 데려다 준다. 은폐되어야 하는 동성애자가 아닌, 드러날 수 있는 동성애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집, 이러한 집이 세워질 때 우리는 진실로 정착한다. 감독은 만화 다큐멘터리라는 안전한 집을 세워 고등학교 시절 그저 인상만 알던 친구의 진실을 거주하게 만들어준다. 이후 떠돌던 아민과 그의 기억은 캐스퍼라는 집에 신뢰의 뿌리를 내린다. 비로소 그때 우리는 비행한다. 영화는 하늘과 지상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누나의 회고로 확인할 수 있는 아버지는 파일럿이었다. 자유로이 비행하는 존재, 이러한 ‘비행’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아민의 회고에서는 비둘기나 하늘을 두둥실 유영하는 연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지상에서 무질서하게 뛰어다니고 물웅덩이에서 점프하는 어린 날의 아민도 간접 비행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연과 아민은 구속에서 벗어난다. 연은 아민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아민은 남성이라는 젠더의 규범에서 자유롭다. 그렇게 날아야만 한다. 중력에 붙잡혀 땅에 나뒹구는 시체들, 러시아 경찰의 손아귀, 특정한 말을 요구하는 제도의 질문들에 붙잡히지 않고 말이다. 결말의 아민이 수풀 사이로 사라지며 우리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랴. 나를 붙잡는 시선으로부터의 사라짐, 그것 또한 비행이랴. 

기억은 서서히 흐릿해지고 사라져 간다. 아민이 다리어를 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라져가는 기억이 진실이요, 그가 외부에 내세우는 소유한 삶이 거짓이다. 망각한다면 자신의 진실도 사라지리. 그래서 붙잡아야 한다. 감독은 친구의 기억과 이야기를 악의 없이 듣고 기록한다. 그가 원하는 만화 양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양식에 아민의 역경과 고난, 성 지향성이 고스란히 보존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는 아민의 집과도 같다. 다큐멘터리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라는 대로, 그들이 비행하고 싶은 대로 기록하는 것이 곧 집으로서 다큐멘터리의 덕이랴. 언제나 종교, 국가, 타인 등 공적 무대에서 사라지고 협박당하던 존재, 비로소 사적인 집에 정착하며 그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도의 승인, 타인의 시선, 가족을 위해 살던 그는 비로소 악순환을 끊고 균형을 되찾는다. 이렇게 타자가 진실을 고백한 다큐멘터리에선 보편적인 시선에서 보이지 않는 부조리, 약자와 소수자가 사라져야만 했던 수모, 국가의 야만이 떠오른다. 이를 극복했을 때 국가는 비로소 집이 되리라. 진정한 자유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코란이 말하는 공평한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말이다. 그들 스스로가 만화로 담기고 싶다면 그렇게 기록해야겠지만, 부조리한 집에 의해 만화임이 강요된 것이라면, 진실을 위해서 집은 자신의 본령을 회복해야만 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아민이 말하듯 가장 안전하고 떠돌지 않게 해주는 공간, 영화 후반부에서 아민이 강조하듯 경계심을 내려놓고 그 어떤 인류라도 포용하고 믿어주는 공간으로서의 집이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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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0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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