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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13. 2022

안토네타 알라마트 쿠시야노비치, <무리나>

여성과 바다

안토네타 알라마트 쿠시야노비치(Antoneta Alamat Kusijanovic), 

<무리나>(Murina) - 여성과 바다     

“늘 진짜 같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 아빠는 이해 못 하시겠지만요.” -앨리스 먼로-

철학자 하이데거는 해석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폭력이 동반된다고 주장한다. 해석한다는 것은 피상적인 것, 드러난 것을 넘어서, 그 너머를 꿰뚫고 들춰내기 때문이다. 또 미술이나 음악을 해석하는 일은 그림이나 선율 등의 매체를 언어로 뒤바꾸는 과정이기에, 전환 과정에서 무력이 동반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논증한 작품과 해석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 이는 비단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무수한 상황에서도 흔히 발생한다. 인간이 자유롭고 익숙한 환경을 넘어서 다른 공간으로 향했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가 필요하고, 이러한 과정은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동반한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우리가 실로 서로를 존중하는 이상적인 관계를 맺을 때, 그 누구의 시선도 미치지 않는 사적 환경에서 진정 자유분방할 때, 우리는 ‘나 자신’이라 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나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고, 때때로 어떤 타자들은 자유분방한 나를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를 떠들어댄다. 단순히 떠드는 수준에 그친다면 좋겠지만,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경우, 또 그 사람과의 관계가 위계적이고 수직적이어서 무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의 해석에 의해 주체가 객체로 전환되는 폭력을 겪으리라. 본 작품 <무리나>는 공간과 타자, 특히 가장에 의해 여성이 변형되고 해석되는 폭력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를 연출하는 안토네타 알라마트 쿠시야노비치는 1985년 두브로브니크 태생의 크로아티아 감독이다. 본 작품 <무리나>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으로, 본 작품 이전 <인 투 더 블루>라는 단편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단편은 가정 폭력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율리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몇 년이 지나 다시 고향에 돌아가서 발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는 <무리나>에서 반복되는 '가정 폭력'의 여파를 다룬 극의 원형이다.     


안토네타는 <인 투 더 블루>에서 바다의 속성을 강조한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룻배에서, 율리아의 엄마는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율리아는 그녀의 얘기가 듣기 싫은 모양이다. 소녀는 바다로 뛰어든다. 잠수하고 수영한다. 율리아에게 바다는 고통, 악몽,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두둥실 부유하는 것도 그렇고, 지상에서는 아나와 사귀는 피에르가 바다에서는 자신과 키스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다는 제약이 없다. 하지만 대지에서 태어나 땅에서 사는 존재인 인간은 지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연이다. 지상에 가서 살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책임지지 않는, 방종하고 방탕한 양면적인 바다의 속성을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빗댄다. 아내와 딸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잃어버린 친구 아나를 되찾으려는 율리아의 질투는, 친구의 입에서 '아빠와 닮았다'라는 말을 나오게 만든다. 아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율리아가 피에르나 아나를 바다에 빠트리고, 그럼으로써 현실인 지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위협을 가한다. 즉 현실에서 멀어지는 바다는 양가적이다. 이상일 수도 있고, 위험일 수도 있다. 이렇게 바다와 지상을 대비하고, 각각의 속성을 고찰하는 안토네타는 이와 더불어 가정폭력을 탐구한다. 율리아와 아나는 단짝이었다. 하지만 율리아가 가정 폭력으로 섬을 떠나야 했다. 가장은 단순히 아내와 딸의 몸에 생채기를 내거나 자유를 억압한 것을 넘어서, 그들이 갖고 있던 것까지 간접적으로 앗아갔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율리아는 아나와 우정을 회복하고 싶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소녀의 곁에 성애의 상징인 도마뱀이 돌아다닌다. 성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는 사춘기에 아나는 친구 율리아보다 남자친구 피에르가 우선이다. 하지만 가정 폭력으로 잃어버린 아나를 무리하게 되찾으려 시도하고, 또 은연중에 아버지처럼 타인을 소유하려는 태도가 드러나며 가부장제 및 가정 폭력의 여파를 강박, 모방으로 진단한다.      


이상의 바다를 위협의 바다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정 폭력, 과연 안토네타의 장편 데뷔작인 <무리나>에서는 권위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고,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폭력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바다와 여성을 바라보는 감독 안토네타, 그녀는 신작 <무리나>의 도입부에서도 역시나 바다를 포착한다. 수면 아래의 바다를 로우 앵글로 바라본다. 푸른 어둠 속에서 서서히 두 남녀의 형체가 스멀스멀 드러난다. 이후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곰치’ 한 마리를 사냥한 두 남녀는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안토네타는 도입부에서 바다를 포착하는 연출과 이후 영화가 전개되는 지상을 포착하는 형식을 대비한다. 일단 바다, 카메라의 무빙은 매우 부드럽다. 흡사 그것이 잠수하거나 수영할 당시, 우리를 포근하게 품어주는 물의 감촉에 상응하듯 말이다. 또 지상 및 현실의 시간에서 유리된 듯, 슬로우 모션이 활용된다. 바다를 포착하는 카메라의 태도는 열려있다. 하나의 각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각도를 활용한다. 즉 바다를 바라보는 연출은 자유분방하다. 한편 현실은 다르다. 입체적이고 수직적이기도 하던 다양한 각도는, 이내 곧 아이 레벨 숏과 수평적인 구도로 제한된다. 또 지상은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포착된다. 핸드헬드가 리얼리즘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핸드헬드의 흔들림은 바다를 포착하는 카메라 워킹과 달리 다소 거칠다. 부드럽게 품기보단 강하게 붙잡는 대지의 중력, 마찬가지로 그것이 비유하는 가장이 여성들을 ‘잡아끌어 흔드는’ 알력을 보여주듯 말이다. 또 바다에서는 파랑, 즉 원색을 강조했다면, 대지와 바위섬은 흙색, 히끄무리한 갈색, 회백색으로 국한된다. 채도나 명도가 낮고 제한된다. 더욱이 수면 아래에서는 물살을 이겨냈다면, 대지에서는 딱딱하게 닫힌 공간을 헤쳐가기가 어렵다. 바다가 무제한이라면, 대지는 제한이다. 바다에서 숨을 수 있다면, 대지는 이를 모조리 까발린다. 안토네타는 연출을 대비하며 각 장소의 속성을 효과적으로 가시화한다. 영화는 이를 2.35:1의 널따란 화면비에 품어낸다.     


더불어 본 작품은 클로즈업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중반부에 하비에르는 '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대사를 한다. 외부에선 여성의 진실을 거짓말과 강요로 줄곧 은폐하고 왜곡하나, 그녀들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 율리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본 작품은 강요에 따르면서도 숨길 수 없는 우울한 내면, 또 하비에르를 만나 즐거움과 활기를 되찾은 그녀의 얼굴을 거짓 없이 비춘다. 간헐적으로 밝혀지는 율리아의 진실, 이는 어째서 은폐되고 간접적으로 드러나는가. 본 작품에서는 율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호명’이 강조된다. 율리아의 이름은 언제나 가부장적인 아버지, 안테가 호명한다. 율리아의 이름은 그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부모가, 특히 그녀를 계속 호명하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안테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율리아의 자유를 존중하며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녀에게 일을 시키고, 인사하라 종용하며, 옷을 입고 손님들 앞에서 웃으라고 명령하기 위해 호명한다. 안테가 개최한 파티는 그녀가 바란 것이 아니다. 율리아는 자유롭게 수영하고 싶은데, 수면 위에는 안테가 초청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방문한다. 그리고 안테는 그녀를 호명하며 줄곧 자신과 율리아를 동일시한다. 호명되어 안테가 바라는 것이 몸에 체현되는 율리아, 그녀는 파티에서 춤추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호명에 의해 춤을 추고, 불쾌하게 몸이 만져진다. 이렇게 남성은 여성을 부른다. 안테는 율리아 뿐만 아니라 아내 넬리에게도 명령한다. 율리아를 나오지 못하게, 또 자신이 뚱뚱해지더라도 사랑하라고 말이다. 여성은 남성의 호명으로 규정되나, 반면 여성은 남성을 호명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 율리아는 안테에 의해 창고에 갇힌다. 나갈 수 없는 율리아, 그녀는 바깥에서 지나가고 있는 하비에르를 목 놓아 외친다. 그녀가 하비에르를 호명하는 것에는 구출해달라는 요구가 수반된다. 하지만 남성은 이러한 호명이 들리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의 호명에 객체화된다면, 남성은 여성의 호명에도 여전히 주체다. 또 창고 바닥의 바다 동굴에 빠져 부모를 호명하지만 그들 또한 율리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부모는 자식을 객체화하지만, 자식은 마땅한 의무를 다하는 객체로서 부모를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본 작품은 두 가지 언어가 사용된다. 크로아티아어와 영어다. 영화의 배경이 크로아티아이니만큼, 내지인들은 당연히 모국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하비에르는 외지에서 땅을 사러 온 안테의 친구이자 고객으로 그는 영어를 구사한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들에게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어는 그의 호명, 강요가 담겨있다. 가장에게 지배되는 여성들은 이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 하지만 영어를 사용할 때 안테의 태도는 180도 뒤바뀐다. 강요 대신 아첨하고, 하비에르의 호명과 질문에 답변한다. 영화는 남성의 호명을 통해 소유물, 화폐로 전락한 여성과 영어에 참여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순종하는, 언어에서 나타나는 위계를 보여준다. 이렇듯 본 작품은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하비에르를 위해 구사하는 안테의 영어는 가식적이다. 그는 섬을 하비에르에게 팔고자 하는 중개사다. 그렇기 때문에 섬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진실을 숨기고, 과장하고 왜곡하여 하비에르에게 광고한다. 자국어가 아닌 언어,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자신의 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를 위해서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한 여성들은 마찬가지로 그에 의해 꾸며진다. 율리아는 수영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생활 및 수영하고 싶다. 하지만 안테가 화목한 가정을 연출하기 위해 넬리와 율리아는 억지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기 싫은 옷을 입게 된다. 하비에르를 위한 영어, 가장의 크로아티아어는 있어도, 여성의 언어는 없다. 그녀들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귀속된 형국이기 때문이다. 하비에르가 안테에게 내어줄 돈, 이에 율리아와 넬리는 의존한다. 남성 중심적 경제를 언어가 반영하고, 거기서 여성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안주하지 않는다. 안테는 자신이 팔고자 하는 섬 인근에서 인명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숨긴다. 섬이 평화로운 휴양지인 것 마냥, 또 자신의 배 조종 실력이 매우 뛰어난 듯 포장한다. 하지만 율리아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그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되찾고 싶다. 율리아는 안테가 사고를 냈다는 사실, 바위가 있으니 위험하다는 진실을 경고한다.     


하지만 안테는 율리아가 시나 읊으며 파티 분위기를 띄워줄 것을, 넬리가 자신을 사랑할 것을, 가족들이 하비에르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줄 것을 지시한다. 이렇게 안테는 그녀들이 발화를 제한하고, 여성들의 말을 그가 가로채서 대신 말한다. 여성들은 방문객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없다. 그래서 안테가 사라진 상황에서 하비에르와 넬리의 옛 연인 관계, 율리아가 하비에르에게 갖는 호감 등의 진실이 솔직하게 수면 위로 드러난다. 안테의 언어는 경제라는 목적을 위한 도구다. 이해관계를 위해서 진실을 은폐한다. 하지만 감독은 여성의 언어가 그녀들의 현실, 진실을 가리키는 역할을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안테를 따르지 않고, 넬리처럼 가장의 순종적인 아내로 붙잡히지 않고, 율리아는 솔직하게 구술한다. 더 이상 안테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다. 이러한 본 작품은 언어를 통해 남녀 간의 위계, 그리고 국외 자본에 의존하는 크로아티아의 경제적 실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언어 외에도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가부장제의 해악과 여성의 삶을 생생히 드러낸다. 일단 ‘밧줄’이다. 영화 내내 안테가 율리아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것이 밧줄이다. 안테의 요구에 따라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또 배의 밧줄을 조정하기도 하고, 낚시에 필요한 줄을 챙기기도 한다. 밧줄은 붙잡는다. 사냥감을, 또 물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끔 말이다. 율리아의 상황도 안테의 밧줄에 묶인 것에 다름 아니다. 밧줄에 의해 특정한 행동만 취할 수 있다. 안테는 율리아에게 지금 나이쯤 임신을 해서 남성에게 발이 묶일 거라 예언한다. 이처럼 가부장제에 의해 여성들이 남성의 밧줄에 묶여 있다. 안테가 매입한 자그레브의 아파트로 따라갈 순 있어도, 하비에르가 제안한 하버드 대학교로는 향할 수 없다. 가부장제의 밧줄은 오직 그녀들을 소유한 가장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비에르를 따라가려면 율리아의 선택이 아니라, 그녀를 묶어 소유하고 있는 안테의 결정이 필요하다. 또 도입부에서부터 강조된 ‘사냥’, ‘작살’에도 주목해야 한다. 작살은 작은 틈을 비집고 달아나는 곰치의 자유를 빼앗아, 인간에게 생사를 쥐어준다. 뾰족뾰족한 작살, 그것은 곧 율리아의 나이쯤 임신하여 남자에게 발목을 잡힐 것이란 안테의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나 작살, 또 이처럼 날카로운 남근을 지니고 있는 안테, 반면 안테가 아니라 하비에르를 사랑했다는 넬리, 그녀가 안테와 결혼하게 된 것이 툭 튀어나온 작살로 사냥당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붙잡힌 넬리는 사냥당한 소유물로서 안테의 악행과 부당함에도 그를 억지로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작살과 밧줄을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부여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 머무는 여성이기에 율리아는 스스로 개척하기보단 하비에르에게 자신을 하버드로 데려가 달라, 즉 안테 대신 하비에르가 자신을 묶어 달라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다이빙하는 자유인이다. 여성은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녀는 스스로 하버드에 가야 하지, 누군가에 의해 다이빙‘돼’선 안 된다. 하비에르에 의해 하버드에 가는 수동성은, 배에서 그녀를 확 밀어 바다에 빠트린 안테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자유롭게 뛰어들고 숨어들고 달아나는, 영화의 제목인 '곰치'여야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곰치는 붙잡혔다. 바다에 사는 곰치가 안테에게 붙잡혀, 억지로 대지로 끌려와 꿈틀대다가 끝끝내 자유로운 몸부림, 호흡을 멈추게 됐다. 하지만 그 이후 곰치를 사냥하려는 안테의 시야에 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율리아가 창고의 바다 동굴에 빠졌을 때, 그녀는 곰치를 발견하고 이를 뒤따라가 비좁은 바위틈을 찾아서 겨우 탈출했다. 매끈하고 기민하며 자유로이 헤엄치는 곰치는 남성의 어떠한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의 틈을 찾아 헤쳐 나간다. 영화의 결말이 안테에게 붙잡히지 않고, 또 하비에르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율리아 스스로 바다를 헤쳐 나가는 롱숏인 것처럼, 곰치로서 그녀 자신의 인생과 자유는 스스로가 거대한 세계를 개척하며 구해야 하리.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연출을 서술할 때 언급했듯, 지상과 바다의 영화다. 일단 지상, 대지를 포착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본 작품은 딱딱하고 척박한 바위에서 대지의 특징을 찾는다. 뾰족뾰족한 바위에 배가 충돌하여 화재가 발생했다는 언급이 있다. 딱딱한 대지에 부딪히면 폭력이 발생하여 사라진다. 이 같은 바위의 단단함과 대지에 대상을 붙잡는 중력을 가장의 영향력에 비유하고, 그들에게 붙잡히고 충돌하여 변형된 여성의 자유는 사라진다. 그리고 율리아가 바다 동굴에 빠졌을 때, 바위는 그녀가 나갈 수 없게 가로막는 차단막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바다는 다르다. 율리아는 바다에서 안테를 살해하는 꿈을 꾼다. 또 제한없는 바다를 유영해서 해변에 도착한 율리아는 호감이 있는 핼쑥한 청년에게 제 삶을 터놓는다. 여성이 꿈을 꿀 수 있는 공간, 대지와 카메라에서 달아나 자유를 쟁취하는 장소가 바로 바다다. 그리고 바다는 안테가 일으킨 사고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대지와 달리 파괴하지 않고 머금는다. 율리아의 몸에 생채기를 남기고 그녀를 가두는 대지와 달리, 대상을 변형시키지 않는 바다의 힘은 비교적 자애롭다. 또 영화의 도입부터 강조됐던 것은 ‘바다의 물살’이다. 우리는 분명 바다의 물살을 헤쳐 나가야 하기에 일련의 저항에 부딪히지만, 이는 율리아의 자유에 따라 감내해야 할 일련의 책임이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다. 이러한 바다에서만이 빛을 밝혀 광명을 찾는다. 남성에게 가로막혔지만 스스로 빛나고자 하는 여성의 자유는 바다에서, 바다로부터 실현되리. 이렇게 단편부터 바다와 여성의 영화를 선보였던 안토네타는 장편 데뷔작 <무리나>에서도 본 색채를 이어온다. 직접적인 손찌검만이 폭력이 아니다. 언어로 여성들을 규정하고, 그녀들의 몸과 자유를 가두는 것, 있는 그대로의 그녀들을 변형시키는 것도 폭력이다. 영화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언어, 여성들이 불가능한 언어, 그리고 경제적 격차에 의한 각 국의 언어에 내재한 권력 관계에 집중한다. 그리고 구속에서 달아나 진실을 가리키는 언어로의 회복을 희망한다. 또 그간의 남성들에게 밧줄과 작살을 쥐어준 가부장제를 철폐할 것을 크로아티아의 여성 감독이 촉구한다. 이후 여성이 나아가야 할 자유의 이상향으로서의 바다를 아주 기막히게,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촬영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 이는 그간 동유럽, 슬라브권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탐미적 경향을 보여준다. 안토네타의 신작은 20세기 중후반 유고에서 성행한 마술적 리얼리즘(에밀 쿠스트리차)에도 따르지 않고, 동시대 슬라브권의 영화적 조류인 리얼리즘을 따르지도 않는다. 물론 본 작품은 리얼리틱하지만, 슬로단 고르보비치나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보여주는 거시적인 사건, 구체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고, 미시적인 영역으로 파고들어 간다. 이러한 리얼리즘 문법에 대상을 형식으로 승화하는 탐미주의를 뒤섞는 안토네타는 슬라브권 영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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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13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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