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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3. 2022

나빌 아우크, <카사블랑카 비트>

말하고 행동하기, 말하기 위해 행동하기

나빌 아우크(Nabil Ayouch), <카사블랑카 비트>(Casablanca Beats) 

- 말하고 행동하기, 말하기 위해 행동하기     

“양심과 신념의 이름으로 권력자에게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인간의 영적 발달이 가능했다.” -에리히 프롬-

힙합: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아프리카 및 카리브계 흑인들에 의해 발전된 음악 장르다. 오늘날에는 미국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다른 음악 매체와 뒤섞이기도 하였으며, 형식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초기 힙합은 백인에 의해 소외된 미국 내 흑인들의 전통 및 문화를 보존하고, 정치·사회·경제적 현실을 반영하면서 발전된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힙합은 자전적인 삶과 솔직한 감정을 박자, 리듬에 맞춰 반영한 가사가 기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힙합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향한다. 그리고 흑인 남성 중심으로 펼쳐지던 힙합이 모로코의 젊은 여성들의 입에서 펼쳐진다. 이를 담아낸 나빌 아우크의 <카사블랑카 비트>는 힙합으로 모로코 여성들의 주체성과 언어, 그리고 스스로 얘기하는 삶을 되찾고자 한다. 1969년 파리 태생의 나빌 아우크는 프랑스계 모로코인 영화감독이다. 튀니지계 유대인 어머니와 모로코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이혼한 이후 모로코인으로서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그의 영화는 대단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사회적 비판의식을 아이 영화와 여성 영화를 통해서 풀어내는데, 2010년대 중후반의 작품은 후자에 집약되어 있다.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자 배우인 마리암 투자니도 <아담>으로 감독 데뷔를 하며, 모로코 내 성 차별, 여성 문제를 부부가 함께 꼬집고 있다. 먼저 그의 초반 커리어를 장식한 아이 영화부터 살펴보자면, 아우크는 항상 아이들을 ‘달아나는 존재’로 그린다. 장편 데뷔작 <내 친구 알리>의 소년들은 달아나서 선원이 되고 싶고, 나침반을 들고 자신이 직접 갈 곳을 선택하고 싶다. 아이들에겐 감금, 유폐가 일상이요, 부모와 보호자들은 헛된 꿈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들은 탈출하고, 망상을 실현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구원은 비록 살아생전이 아니라 내세에서나 가능하지만, 구원을 위한 장례를 계기로 서로 연대하는 과정을 그려내며 사회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제안한다.      


이후 2012년 발표한 <신의 전사들>에서도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이며, 이번에는 원리주의 이슬람 문제를 진단한다. 아이 영화로 시작되지만 영화 중반부에 아이들은 성인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회적으로 아이다. 아우크는 <내 친구 알리>에서처럼 부랑자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상정하여 낙오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진단한다. 아우크 및 중동 감독들의 특징적인(감독의 전작인 <내 친구 알리>에서도 사용되고, 나딘 라바키도 <가버나움>이나 <카라멜>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심지어 급박한 상황의 <사마에게>에서도 널리 이용된 바 있는) 버즈아이 뷰, 익스트림 롱숏으로 낙후된 카사블랑카를 비춘다.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고, 어른들이 계급으로 나뉘듯 패거리를 이뤄 서로를 구분한다. 가난한 아이들이 언제나 수세에 몰린다. 성인이 되어도 이는 극복되지 않는다. 어렸을 적 겪은 일들이 성인이 돼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도망가기, 착취당하기, 겁탈당하기…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에 갈증을 느낀다. 이슬람 사회는 강한 이성애 남성을 주문한다. 그래서 소년들은 언제나 약한 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호모'라 모욕한다. 그렇게 동성애자나 여성들을 낮추고 비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성애자 남성일 뿐인 자신을 드높인다. 하지만 이성애자 남성 모두가 동등하지 않다. 주인공은 또래인 부유한 소년, 성인이 되어선 사장에게 강간당한다. 몸이 장성하자 가장이 되고 싶지만 여전히 사회에선 아웃사이더다. 그래서 이들은 '강한 남성'을 만들어주는 근본주의에 끌린다. 아우크는 아이 영화를 통해 이슬람 문화권 외부에선 알기 어려운 근본주의로 이끌리는 심리를 추적한다.

이후 2010년대 중후반에 발표한 <머치 러브드>와 <라지아>는 아우크의 여성 영화 경향을 보여준다. 일단 <머치 러브드>에서는 매춘부의 시선에서 모로코 내 젠더를 탐구한다. 불법적인 성 매수자와 합법적인 경찰 및 남자친구,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매춘부와 합법적인 어머니, 각각은 합법과 불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성 매수자들처럼 남자친구도 여자 친구와 섹스 이후 돈이 오가고, 이를 판단하는 남성 경찰 또한 매춘부들을 강간하기에 행위의 본질에 별 차이가 없다. 남편으로부터 생활비나 집세를 받지 못한 어머니들은 다른 남편, 가장들과 관계를 맺으며 돈을 벌기 때문에 양자는 사실상 같거나, 여성은 두 지위를 동시에 가진다. 경제적으로 남성에 종속된 여성들은 언제나 어머니이자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으며, 임산부인 한 여성도 매춘을 그만둘 수 없다. 그녀들의 언어는 언제나 남성을 의식하거나, 남성의 제안이나 질문에 답변하는 수동성을 띤다. 여성은 남성을 위한 성으로 만들어지고, 남성들은 여성을 지배하는 이성애자로 만들어진다. 한 남성은 자신이 게이임을 부정하기 위해 여성과 성매매한다. 또 남성의 여성 착취를 넘어서, 경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의존하는 모로코, 유럽에 의존하는 중동 등 후기식민주의적 언급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아우크는 이에 저항하여 성 소수자임을,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순수한 성으로 나아감을 긍정하며, 이를 위한 여성들 간의 순수한 '연대'를 강조한다.    

  

<라지아>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하고, 현재의 카사블랑카에 머무는 다섯 주인공의 이야기를 흡사 옴니버스처럼 이어내는 작품으로 로버트 알트만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의 초기 스타일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두 개의 시간, 여러 주인공의 다양성을 무슬림 국가가 요구하는 하나의 언어인 아랍어, 하나의 체계인 신학으로 축소시키는 일원화를 비판한다. 보편성을 강요하는 체제, 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여성, 성 소수자 등은 괴롭다. 하지만 아우크는 끓어오르는 주체성의 분출, 저항을 역설한다. 지배 세력에게 반기를 들며, 미니스커트나 낙태, 사랑, 꿈을 포기하지 않으며 말이다. 이러한 아우크의 영화는 언제나 현실이나 하나의 매체에만 얽매지 않는다. <내 친구 알리>에서는 영화가 포착하는 현실을 넘어서 '그림'에 담긴 유토피아적인 섬을 갈망했고, <신의 전사들>에서는 현실 너머의 '천국', '구원'을 갈망했다. 현실에서 축구나 연인을 바란 저항은 모두 좌절, 교도소로 이어지며 실패한 채 말이다. <머치 러브드>에서 픽션에 놓인 여성들이 갈망한 것은 다큐멘터리로 기록된 모로코 거리의 평범한 일상, 현실이었다. 누구에게는 현실이지만, 그녀들에게는 다른 차원인 다큐멘터리 숏을 그리워했다. 또 모로코를 넘어선 여행이 그녀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본 신작 <카사블랑카 비트>에서도 여성들은 성차별적 현실을 음악으로 초월한다. <머치 러브드>부터 여성들은 수동적 언어, 남성을 의식하는 언어에서 저항적이고 솔직한 언어로 나아갔듯, 신작에서도 일상과 다른 언어, 리듬, 박자를 갖춘 힙합으로 저항을 도모한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아우크는 이번 작품에서도 리얼리즘을 지향한다. <머치 러브드>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실제 거리 풍경을 도입에서 포착한다. 그리고 영화 속 랩을 배우는 학생들은 대다수가 비전문 배우요, 배역은 실재를 반영한다. 랩을 가르치는 교사인 아나스 바스부시 또한 모로코의 랩퍼로서, 아우크는 영화에서 말하는 바처럼 힙합과 예술을 통해 배우들의 실제 삶과 현실을 뒤바꾸고자 한다. 영화는 픽션임과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경계선에도 일부 걸쳐져 있는 작품이다.     


아우크가 추구하는 현실의 변화, 이는 국가, 사회, 종교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얼굴, 개성을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이를 연출로 보여준다. 영화는 소재인 힙합이 배경음악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선생 아나스는 랩에 자신을 반영하고, 이를 위해 직접 행동하고 움직이고 표출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자전적이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힙합이 계속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지만, 정작 모로코 내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배경음악은 힙합이 흘러나오지만, 롱숏으로 포착된 빈민가의 풍경에서 어떤 개개인이 살고, 그들 각각의 삶이 어떠한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아우크는 그들 모두의 삶이 드러나길 바란다. 감독은 적게나마 비전문 배우들의 삶을 반영한 가사, 그들의 감정과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사회, 공동체, 전체에 파묻힌 개개인들의 익명적 초상을 생생하게 회복한다. 이는 영화의 ‘색’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 속 카사블랑카의 풍경은 황토색, 옅은 갈색, 회백색으로 가득하다. 칙칙하고 운동성도 없으며 건조한 색깔, 이러한 삭막한 세상에 그래비티 하며 물기가 많은 물감이 칠해진다. 단일한 색채, 제한된 의복으로부터 다양하고 반짝거리는 원색, 개개인의 개성을 표출하는 의상으로 나아가며, 신원이 드러나지 않던 세상은 서서히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랩이 입에만, 행동하지 않는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길 바라는 아우크와 아나스, 그들은 랩이 현실에 반영되고 영향을 끼쳐, 현실과 걸쳐진 풍경이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즉 본 작품은 현실을 더 낫게 바꾸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허황하거나 가상의 양식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형식에 현실적인 찬란함을 부여한다. 영화의 연출은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결합한 양식이 주를 이룬다. 핸드헬드는 현실의 거친 발걸음과 시선에 상응함과 동시에, 영화 도입부에서 문화센터로 가는 길을 잃은 아나스의 불안한 상황이랄지, 여전히 휘청거리는 청년과 여성의 상황에 상응하리. 이러한 현실의 핸드헬드가 인간의 운명이라면 탐미적으로 뒤바뀌어야 하리. 이들이 랩을 하기 시작하며 핸드헬드는 흡사 비트의 박자, 몸놀림에 맞춰서 흔들리는 것 같고, 이러한 흔들림에 그들의 래핑을 강조하는 줌인이 사용되며 심장이 쿵쿵 뛰는 것만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자비에 돌란의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사용된 줌인처럼 말이다.     


그리고 영화 초반, 현실의 시간처럼 자르거나 나누지 않고 보존하는 롱테이크는 항상 아나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포착했다. 이후 강의가 시작되고 아나스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생들의 얼굴을 포착하기 위해, 롱테이크 대신 편집으로 개개의 얼굴을 짧은 숏에 나누어 시퀀스를 구성한다. 롱테이크에서 잦은 편집으로의 나아감은 힙합을 통해 화자와 청자가 만나는, 그렇게 인식과 관계를 확장해가는 상황을 가시화한 것이랴. 이에 문화센터로 향하기 위해 운전하는 아나스를 평평하게 측면에서 포착하던 카메라도, 수직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개개인의 정면을 포착한다. 측면도 뒤도 아닌 정면에서 랩을 하고 자신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는 힙합, 그것의 기원과 역사, 목표를 강의하는 첫 번째 수업이 끝난다. 이후 두 번째 수업에서 학생들은 직접 가사를 써온다. 하지만 아나스는 영 못마땅한 심기다. 학생들이 ‘바라는 자신’은 그려져 있는데, 정작 지금의 ‘솔직한 자신’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나스는 항상 '배짱'을 가지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한다. 가사에 자신이 더 나은 모습, 발전한 모습을 담고 싶으면, 배짱을 갖고 그렇게 행동한 이후에 담으라는 바다. 그래서 영화는 힙합이 분출되는 '입'만 주목하지 않는다. 입에서 힙합이 흘러나온 여파가 손과 발과 몸의 전 부위로 옮겨가는 그래비티, 춤, 패션 등을 함께 주목한다. 그렇게 입에만 머무르지 않고 몸과 행동을 직접 뒤바꿈에, 예술은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수용자보다도 예술을 창작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말한 대로, 말하기 위해서 용기 있게 행동하며 말이다. 이에 여성의 주체성에 관해 랩 하는 여학생들은, 더 이상 가족이나 남자친구의 간섭에 불응한다. 한 여학생의 보호자는 학교에 와서 그녀를 빼 오려고 한다. 보호자들이 기대한 보수적인 수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학생은 다음날 다시 돌아와서 자의로 수업받는다. 그리고 여성의 용기, 주체성, 자유에 대한 랩을 한다. 또 메리엠이란 여학생의 하굣길에 남자친구가 찾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하지 말라며, 철길을 가로질러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정해져서 결코 이탈할 수 없는 철길을 기차처럼 고스란히 따르는 게 아니라, 이를 가로지르고 전복하며 여성이 되찾고 싶은 주체성을 몸소 실현한다.     


이렇게 랩은 여성을 바꾼다. 그리고 바꾸는 것은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스마일이란 남학생은 아우크의 <신의 전사들>과 같은 작품에서 포착되는 청년들의 전형이다. 권위적인 가장이 여전히 어머니를 매질한다고 언급되고, 아버지의 호흡과 질서가 집을 빡빡하게 채우고 있어 자신의 나이에 비해 문제가 너무 많고 미래는 어둡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를 잊어버리고 싶어서 랩을 한다. 이를 집에서 웅얼거리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바깥으로 뛰쳐나와서 노래해 본다. 그렇게 ‘잊고 싶다’가 아니라, 직접 '잊음'을 실천하며 랩은 청년이 되살리고 싶은 용기의 장작이 된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압두는 매우 독실한 무슬림이다. 이슬람에 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은 있는 것 같지만, 권위적인 이맘들 곁에서 제 신념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다. 하지만 압두는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종교, 현대에 어울려 변화하는 종교를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압두 또한 랩을 한다. 압두가 랩을 하는 장면에서 그는 역동적으로 움직이지만, 다른 이맘들은 그가 랩 하기 이전 상태로 정지한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 전통과 타인에게 배짱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으로 살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예술을 통해 내 생각과 신념을 직접 행동하고 표출하는 자만이, 예술로 현실을 뒤바꿀 수 있다. 이렇게 표출하는 나는 ‘정치적’이다. 학생들이 솔직하게 표출하는 감정은 주로 부당하고 억울하며 분노에 가득 차 있다. 그들의 표현은 교우관계, 가정환경, 종교, 이념, 구조 속에 놓였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원인, 랩의 이유를 묘사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요인이 서술된다. 이스마일이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사회와 유리되어 있지 않으며, 여성들이 용기와 배짱을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자신이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항상 접하고 보는 것은 현실, 그것을 가사에 반영함에 자연스레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개인은 보편성, 다수, 공동체와 구별된다. 영화 중반부에 아미나가 랩을 하려는 장면, 학교 외부에서 종교와 관련된 설교가 울려 퍼진다. 아미나는 그 외부 소음이 지나가자 랩을 시작한다. 외부 종교나 사회로부터 다른 나를 묘사하는 과정, 양자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나는 정치적이다.    


이러한 개인들은 학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처음에는 문화센터에만 놓였다가 이후에는 인근의 무대, 골목에서 랩을 하고, 이윽고 그들의 랩이 더 멀리 퍼져나갈 수 있는 녹음실, 마을 곳곳의 골목길, 콘서트장, 옥상으로 반경을 넓혀간다. 이들은 랩을 허용하는 문화센터뿐만 아니라, 그것이 금기시되거나 불경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도 이를 수행하며 정치성을 띤다. 사회와 나를 구분하는 과정, 이를 사회에 표출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영화 초반부, 옥상에 놓인 아나스를 포착하는 숏에서 기도하는 다수는 같다. 모두가 똑같은 시간에 유사한 옷을 입고 공통된 거리에서 동일한 행위를 한다. 하지만 랩을 하는 학생들은 옷도, 가사도, 인생도 모두 다 다르다. 그렇기에 모두가 동일한 공동체와 달리, 다양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에서는 토론, 관용, 수용을 강조한다. 영화의 도입부, 이들은 힙합을 어설프게, 뭣도 모르고 시작하지 않는다. 아나스가 힙합의 기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것이 모로코와 유사한 종교·문화권 국가인 튀니지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힙합을 존중하지 못할 것이요, 행위가 어떤 파장과 책임을 불러올지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잘 청취하고 숙지하여 잘 알게 된 외국의 문화를 수용한다. 이후에는 강의 대신 학생들 간의 토론이 두 번 가량 펼쳐진다. 하나는 예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는 주제, 다른 하나는 이슬람과 여성에 대해서 토론한다. 누군가는 예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아니라 주장한다. 누군가는 자칫 잘못하면 감옥에 가기 때문에 두렵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와 관련해선 남성과 여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들의 의견은 과열된 듯 보여도 결국에는 서로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으며, 각자가 얘기할 수 있는 장, 힙합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무대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랩을 비웃지 않는다. 가수가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랩 할 수 있도록 들어주고, 비트를 넣어준다. 콘서트장에서도 아나스는 청중들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가 아니라, 부드럽지만 카리스마 있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말한다. 서로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에서 공연을 시작하고, 가수의 랩과 청중들의 다양한 들썩임에 공연장은 활기가 돈다.     


이렇게 아우크는 토론이나 무대를 통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청취하며 내 의견 또한 주장하는, 랩을 할 수 있는 태도와 환경을 역설한다. 일상과 학교에서의 토론, 콘서트장에서 화자와 청자의 태도는, 금기가 많고 남과 여는 섞일 수 없다고 말하는 관용 없는 일신교를 비판 및 반성하는 태도다. 누구나 다 랩을 할 수 있으려면 부당한 금기는 적어야 하고, 표출한 개인들은 사회에 포용 되고 뒤섞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드러난 상대방을 보며 나도 변화한다. 힙합에 가장 소극적이었던 압두는 다른 학생들, 특히 이슬람 교리에 억압받는 여성들조차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움츠러든 자신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자유로운 여성들을 가해자로 만들고, 이를 유린하거나 희롱하는 남성들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이슬람 교리를 뒤집어서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소통은 서로를 변화시키는데, 이는 종교나 국가, 보호자들의 지배에 따른 변화와는 다르다. 후자는 학교에서 내쫓고 여성을 억압하며 콘서트장에 침입해 자유로운 표현을 방해하는 등 억지로 변화시킨다. 그들은 대상을 있는 그 자체로 보지 않는다. 자신이 기대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이를 위해 강제로 뒤바꾸려 한다. 하지만 아우크는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 제 인생을 자신이 지배할 것을 내내 역설한다. 내가 스스로의 지배자가 되어 수용하고 싶은 문화를 배우고, 상대방의 규칙과 나의 규칙은 구별하여 전자로부터 후자를 지켜간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온 아나스는 센터의 규칙보다 강사로서 자신의 규칙을 우선한다. 그는 고정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차’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자신이 봐야 하거나, 선택한 길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집으로서 차를 말이다. 그렇게 제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신이 된다. 앞서 언급한 무수한 신도들이 단체로 예배하는 장면에서 아나스는 높은 건물의 옥상에 있었듯, 아나스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제 자신의 지배자가 된 학생들도 옥상에서 랩을 하며 마무리된다. 더 이상 자신을 하이앵글로 굽어보거나 내려서 보지 않는다. 높은 곳에 놓여 로우 앵글로 영웅적으로, 웅장하게 포착된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지배한다는 것은 신이 되는 것, 이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해방은 단번에 끝나 영속되지 않으므로. 해방되면 또다시 누군가는 붙잡으려 하기에, 저항은 끝나지 않고 내내 시작되는 행위다. 무수한 신도들이 예배하는 와중에 아나스는 이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옥상에 놓여 종교 대신 자기 얼굴에 클로즈업으로 밀착하듯, 우리는 항시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 외부의 영향력에서 달아나야 한다. 타인과 소통하되, 그들은 가장 가까운 나보다는 멀어야 한다. 타인을 나 자신으로 보는 것도 야욕이다. 나는 언제나 클로즈업이요, 공동체나 종교, 사회는 롱숏이어야 한다. 이렇게 아우크는 랩을 통해 우리 시대의 능동적인 신을 이야기한다. 전능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신이 아니라, 제 자신을 관장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신들을 말이다. 자신을 지배하는 신들은 타인을 지배하지 않는다. 타인 또한 제 자신을 스스로 지배할 것이기에 관용적이다. 이러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청취하며, 그렇게 스스로 이해하고 경험한 것들이 제 자신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은 현실을 변화시킨다. 단순히 보고 창작하고 머무르는 가식 수준이 아니라, 예술에 바라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직접 행동하고 움직이며, 그렇게 배짱 있는 예술가와 감상자에 의해 현실은 변화한다. 언제나 사회적인 의의를 가진 작품을 연출하는 아우크, 개인적으론 지금까지의 작품 중에서 본 작품이 제일 좋다. 사회묘사나 저항의 결과가 더 깊게 묘사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간 아우크의 작품 중에서 개개의 숏들이 가장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의 숏들은 중반부만 지나도 초반부에 다루고 말한 것을 구구절절 되풀이했기 때문에 지난했다. 또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으나 영화나 예술의 역할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매력과 감각성이 반감되었다. 지나치게 예술 외부에 의존하였고, 그마저도 깊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본 작품은 사회성에만 천착 되지 않은 채 예술의 역할과 관계를 탐구하고, 이를 감각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의 작품 중 과감하고 도발적인 감각이 흥미로웠던 <머치 러브드>처럼 말이다. 그마저도 대상에 집중하던 <머치 러브드>보다, 형식적 모색이 균형을 이뤘다는 점에서, 처음으로 그에게서 시네아스트로서의 기지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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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23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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