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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17. 2022

코르넬 문드럭초, <에볼루션>

지울 수 없는

코르넬 문드럭초(Kornel Mundruczo), <에볼루션>(Evolution) - 지울 수 없는     

“난 원래 그렇다. 금방 잊어버리거나 평생 안 잊어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다.” -사뮈엘 베케트-

진화와 예술, 양자가 함께 놓이는 것은 다소 어색해 보이지만, 최근에는 진화가 예술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오늘날의 미학은 진화심리학을 통해서 예술형식이나 미적 속성의 기원을 추적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느끼는 풍경에 대한 선호나 혐오가 진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본다. 강이 끼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적당히 개방된, 이에 보호받을 수 있음과 더불어 먹이가 풍부한 환경을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선호한다. 태고로부터 너무나 멀리 온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바다나 산, 강에 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본 풍경에 공통된 초록, 파랑 등의 색채를 선호하는 인류의 취향 또한, 이러한 지리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인류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 생존에 부적합하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미적 속성을 진화심리학의 ‘성 선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생존이나 이성적으로는 무용하지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심미성에 대한 선호가, 곧 자연에서 전혀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성 선택의 사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환경에서의 미적 선호, 그리고 미적 특질은 언제나 진화와 깊이 연관하여 후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코르넬 문드럭초의 신작 <에볼루션>은 이러한 진화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극이다. 2차 대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 과거는 어떻게 현대로 이어오고, 또 우생학과 극단화된 이성을 강조하던 시대로부터 '무용한 것', '감정적인 것'은 어떻게 선택되었을까. 1975년 괴될뢰 출생의 코르넬 문드럭초는 헝가리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벨라 타르와 그의 계보를 잇는 라즐로 네메스의 느린 영화와도 다르고, 베네덱 플리고프의 리얼리즘과도 차이가 있으며, 일디코 엔예디가 보여주는 상징주의와도 다르다. 그는 작가주의적 탐구에 장르영화의 문법을 뒤섞는 연출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진지함과 더불어 재치 있고 기상천외하며, 기존 장르의 성격을 뒤집는 전위적인 성격을 띤다.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지만 여기에 담기는 정신성과 형식의 사용을 전복하는 문드럭초, 그는 자신의 작가적 색채에 조응하는 장르적 문법의 합목적성을 탐구하는데, 일단 그가 다루는 대상은 주로 약자, 타자다. 그의 근작 <화이트 갓>이나 <주피터스 문>에서 등장하는 ‘떠돌이 개’, ‘난민’이 대표적 예시다. 힘이 없는 존재, 사회적으로 멸시 받는 존재들이 슈퍼히어로 장르나 액션물의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선천적으로 강하다거나 무언가를 타고났다거나 선택된 자들이 아니라, 약하고 소수이며 힘이 없는 자들이 능동적으로 세태를 극복하는 모습을 장르적 문법으로 써내려간다.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세태는 매우 지저분하거나 더럽게 그려진다. 그의 초기작 <천국의 나날들>의 풍경이 대표적이다. <천국의 나날들>에서 약자 여성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매매할 수밖에 없고, 그녀가 낳는 아기 또한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비정한 세계를 둔탁하고 흐릿하게 포착한다. 또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의 경우 타율적으로 만들어지는 자식, 그럼으로써 부모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자식을 고찰한다. 이러한 구속 대신 현실의 복합적이고 솔직한 감정과 삶, 자유가 중요함을 밝히는 문드럭초는 이에 상응하는 약자, 피착취자들의 일탈을 웅장하고도 심미적인 양식으로 승화한다. 그의 초기작 <성녀 요한나>는 아주 비참하고 너절한 헝가리의 의료 환경을 고발하고, 이러한 제도에 방치된 절망적인 환자들이 등장한다. 본 세계에서 요한나는 섹스로 그들을 구원하는 간호사다. 신성한 것, 고귀한 것, 영웅적인 것을 다루는 오페라가 저속한 것, 음란한 것을 다루는 것은 흡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성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면, 마냥 방탕하거나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것이라면, 그간의 선입견, 관례를 깨고 우아하고도 고풍스러운 양식인 오페라에 담길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화이트 갓>이나 <주피터스 문>도 덧붙이자면, <화이트 갓>에서는 인간에 의해 서로 싸우기 싫은 개들이 투견으로 전락한다. <프랑켄슈타인 프로젝트>처럼 인간에 의해서 특정한 목적의 개가 만들어진다. 개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야만에 드러내지 못하던 분노를 응당 표출한다.      


<주피터스 문>는 원리주의 무슬림들에 의한 테러리즘의 일반화와 아리안의 기적을 두고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는 스탄이 그를 '프랑켄슈타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아리안은 이 모든 '중력'을 거스르고 비행한다. 이러한 저항을 다루는 작품들에서 그는 일상화되어버린 폭력도 고찰한다. 난민, 약자를 향해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그저 강자의 당연한 쾌락인 듯한 태도를 꼬집는다. 그리고 근작인 <그녀의 조각들>은 그간 문드럭초의 장르물과 결이 다른, 매우 진지한 드라마다. 문드럭초는 부인이자 각본가인 카타 웨버와 함께 부부가 직접 겪은 신생아 돌연사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다. 그들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숨이 멎는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모,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부모는 책임 소재를 찾지만, 이윽고 그것이 자신들의 계획과 아집을 위해, 떠나간 아기와 자신들을 도운 산파를 희생시키는 일임을 반성한다. 이후 과거와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본 작품은, 자유로 향해가는 문드럭초의 장르 영화들이 리얼리즘, 일상과 현실에서 비롯함을 알려준다. 이렇게 현실에서 비롯한 짜릿한 장르 영화를 선보이는 문드럭초는 과연 본 신작에서는 어떤 ‘타당한 허구’를 보여줄까. 일반적으로 그에게 기대하는 장르성과 달리, 문드럭초는 본 작품에서 초기작 <천국의 나날들>이나 바로 근작 <그녀의 조각들>에서 보여준 진중한 태도를 이어온다. 영화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딴 3부 구성을 취하는데, 각 부는 하나의 숏이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원쇼트원씬(or 플랑세캉스)이다. 이에 영화 전체에 거쳐 사용되는 숏은 단 세 개에 그치는데, 이는 샘 맨데스의 <1917>과 같은 사례를 연상케 하고, 또 자국의 벨라 타르나 라즐로 네메스의 롱테이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각 장을 구성하는 영화의 길고도 긴, 결코 끊어지지 않는 롱테이크는 후술할 '이어짐'과 관련이 있다. 과거가 결코 씻기거나 잘리지 않고, 현재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는 것을 문드럭초는 치열한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영화의 연출은 본 롱테이크에 핸드헬드가 결합한다. 특히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1부에서 롱테이크와 핸드헬드의 결합으로 탄생한 형식은, 배경과 연출 모든 면에서 <사울의 아들>을 연상케 한다. 핸드헬드는 1부에서는 거칠고 급박한 흔들림에 상응하고, 2부에서는 에바와 레나의 세대 간의 갈등, 3부에서는 오늘날에 여전히 잔존하는 민족 간의 불씨에 따른 흔들림을 가시화한다.     


앞서 본 작품의 1부가 <사울의 아들>이 연상된다고 언급했다. 수용소 배경에 롱테이크, 핸드헬드가 결합하니 색채가 사뭇 유사하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을 연상케 했던 이유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화면비도 유사성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화면비는 1.33:1이다. 1940년대를 다룰 때, 초기 영화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본 역사적 화면비는 시대를 관통하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각 장을 거쳐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거쳐 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적인 화면비는 유지된다. 이는 1940년대에 발원한 화면비가 여전히 현재를 과거의 프레임에 가둔다는 것을, 그렇게 이어짐을 보여준다. 또 심리적으로 이들은 마냥 자유롭진 못하다. 2부에서는 유대인임을 드러낼 것이냐 은닉할 것이냐에 관한 논쟁, 3부에서는 독일인들의 무슬림, 유대인 혐오가 포착되니, 민족적으로 아예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들은 광활하고 널따란 환경에 놓이기보단, 좁다란 실내에 숨어든다. 폐쇄적인 공간감과 좁다란 화면비의 조합은 서로 시너지를 내어,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갇힌' 유대인의 상황을 가시화한다. 외에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에 주목할 법하다. 물론 항상 정지되어 있진 않다. 바깥을 활보하는 3부의 롱테이크는 <버드맨>을 연상케 할 만큼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부나 2부에서는 가만히 멈춰서 인물들을 바라보는 정적인 카메라가 눈에 띈다. 카메라는 실내에 메여있어 주로 외부로 나가지 않고, 가끔 실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영화의 고정된 카메라는 인물들이 결국에는 수용소로,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올 것임을, 기원한 곳에서 마냥 자유롭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한편 그것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태도에 상응함과 더불어, 유대인의 발목을 여전히 잡고 있는 구조적 한계와 맞물린다. 유대인은 외부로 나가려다가도 다시 가장 안전한 실내로 돌아온다. 과거나 현재나 말이다. 그리고 각 장의 끝과 시작에도 주목해야 한다. 1부의 끝은 아기 에바의 얼굴을 정면에서 클로즈업하다가 이후 익스트림 롱숏으로 하늘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이후 2부의 시작은 늙은 에바의 뒷모습이 다시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포착된다. 그렇게 2부 내내 영화는 가까워졌으나 초현실적인 누수로 인해 영화는 흐려지고 멀어진다. 2부 끝자락의 누수에 이어, 3부에서는 방화가 발생한다. 그렇게 멀어지고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3부의 끝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소년, 소녀의 얼굴이다.      


문드럭초가 멀어지면서도 클로즈업으로 돌아오며, 끝끝내 가까워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바로 역사의 진실, 그리고 자유로운 삶이다. 본 작품의 3부에 거쳐서 '청소'하는 행위가 반복된다. 영화의 시작,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수용소로 추정되는 건물의 실내에 사람들이 입장한다. 존더코만더(나치에 의해 강제로 학살을 수행하거나, 시체를 소각해야만 했던 유대인 특수 작업부대)일까, 아니면 1부의 막바지에서 러시아어가 들리듯 소련 점령군일까. 그들은 물을 가득 채운 양동이를 들고 등장한다. 또 술인지 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여하간 어떤 액체를 뿌리고 물청소를 시작한다. 벽과 바닥을 박박 문지른다. 흡사 수용소의 흔적을 지우듯이, 이러한 흔적에서 ‘멀어지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청소부들은 아무 말도 없다. 2부와 3부는 대화가 영화의 중심이기에, 흔적을 지우고 내뱉지도 않는 1부의 적막이 대비를 이루며 강조된다. 이후 2부에서도 청소와 유사한 말소 행위가 등장한다. 흔적을 지우려는 군인들의 청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던 아기 에바, 하지만 2부에 그녀는 늙고 노쇠하여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또 레나와의 대화나 용변 실수로 보건대, 그녀는 ‘치매’를 앓고 있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청소’되고 있다. 또 그녀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에서도 청소는 등장한다. 유대인인 그녀의 어머니에게 낙태하라고, 아기를 낳으면 익사시키거나 교살하라고 주변에서 강요했다. 에바는 유대인이 청소되어야만 했던 시대를 버텨왔다. 그런데 유대인임을 부정하고 유대인의 인종적 특질을 말소하는 청소가 작금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2부에서 레나는 학창 시절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괴짜 소리를 들었고, 3부에서도 학교의 게르만계 학생들은 유대인이나 무슬림을 괴롭힌다. 이에 3부에서 요나스는 좀비로 분장하고, 가면을 쓰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현실에서 유리된다. 살고 있지만 온전히 제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유대인의 처지를 흡사 좀비로, 유대인의 민족성을 은닉해야 하는 상황을 가면으로, 이에 현실에서 청소되는 상황을 상징한다. 2부에서 집안 곳곳에 누수가 발생하여 출생증명서와 에바의 기록을 훼손하지 않던가. 이후 3부의 시작이 방화인 것처럼, 여전히 독일 사회는 유대인의 흔적을 불태우는 것이 아닌가.     


영화는 청소를 위해서 활용되었던 요소들이 계속 이어진다. 1부에서 청소하기 위해 사용했던 ‘물’이 2부의 누수 장면에서 중요하게 활용되고, 가루 또한 담뱃재의 형태로 반복된다. 2부 말미, 에바가 용변 실수를 하자 레나는 대변을 화장지로 급하게 치운다. 바닥은 깨끗해졌다. 하지만 화장지에 에바의 배설물이 묻어있다. 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용소의 벽과 바닥은 깨끗해졌을지 몰라도 물은 그날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 2부에서 물을 트는 레나에게, 3부에서 손을 씻는 요나스에게 이어지리. 이러한 이어짐이 역사를 말소하고 민족을 청소하는 야만이 끝끝내 끊지 못한 '진화'다. 이는 1부에선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려진다. 청소부들은 흔적을 지우느라 바쁘다. 그런데 벽과 바닥을 청소하는 와중에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검고 긴 줄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벽이나 바닥의 균열에 숨어있는 머리카락, 희생자들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 머리카락, 이윽고 일반적인 길이의 머리카락보다 훨씬 더 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머리카락 뭉텅이도 발견된다. 역사와 희생자들을 차단하고 숨기는 단단한 벽이라 할지라도 구멍은 발생하고, 거기에 선조와 자손을 잇는 머리카락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 이윽고 길고 긴 머리카락이 물웅덩이에 빠지니, 그것은 흡사 호흡하듯 뽀글뽀글 거품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머리카락이 가득한 공간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아기가 바로 에바다. 홀로코스트 당시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에바는 역사의 야만을 머리카락처럼 모두 기억한다. 청소하고 침묵하던 1부, 이와 달리 2부는 매우 수다스럽다. 홀로코스트 당시 부모님과의 기억, 소련 점령 시절과 스탈린에 대한 회상, 통역가로 일했던 추억 등을 2부 전체에 거쳐 얘기한다. 1부에서는 머리카락이 선조와 후손을 이었다면, 2부에서는 에바의 무수한 얘기를 레나가 듣고 카메라가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후 세대로 이어질 진화를 포착한다. 한편 그렇게 이어지는 것은 끈질긴 삶, 민족적 특질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유대인의 부를 갈취하던 야만이 3부에서도 요나스의 돈을 뜯는 독일 학생들의 형태로, 즉 ‘이데올로기’도 길고 긴 머리카락처럼 이어진다.       


3부에서 레나는 박물관의 컨저베이터와 사귀고 있다. 박물관의 유물을 ‘보존’하는 컨저베이터, 그런데 이들이 박물관에만 있을까? 본 작품의 곳곳에서 컨저베이터들이 발견된다. 학교에서는 성 마르틴을 기념하는 기독교 행렬이 열리며 전통을 보존한다. 또 2부 에바와 레나의 불화가 3부에서 요나스와 레나의 언쟁으로 이어진다. 유년기의 기억, 부모와의 관계, 지금까지 기억해 왔던 것들이 맹목적으로 보존된다. 하지만 문드럭초는 언제나 그랬듯, 이로부터 일탈한다. 일탈의 대상은 과거다. 2부에서 에바와 레나는 두 개의 시간을 산다. 레나가 에바에게 '엄마, 지금 언제, 어디에 계시는 거에요'라고 묻듯, 하나의 시간은 과거다. 에바가 과거부터 살았던 아파트와 기억을 말하는 에바의 발화 위에서 레나가 산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레나는 현재 담배를 피우고 오렌지를 먹으며, 창문을 열고 현재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과거는 이어지지만, 마냥 붙잡히지 않고 새로운 현재와 뒤섞인다. 문드럭초는 이를 '혼종성'으로 표현한다. 요나스는 학교에서 사귄 무슬림 여자친구, 야스민이 키우던 햄스터가 사망하자 그를 묻어준다. 햄스터의 종은 중국 햄스터다. 하지만 햄스터는 독일에 살았다. 그래서 중국 햄스터라는 종의 특질을 간직함과 동시에, 독일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축적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돌연변이’와도 같은 상태, 요나스도 그렇다. 자신의 몸에는 에바와 레나를 거쳐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베를린에서 줄곧 생활하고 독어를 사용하는 그는 자신을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즉 우리는 과거를 간직하지만, 마냥 그것을 따르지 않고 이를 밀어내며 새로운 것을 채운다. 요나스의 마지막 '젖니'가 빠져, 새로운 이가 빈자리를 채워낼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이어진 부모와 자식의 불화,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발생한 냉랭한 관계 또한 밀어내고 일탈해야 한다. 오랜 과거부터 이어진 성 마르틴 행렬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유대인이자 무슬림인 그들이 행렬이라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이념 또한 극복한다. 3부 막바지의 하늘에서는 무리에서 뒤처진 비둘기 한 마리가 포착되었다. 하지만 무리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홀로 뒤따라간다.     


우리는 지금의 나를 이루는 종의 특징, 민족성, 역사를 따라가되, 맹목적으로 그것들의 일반성을 따르진 않는다. 현재의 우리는 사랑을 한다. 과거라면 유대인은 유대인을, 무슬림이라면 무슬림을 사랑했겠지만, 이제는 유대인 요나스와 무슬림 야스민, 서로에게 눈이 간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계승되는 이어짐이 진화라면, 마찬가지로 다원화된 선택 또한 제목의 진화에서 기인한 ‘성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독일에서 따돌림당하는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생존에 부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생존에 부적절해 보임에도 독일에서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성 선택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또 진화에서는 단일하고 일정한 유전자의 결합이 아니라, 무수하고도 산발적인 유전자의 결합으로, 하나의 환경에서도 다양한 선택이 가능함을 입증하니, 우리가 살아남고 자손을 퍼뜨리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생하고자 한다면 이를 거스를 필요는 없으리. 유대인과 독일인도, 유대인과 무슬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문드럭초는 2차 대전을 청소하는 야만으로 규정한다. 추접하고 낯부끄러운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그렇게 추한 것을 지워서 아름답게 만들려고 하지만, 추한 것을 청소하면 더 추악한 것들이 드러나는 법이다. 청소는 마땅히 더 추한 것을 직면하기 위한 의례여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추의 외면이 아니라, 추한 것을 인지하여 반성하고 극복하여 이어내는 과정이어야 하리. 그렇게 과거와 추로 이어진 우리는 진화로 과거를 살아감과 동시에, 진화하기 위해 현재를 산다. 우리는 기억하는 시간과 사랑하는 시간, 두 개의 시간을 산다. 2차 대전과 진화를 엮는 문드럭초는 최근 <화이트갓>이나 <주피터스 문>에서 보인 장르성 대신, <그녀의 조각들>에서 보여준 진지한 양식으로 이를 풀어낸다. 하지만 그의 기상천외한 상상력 또한 1부의 상징성이나 2부 말미의 초현실적 누수에서 묻어난다. 다만 본 장면들을 제외하곤 노곤하고 지난하며, 대화를 통해 내용에 집중하는 극을 지향했다면 좀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1부는 상징성과 감각, 그리고 깊이 모두가 충만했지만, 대화가 중심이 되는 2부와 3부가 오히려 1부에도 미치지 못하고 덜 흥미롭다는 오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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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17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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