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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5. 2022

홍상수, <소설가의 영화>

내 입은 그의 언어를 말한다

홍상수(Hong Sang soo), <소설가의 영화>(The Novelist’s Film) 

- 내 입은 그의 언어를 말한다  

“사고가 자유로워지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

서사는 사건, 과정, 상태, 연쇄 등을 재현하는 시간적, 인과적 관계를 지칭한다. '서사하기'란 시간적/인과적 관계를 명료하게 기술하는 확장된 재현적 활동을 뜻한다. 일반적인 서사는 역경이 제시되고 그것을 극복하며 관객에게 적절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서사는 사건이 인물의 목표나 필요에 따라 목적론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고, 또 어떤 인과적 역할을 맡는 지를 밝힌다. 그래서 목적론적·인과적으로 유의미한 서사란 곧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상호믿음원리’에 기인하여 작가와 감상자가 '허구적 참'으로 서사를 믿는다. 그래서 서사는 분명 허구지만 그것이 현실이자 삶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서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른나라에서>, <풀잎들>, <강변호텔>이 대표적이다. 홍상수의 서사에는 그리 극적인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나라에서>의 글을 쓰는 사람은 정유미가 연기하는 학생 원주다. 그녀는 빚에 쫓겨 모항으로 내려왔다. 이후 원주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온 안느라는 여인의 세 가지 모습을 상상한다. 창작자, 비밀리에 밀회를 즐기는 여자, 수동적으로 남편을 빼앗긴 여자, 세 가지 안느는 모두 프랑스의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다. 같지만 분명 다른 여인, 하지만 세 모습의 안느가 분리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원주는 자신이 모항으로 향한 처지나 욕망에서의 수동성, 이와 대비되는 자신의 이상을 다각도로 고찰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안느의 이름과 배우도 똑같고, 유준상이 연기하는 안전요원도 그대로 등장한다. 또 소설 외부에서 글을 쓰는 원주도 등장한다. 존재는 같지만 소설을 통해 다른 존재자를 엿보고, 또 작가가 소설에 들어가서 자신이 투영된 안느라는 페르소나를 직면하여,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여러 존재자를 고찰해본 것이랴. 소설에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홍상수의 작품이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서사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영화임을, 즉 허구성을 언제나 드러낸다. 조야한 줌인, 요즘은 사용되지 않지만 비선형적인 편집, 이에 무정형으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꿈과 현실의 거친 오고감…     


하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현실에 맞닿아있다. 언어는 현실의 객관적·실제적인 것들의 순서를 모방하여, 머릿속에 있는 상들이 엄격하게 인과적인 순서로 이어지게 만든다. 이를 다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언어의 목표 지향적 사고다. 만약 명백히 허구임을 지향하는, 환상적인 유형의 사고를 바란다면 언어는 현실을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그가 존경하는 세잔의 모더니티를 영화로 옮겨오는 듯한 작위성이 없지 않지만, 이와 달리 그의 언어는 현실로 되돌아가기에 충분하다. 가장 근작인 <당신얼굴 앞에서>만 하더라도 수도권에 불거지는 부동산 문제가 언급된다. 또 <다른나라에서>의 배우들의 즉흥적인 애드립, <강변호텔>에서 우연하게 튀어나온 고양이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렇게 이상적인 각본을 현실에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각본이 놓이게 될 불완전한 지상을 고스란히 긍정한다. 그렇게 홍상수의 언어는 영화임을 의식하게 만드는 투박한 어법으로, 결국 현실을 모방한다. 그래서 다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다. 일상의 풍광들을 섬세하게 주목하여 이를 글로 옮긴 <풀잎들>이 그렇지 않던가. 또 <강변호텔>의 소설가인 영환은 '이카'라는 가상의 원리를 만든다. 이카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조직 내지는 이념이다. 이분법적으로 속한 사람과 속하지 않은 사람이 나뉜다. 소설 속 두 여인은 아름다운 한 덧니 소년을 이카에 데려왔다. 그리고 이카 조직은 너무도 아름다운 소년이 이카에 머물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유를 구속하니 아이는 아름답게 자라지 못한다. 허구의 이야기, 하지만 소설에서 이카라는 원리가 구속하듯, 현실에서 마찬가지로 지배되는 아들들과 여자들이 등장하지 않던가. 또 영환은 자신이 가상의 질서를 만드는 소설가임과 동시에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에게 속하는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이 나뉘지 않던가, 죽음을 앞둔 그에게서 자신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 이카에 종속된 덧니 소년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영환의 이야기는 시적이다. 시는 일반적 언어와 다른 고유의 문법을 지향하기에, 영환만의 세계에 놓인 인물과 조직을 지칭하는 고유의 단어 및 개념은 완벽한 바꿔쓰기가 불가능하다.     


이와 동시에 시는 그를 둘러싼 현실과 분명 유사하다. 그래서 현실로 되돌아가는 언어는 <다른나라에서>의 원주에게로, <강변호텔>에서는 지상으로 되돌아간다. 언어, 서사, 그리고 시, 홍상수는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감독이다. 이러한 그가 페르소나로 ‘소설가’를 전면에 내세운 신작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의 지론은 더욱 선명히 드러나리. 일단 본 작품의 구성은 <도망친 여자>와 <인트로덕션>을 합쳐놓은 것과 같다. 주인공인 준희가 후배 세원을 재회하고 관계를 확장해가는 서사 구조는 <도망친 여자>를, 값싼 디지털카메라와 흑백이 결합한 형식은 <인트로덕션>을 떠올리게 만든다. 본 작품의 흑백, 일단 아주 새하얗다. 선명하기보단 불확실하고, 디지털이라기보단 아주 값싼 필름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낡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낡고 오래된 과거를 지칭하는 듯한 매체성은 영화 속 '재회'에 상응하리. 본 작품에서 준희는 후배 세원, 작품을 함께 하기로 했다가 틀어진 박 감독 부부, 선배 만수와 항시 다시 만나기에, 재회는 본 작품의 전체를 관통한다. 그렇게 재회한 그들은 서로의 기억에서 달라졌다. 세원은 터를 옮겼고 더 이상 글도 쓰지 않으며 살도 쪘다. 박 감독 부인이 말하길 감독의 작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고, 또 그들 스스로가 말하길 이전과 달리 많은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영화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또 만수는 준희가 보기에 많이 늙었다. 준희의 뇌리에서 이전에 알던 세원은 글도 썼고, 박 감독은 일이며 돈이며 명예며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정력적이었으며, 만수 또한 더 불같았고 열정적이었다. 준희는 분명 그들을 안다. 하지만 과거에 알던 그들의 요소는 지워지고 빛바랜다.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본 듯한 본 작품의 흑백은 과거에 알았지만, 현재에 달라진 대상을 마주하는 우리의 의식과 눈에 상응하는 것만 같다. 분명 대상을 아는데 오롯이 다 알지는 못한다.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보니, 기억과 많은 부분 일치하지 않고 일부는 잃어버린 것만 같다.     


또 건물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연출에도 주목해야 한다. 책방이나 분식집 안에서, 유리창 너머의 외부는 아주 새하얗다. 영화의 조야한 카메라는 외부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재를 모르고, 내부에서 외부를 모른다. 이렇게 현재는 불투명하고 외부는 새하얗지만, 내부는 선명하고 아주 꽉 차 있다. 준희가 세원의 책방에서 담소와 수다를 나눌 때, 길수에 의해 우연히 다시 돌아와서 술을 마실 때, 영화의 짙은 명암은 공간과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외부의 새하얀 풍경, 아스라한 대상이 무(無)에 상응한다면, 내부에서 재회하고 알아갈 때 유(有)를 지칭하는 뚜렷한 빛과 어둠이 가득 채워진다. 이윽고 본 작품의 결말에서 준희는 영화를 완성한다. 처음에는 본 작품처럼 흑백이지만, 이윽고 꽃의 오색찬연한 진실, 예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컬러로 전환된다. 우리의 관념으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고, 대상 그 자체의 색과 아름다움을 알았을 때, 이에 걸맞은 풍요로운 빛과 어둠, 색채가 채워지는 매체로 변환한다. 하지만 우리는 흑백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알다가도 늘 기존의 색을 잃고, 또 멀어져서 서로에게 새하얀 무가 되기 때문이다. 세원과 잠시 만났다. 하지만 약속이 있어 다시 가야 한다. 이후 박 감독과 대화하는 준희, 길수는 불편하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앎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떠나간다. 길수는 준희와 함께 밥을 먹다가도, 잘 모르는 소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이를 해결하고자 준희의 눈에서 멀어진다. 그 잠깐의 길수를 준희는 모른다. 준희의 영화에서도 두 여성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심지어 서서히 멀어져간다. 상영관 밖에선 담배 피우는 준희에게 경우와 영화관 직원은 멀어지며,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되돌아와 극장을 나오는 순간에도 영화관 직원과 길수는 서로 들어가야 하는 문이 다르기에 간극은 벌어진다. 영화는 이러한 멀어짐을 롱숏으로의 전환,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연출을 통해서 보여준다. 준희는 가만히 머물러있다. 기껏해야 패닝으로만 회전하는 카메라와도 같다. 모든 숏에 준희가 등장하듯, 준희라는 자신은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상은 이러한 나에게서 항상 멀어진다. 그래서 과거에 알았던 사람과 만난다고 하더라도, 프레임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대상은 같지 않다. 준희의 눈에서 멀어진 길수가 소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길수와 영화관 직원은 서로 다른 문을 나서서 어떤 행위를 했을까? 그래서 프레임에서 이탈한 이후 다시 마주한 대상은 낯선 요소가 덧붙여진 상태로 나타난다. 이를 극복하는 태도를 줌인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낯선 대상,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대상을 실로 알았을 때, 나와 다른 상대방의 언어인 수어를 알고, '나는 곧 저물지만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라는 중년의 문장을 알아서 세대를 뛰어넘어 이해했을 때, <도망친 여자>와 마찬가지의 줌인이 사용된다. 외에도 줌인에 상응하는 전망대, 렌즈, 망원경 등이 포착된다. 망원경으로 익스트림 롱숏에서 풀숏 수준으로 서서히 가까워진다. 공원을 걷는 행인의 정체조차 몰랐던 상황에서, 비로소 대상의 형체 정도는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러한 줌인을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화해야 한다. 이는 대상의 입을 열게 만드는 질문, 기존의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몸과 언어로 말하는 발화여야 한다. 준희가 수화를 따라만 하지 말고, 정말로 말하지 않고 이를 사용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처럼, 준희가 자신의 입장에서 세원을 판단하지 않고 그녀가 스스로 말하게끔 질문하고 유도하는 것처럼, 대화는 ‘산파’여야 한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아는 대상이 아닌, 항시 달라지는 현재의 대상을 소환한다. 길수는 대형 영화에 출연하기를, 준희와 세원은 글쓰기를 멈추었다. 준희의 말로 보건대, 이들은 변화하고 싶다. 글쓰기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인데, 글쓰기에 의해 준희가 수단이 된 것만 같다. 글을 쓰며 나 자신을 과장하게 되니, 글쓰기를 멈추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변화하고자 영화를 찍고 싶다. 또 만수는 길수를 보고 어떤 글이 떠올랐는데 까먹었다. 어떤 글을 연상하던 만수와 그것을 까먹은 만수는 다르다. 내가 아는 것은 과거의 상대방, 또 과거에 상대방이 내놓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은 현재의 상대방을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대상을 직접 알고서 이해해야 한다.      


영화 후반부에 영화관의 옥상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다. 그리고 직접 옥상에 올라가서 풍경이 뛰어나다는 것을 경험한다. 본 과정에서 줌인이 사용된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경험하지 않고 마주하지 않음에 영화 속 충돌이 만연하다. 분명 현재에 달라진 준희와 길수가 놓여있다. 그런데 박 감독과 만수는 그녀들에게 자꾸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연기하라, 글을 써라, 자신이 길수에 대해서 글을 써보겠다며 자신의 욕망을 투입한다. 그들의 입을 자신의 입과 발화로 뒤바꾼다. 이에 우리의 기존 앎, 감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고 박 감독은 준희에 대한 어색함과 미안함, 준희는 박 감독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있다. 만수와 준희 또한 마찬가지다. 한때 잠자리를 가졌을 정도로 친밀했다. 그래서 계속 준희에게 허구한 날 전화해서 치근덕댔고, 흡사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일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나의 감정에 매몰된 나머지, 상대방이 나와 같다고 착각하는 나머지, 진정한 실재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떠난다. 세원은 기존의 관계가 싫어서 이사 왔지만, 마을 주민들과 새롭게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마을 주민들은 책방을 좋아하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원과의 불화, 만수를 부르는 행사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 그렇게 자기 뜻을 무릎 꿇리는 사람들에 의해 어쩌면 세원은 또 떠날지 모른다. 준희와 박 감독의 마음은 영화화지만, 투자자들의 욕망이란 입김에 의해 준희의 의지는 관철됐다. 또 준희가 박 감독 부부를 기분 나쁘게 하자, 이에 그들은 ‘잠적’한다. 이렇게 타인이 내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투영할 때 우리는 달아난다. 그런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다.’ 준희가 처음 세원의 책방에 갔을 때, 그녀는 보고 싶은 책을 살피듯 보였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은’, 세원과 직원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이 싫어서 준희는 책방을 나왔다. 이윽고 세원과 재회하는데, 세원은 자신이 바라지 않은 이사 소식이 퍼진 것이 당혹스럽고, 또 준희는 그녀의 예상 바깥에서 나타난다.      


이후 준희는 전망대에 가서 보고 싶은 풍경을 보지만, 이윽고 계획에 없던 박 감독을 만나게 된다. 원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실상 그와의 약속은 틀어진 셈이다. 이후 길수, 경우, 만수 등 만나기를 예상 못한, 보기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과 만난다. 하지만 우리는 우연에 의한 원치 않은 만남과 계획의 틀어짐으로, 익히 예상 가능한 유한한 자신을 확장하고 무언가를 더한다. 영화는 준희 시점에서의 떠나감과 우연한 만남, 더해짐을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는 아주 기초적인 요소로 보여준다. 준희는 길수와의 우연한 만남에 영화를 찍게 된다. 소설을 쓰는 기존의 나에, 영화를 연출하는 자신을 더한다. 박 감독에게는 카리스마 있다는 얘기를 듣기 싫었다. 왠지 자신이 무서워 보이는 그의 욕망을 투영한 얘기 같다. 하지만 길수가 그녀를 카리스마 있다고 언급해주는 것은 흔쾌히 인정한다. 전혀 예상치 않은, 편견 없는 타자와의 우연한 접촉이 내가 못 보던 나를 보여주고 인정하게 해준다. 또 박 감독과 길수와 있을 때 준희는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만수 및 세원과 함께 놓인 자리에서는 자신에게 욕망을 투영함에도 가만히 듣고만 있다. 타자와 놓여 있음에 전혀 다른 준희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러한 우연한 만남, 타자와의 접촉은 가볍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듯, 창문 너머의 풍경은 영화의 조악한 흑백 매체에 의해 무엇이 놓여 있고, 누가 지나다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런데 줌인이 동원되는 이해의 순간은 선명하고도 또렷하다. 모호한 대상이 아니라 선명한 대상에게 접근한다. 길수와 처음 만났음에도 그녀를 절절히 이해하고 통찰한 준희는 그녀의 입장에서 더 이상 대규모 영화에 출연하고 싶지 않은 심정을 얘기한다. 준희의 입은 길수의 의식을 말한다. 그리고 길수와 영화를 찍기로 한 준희, 그런데 그녀가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각본 또한 길수와 남편이 겪은 실화를 반영한다. 전혀 듣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영화는 홍상수의 다른 작품들처럼 리버스숏이 없어서 준희가 상대를 어떻게 보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대신 대상을 준희가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롱테이크 내에서 상대의 얼굴과 말을 반영하며 변화하는 준희로 보여준다.     


이렇게 이해하는 준희는 ‘배우’ 길수에게 그녀와 크게 유리되어 있지 않은 배역을 맡기고, 또 배역이 아닌 그녀의 감정을 포착하려 한다. 이러한 각본과 연출을 두고 경우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준희는 그녀와 관계 맺지 않은 길수를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는다. 준희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공간에 길수를 배치했다. 길수가 선호하는 환경이나 일상이 아니라, 준희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에 길수를 놓을 것이다. 즉 길수를 이해하되, 그것은 준희의 몸과 의식에서 소화하는 것이다. 철학자 가다머는 독어에서 이해란 실생활에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밝힌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을 설계하고 자기 내면의 무언가가 열리며, 그렇게 열린 자신을 현실에 기투하여 행동에 옮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의 이해는 타자와 나의 주관이 결합한다. 상대방과의 대화에 빠져드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의사소통하며 새로운 나를 깨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에서 먹거나 냄새를 맡는 장면에 주목할 법하다. 공원에서 분식을 먹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뭘 먹는지 냄새를 맡아서 확인하고, 또 길수가 시킨 비빔밥을 준희가 먹어서 맛을 확인한다. 즉 준희의 몸을 거쳐 무엇을 먹고 있는지 판단한다. 그래서 준희의 몸이 이해한 것을 내놓는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준희에 의해 대상이 수용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현실의 대상과 아예 같지 않은 픽션이다. 그러나 아예 허구도 아니다. 준희의 영화가 현실에서 만개한 꽃의 한순간을 전달하는 것처럼, 길수와 배역이 분간되지 않는 것처럼, 이를 300번이 넘는 재편집으로 연출한 것처럼, 대상을 오롯이 소화하여 탄생한 결과물이다. 거기에 담긴 대상 길수는 같이 출연하기로 한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가 바라보고 있고, 꽃을 들고 결혼식을 올린다. 기뻐 보인다, 준희가 부여한 상황에서 ‘배역’과 ‘배역을 기원시킨 길수’와 ‘길수의 근원인 김민희’가 느끼는 행복… 하지만 남편은 그저 바라보고, 길수는 혼자 걸어가며 이윽고 그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카메라를 든 남자, 반면 계단을 올라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길수, 그렇게 서로에게서 멀어질 길수와 남편, 여전히 살아갈 김민희와 삶의 멈춤을 직감하는 홍상수…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길수가 남편의 출연을 장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도 틀어지기 일쑤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욕망하며, 여기에 타인을 편입한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내가 욕망한 소설 쓰기로 탄생한 나에게서 떠나고, 세원처럼 기존의 생활세계를 청산한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나를 알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기에 나는 늘 대상과 '재회'한다. 이전과 지금의 만남은 다르다. 불과 몇 분 전 알고 있던 소설도 지금의 만수는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나를,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욕망도 욕망이거니와 나의 감정에 의해 상대를, 그리고 상대가 바라보는 나를 냉철하게 바라보기 어렵다. 하지만 타자는 나를 새롭게 보게 한다. 분식집 창 앞에서 그 소녀는 왜 길수를 바라봤을까? 소녀가 길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어떤 경험을 트이게 해줬을지, 감상자도 모르고 준희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기존의 자신을 확장하지 않았을까, 또 준희는 그렇게 달라진 길수와 만나지 않았을까. 계획에서 틀어진 우연함, 거기서 나는 덧붙여진다. 우연히 술을 마셔 전혀 예상하지 않은 나의 즉흥적인 모습이 더해지고, 또 기존의 약속 대신 우연한 만남에 참여하여 영화를 찍는 준희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타자, 재회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준희의 입으로 길수의 의식을 말하고, 청각장애인임을 가정하여 수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는 익스트림 롱숏에서 풀숏, 클로즈업으로 향하는 줌인을 통해,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는 선명하게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리. 그리고 홍상수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며,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을 이해하는 사람이 곧 소설가, 그 소설가가 확장된 영화감독이라 말한다. 우리 세계에 꼭 필요한 이해하기를 역설함과 동시에, '사람'이 먼저 존재하고 그 이후 이야기가 떠오르는 예술가를 이해하는 작품, 그 사람에게 욕망을 투영해선 안 된다. 타자, 심지어 나조차도 욕망 대신 이해하기. 그렇게 홍상수는 지금껏 소설가가 등장하는 자신의 작품과 자전성을 해제한다. 사랑한다는 것에는 의심 없는 관계지만 결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컬러 영화에서 흑백 현실로 되돌아오며 고백하고, 삶이 멈출 사람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동반자의 멀어짐을 바라보며 먹먹함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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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2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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