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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8. 2022

체마 가르시아 이바라, <성령의 이름으로>

안구 적출의 역사는 현재 진행 중

체마 가르시아 이바라(Chema Garcia Ibarra), 

<성령의 이름으로>(The Sacred Spirit) - 안구 적출의 역사는 현재 진행 중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은 이 모든 감각의 자기 소외에 의해, 즉 소유의 감각에 의해 잠식되었다.” -칼 마르크스-

1914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한다. 전쟁은 단순히 이 둘의 충돌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윽고 무수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유럽 전역이 거대한 격전지가 된다. 당대의 젊은 청년들 대다수가 징집되었고, 그렇게 전장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중엔 예술가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징집된 청년 예술가 중에는 순수와 동경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경으로 향할 수 없었고, 차가운 전쟁의 피해를 직격으로 맞는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모더니즘을 주름잡았을 청기사파의 마르크, 마케는 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리파의 키르히너는 생존하였지만 팔을 잃어 작품 세계는 비관적으로 변했으며, 말년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들처럼 전쟁으로 목숨을 잃고 절망적으로 작품 세계가 뒤바뀐 예술가들도 있었으나, 이를 아예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예술가도 있다. 바로 몬드리안이다. 몬드리안의 추상은 절망적이고 희망 없는 서구·현실을 아예 이탈하여 전면 새롭게 이상향을 구축한다. 색채와 조형성은 조화롭고 다툼이 없다. 비현실적이고 낙관적인 세계, 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 기운을 차린다. 이상향을 그리는 것은, 이를 감상하고 정서적 안정을 누리는 감상자들처럼 현실로 되돌아와 의미를 쟁취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한갓 거짓말이요 무의미한 허구에 지나지 않으리. 현실과 그럴듯하게 닮은 가상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작금을 두고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무의미’하다고 진단한다. 오늘날의 이미지들은 현실에 대응물이 없을뿐더러, 현실에서 전면 멀어진 이미지들을 이중, 삼중, 사중, 오중…으로 무한히 복제하는 형국이다. 이러한 이미지에 젖어 든 사람들은 보는 것도 많고 아는 것도 많지만, 정작 이 모든 것들은 현실에 타당하지 못해 무의미하다. 이미지는 태어나지만, 정작 현실은 부패하고 죽어가는 형국, 그래서 우리의 눈은 이상향, 허구, 낙관의 세계가 아니라, 다시 우리가 눕고 앉고 서 있는 현실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작품 <성령의 이름으로>는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한 무의미한 유토피아를 다룬다.      


1980년 엘체 태생의 스페인 감독인 체마 가르시아 이바라의 장편 데뷔작, <성령의 이름으로>는 절망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UFO를 찾아 헤매는 어느 한 클럽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6mm 필름이다. 오늘날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디지털카메라는 아주 선명하고 쨍하다. 디지털은 대체로 현실과 일치하거나, 현실보다 더 정밀하다. 반면 20세기에 사용된 필름은 디지털카메라는 물론이거니와, 현실에 비해 훨씬 더 흐릿하고 아스라하게 시각을 매개하는 매체다. 35mm 필름에 비해 16mm 필름은 더더욱 조야하다. 먼지가 낀 듯한 불투명성, 때때로 그레인이 자글거리는 불확실성·불안정성, 선보다 색이 강조됨에 정념을 자극하는 매체가 바로 16mm 필름이라 할 법하다. 이러한 16mm 필름으로 감독이 나고 자란 엘체를 담아낸다. 본 16mm 필름에 둥근 모서리가 결합한다. 20세기 초반, 영화가 허구이자 하나의 기술임을 숨기지 못한 흔적으로, 최근 <도원경>이나 <행복한 라짜로>와 같은 작품에서도 재발굴된 바 있다. 16mm 필름과 둥근 모서리는 허구성, 가상성, 과거에 상응하며, 현실 바깥, 시간 너머를 갈망하는 영화 속 UFO 협회 구성원들의 심리를 가시화한다. 즉 16mm 필름과 둥근 모서리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이들이 세상을 지각하고 바라보는 방식이랴. 그런데 16mm 필름이나 둥근 모서리는 보통 그 당시에 통용되던 화면비인 1.33:1 내지는 4:3 화면비와 결합하여 과거를 지칭한다. 그런데 본 작품은 오늘날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1.6:1이다. 아무리 과거, 허구로 달아나고 싶어도 현실, 현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면 과거로 향하지 못한 최후의 화면비로 보여준다. 이제 이러한 틀에 담기는 인물들을 살펴보자. 본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비전문 배우들이다. 그래서 영화는 현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며, 영화가 꾸며낸 보도 영상인 납치 사건, 메르세데스 자살 사건 등은 허구임이 확실하지만, 엘체 노동자 파업 보도 영상은 허구임을 판가름하기 어렵다.      


이렇게 비전문 배우가 연기하고 허구임을 확신할 수 없는 영상이 인서트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마냥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이바라가 요구하는 디렉팅은 매우 작위적이어서, '연기'임이 확연히 티가 난다. 그런데 이렇게 작위적인 연기 스타일은 그간 스페인 영화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호들갑스럽고 격양된 알모도바르, 이글레시아의 인위적 디렉팅과는 결이 다른, 오히려 이들과 정반대의 작위성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감성, 정념, 본능, 에로티즘을 추구하는 선배 감독들과 달리, 이바라는 감정을 아예 거세해버린 듯한 디렉팅을 선보이니 말이다. 이는 영화의 주제와도 결부되어, '나'로 살지 않고 외부나 이데올로기, 자본에 의해 움직이던 로베르 브레송의 건조한 디렉팅이랄지, 마찬가지로 내게서 선행하는 절대적 원리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어 뻣뻣한 로봇과도 같은 디렉팅을 요구한 란티모스와 유사하다. 이바라의 인물은 몽롱해 보이고 무엇을 쳐다보는지 초점은 흐릿하며, 말에서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다. 그나마 엘체 마을 주민들의 디렉팅은 일상적이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UFO 협회 구성원들은 정신이 지상에 메여있지 않은 듯한, 넋이 나간 연기를 선보인다. 이바라의 딱딱하고 건조한 디렉팅은 현실 도피, 자기 소외로 삶과 감정을 잃어버린 존재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주로 위치가 고정된 카메라에 담긴다. 이러한 촬영과 관련하여 도입부를 살펴보자. 베로니카가 다니는 학교에서 '세례'를 주제로 학생들이 발표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 베로니카는 온전하게 들어온다. 그리고 세례를 했다면 납치되지 않지만, 세례를 안 했다면 납치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발표를 한다. 이후 다른 학생의 발표가 이어지는데, 카메라는 그대로 머물러있고 소녀는 베로니카보다 훨씬 커서, 프레임 밖으로 얼굴 일부가 잘려 나간다. 세례를 해야 납치당하지 않고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처럼, 영화에 포착되고 싶다면 이러한 프레임 안으로 자기가 끼워 맞춰서 들어오라는 듯이 말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방식에 타인이 맞춰서 들어올 것을 요구하는 태도, 이는 영화에서 탐구하는 '눈(eye)', '바라봄'과 관련이 있다. 영화에서는 기독교의 심볼인 ‘섭리의 눈’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도 혹은 절대자의 시선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환기하고, 이러한 섭리의 눈의 대리인인 기독교도들이 영화의 주인공 호세를 근처에서 바라본다. 딸 바네사를 잃어버린 호세의 남매 차로도 타인의 눈이 뒤 따라다닌다. 이렇게 따라다니는 시선은 나의 눈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명령하지 않는다. 보지 말 것을, 타인의 시선으로 대신 볼 것을 요구한다. 영화 후반부에 베로가 잡지나 신문에 수록된 무수한 눈동자를 오려 콜라주를 하는 것이 이와 관련이 있을 테다. 일단 차로의 남편은 사망했다. 베로가 '그는 헤로인 중독자였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건대 불법에 관여되어 보인다. 그래서 이에 관여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그의 지인이 차로에게 다가와 '자신을 보지 말고 그냥 남편에 관한 자기 말만 들어라.'고 요구한다. 차로는 그와 남편이 관련 없다는 말을 그저 곧이곧대로 믿고 순응해야 한다. 봐야 의심하고 판단할 수 있을 텐데, 보지 말라는 말에 따랐으니 말이다. 또 호세가 가는 모임에서는 눈을 감고 우주로 향하며, 잠든 상태에서 형이상학을 인식하라고 강의한다. 그들은 현실을 보지 말고 무비판적으로 일방적인 발화를 수용할 것을,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자 본질인 양 강의한다. 그래서 호세는 보지 않는다. 보더라도 그것 너머를 본다. 있는 그대로의 호세 마리아를 보지 않고, 훌리오가 그에게 빙의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러한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가 직접 바라보기를 두려워한다. 차로는 딸 바네사를 찾고 싶어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 이에 차로는 한때 영매였고 지금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 의존한다. 자기가 직접 보지 않고 외부에서 바라보라는 데로, 자신이 절대자에게 바라봐지는 데로, 자신 외부의 눈에 의탁하여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자기 시선은 없고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세계, 이에 베로니카는 답답하다. 실종된 바네사를 찾기 위해서 쌍둥이 자매처럼 보이길 요구하는 시선에 지배받고, 또 있는 그대로의 베로가 아니라 그 너머의 거창한 능력이 있고 영혼의 질이 좋은 존재로 보이는 것이 무수한 시선에 둘러싸인 갑갑함이랴.      


그래서 베로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아이가 기대가 없어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니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목적을 투영하는 것, 이는 앞서 설명한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프레임 안팎으로 잘려 나가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거나 나갈 것을 요구하는 오만한 프레임은 포착되는 대상에게 목적을 씌운다. 영화의 디렉팅도 매우 건조한데, 연기 외로도 영화는 매우 텁텁해 보인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세계가 특정 목적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호세가 처음 소개될 때 ‘식당을 운영하는 호세’로 소개된다. 바네사 실종이 보도되는 TV가 놓인 그의 식당, 처음에 호세는 기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후 청소를 시작하자 그가 보이기 시작한다. 흡사 그렇게 일해야지만 보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듯이, 이후 몇 개의 시퀀스를 지나 TV에서 보도되는 영상은 노동자들이 노동권과 사회보장을 촉구하며, 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님을 호소하는 시위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필요할 정도로 본 작품에서는 서로를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고, 목적이 투영된 도구나 장치쯤으로 여긴다. 일단 기독교 공동체에서 마을 구성원의 세례/비 세례를 구분한다. 베로의 발표로 보건대 세례 하지 않았다면 납치되어 장기 매매 당해도 상관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거리 곳곳의 기독교인들이 종교를 퍼뜨리기 위해 세례/비 세례를 구분하여 인간을 목적화한다. 세례받지 않은 인간은 보호받지 않으며 신성하고 전능한 기독교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악용된다. 세례받기를 원치 않는데 소속되고자 한다면 베로니카는 ‘지체아’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대상에게 목적을 투영하지 않게끔, 비실용적인 존재여야 한다. 지체아가 아닌 실용적인 아이들은 납치당하거나 마피아 집단에 성적으로 유린당한다. 그리고 UFO 협회 구성원 중 젊은 청년도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이렇게 잘 자랐음’을 자랑하고 싶은 존재로 전락한다. 타인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배를 불린다. 나도 타인의 목적이 되지만, 나도 타인을 목적으로 취급하고 소유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소외를 겪는다. 마르크스는 빈약한 사물 및 외부 권력에 의존하는 ‘소유의 감각’은 풍요 속에서 불안, 외로움, 우울, 궁핍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영화도 타인에 의한 나는 있지만, 그들 없이도 존재하는 나는 없다. 모임, 공동체, 강의에 항시 참여하는 사람들, 나의 불안과 문제를 타인을 빌려오며 해결하려는 태도가 눈에 띈다.  

  

이렇게 서로를 목적으로 바라보고 소유하는 이유는 제 자신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바라는 TV를 반복해서 포착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을 보기보단, TV를 현실의 창구로써 의존하는 눈치다. TV에서는 언제나 여러 광고가 흘러나온다. 그 중 ‘기업들이 이기면 우리도 이긴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인, 개인은 기업에 의존하고 기업을 위해 희생하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선전이 흘러나온다. 또 개개인은 불사의 존재인데 이를 가능케 할 권위나 능력에 기대보라는 사이비 광고도 성행하며, 광고가 으레 그렇듯 소비를 부추긴다. 광고는 기업이나 종교, 단체에 의존하고 그들의 생산품을 소비할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여파가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에도 반영된다. 메르세데스라는 한 주민은 남편을 여위었다. 이후 계속 악몽에 시달린다. 그래서 영매인 차로·호세 남매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는 더 이상 영매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메르세데스와 남편과의 관계, 그녀가 느끼는 공포나 불안, 죄책감 등은 모두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 타인이 대신 짊어지거나 해결해줄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주리라 기대한다. 그 누구도 메르세데스를 도와줄 수 없자 그녀는 집에 방화하여 자살한다. 그리고 이웃은 그녀가 죽은 이유가 망자 때문이라며 자살이라는 선택의 책임마저 타인에게 전가한다. 이렇게 광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현실의 보도를 직면하고 짊어지는 사람들은 드물다. 영화 결말의 UFO 협회 관계자들이 마피아의 아동 납치 및 밀매와 관련이 있다는 보도 영상을 호세는 보지 않는다. 그 이전부터 마을 내부에선 항상 동유럽계 이민자들이 절도하고 납치를 일삼는다며, 그들 외부의 존재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UFO 협회 구성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이 미천하고 작은 존재로 본다. 우주는 크고 위대하며 외계인은 인간보다 더 진보한 문명을 일궜다고 생각한다. UFO가 나타난 날 도시 전체가 정전이 났기에, 그들의 힘이 강대하다고 찬미한다. 그들이 UFO를 갈망하는 이유는 구원이다.      


구원을 기다리는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UFO와 접신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구성원들은 미래에 기술이 발전하면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 낙관한다. 하지만 현재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데, 발전될 미래가 있을까. 이렇게 영화 속 인물들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다. 그래서 자기 삶을 더 낫게 만들 만한 대상들을 우두커니 기다리기만 한다. 직접 UFO 회의를 주최하기보단 회장 훌리오가 입을 떼기를, 차로는 엄마가 바네사 실종을 대신 해결해주기를, 산자는 망자가 삶을 구원해주기를, 반대로는 그들이 나의 책임을 대신 짊어져 주기를. 그래서 이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UFO 협회 구성원이 '최후의 만찬' 의례를 혼자서는 못 할 일이라고, 여러분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또 형이상학 모임의 한 여성은 호세의 어머니가 매일 밤 나타난다며 제 마음대로 생각하며 의존한다. 호세는 자기보다 어린 베로가 세계의 구원자라고 신봉한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외부에 의탁하여 실행한다. 이렇게 인간은 홀로 서 있을 수 없고 바라볼 수 없다고 선전함에 종교, UFO, 기업의 힘은 나날이 커져간다. 사람들은 점점 더 현실 너머의 허상에 기대고 싶어 하며 젖어 든다. 그래서 이들은 혼자 가능했던 순간을 그리워한다. 차로와 호세는 엄마 몰래 만들어 먹은 요리, 즉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취한 어린 날의 추억을 회고한다. 하지만 현재에는 혼자서 해결하지 않는다. 외부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므로. 경찰이 멈추면 자신도 멈춘다. 이러한 의존성이 영화의 고정된 카메라에 상응한다. 그런데 영화는 항상 멈춰있지만은 않다. 영화의 중반부, 핸드헬드와 달리 숏이 결합하여 마트로 향하는 호세의 걸음을 따라간다. 또 그의 가게에 침입한 흔적과 바네사의 가방을 발견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터널을 통과하고 호수로 향하는 과정에서도 줌인과 핸드헬드가 동원된다. 베로니카를 하교시키는 장면에서는 줌아웃을 활용하며, 베로니카를 등교시킨 이후 혼자서 공구를 사고 길을 나서는 그를 스테디캠과 트래킹을 결합하여 포착한다. 특히 호수로 향해 바네사의 가방을 버리는 장면에서는 카메라와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하며 움직임은 더욱 능동적으로 변한다. 카메라에 자신이 담기기를 원치 않는다는 듯이, 자기가 타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갈 길을 선택하겠다는 듯이.     


하지만 영화 속 스페인은 사람의 각막을 뽑아버리는 세계다. 나는 볼 수 없고 상대방이 바라보기만 하는 일방적인 세계, 특히나 상대방의 시선이 요구하는 대로 포르노를 찍어야 하는 폭압적인 세계다. 그래서 호세가 아무리 제 혼자 길을 나선다고 해도 그가 보는 것은 제 눈이 흡수한 것이 아니다. 지금껏 그의 눈을 규정해온 종교, UFO 단체, 기업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게 만들거나, 그것 너머를 보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바네사의 가방을 없앤다. 그리고 호세 마리아의 시선이 그를 따라오자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은 멈춘다. 그렇게 영영 멈춰버린 상태에서 결말의 경찰이 호세에게 급습한다. UFO 단체를 신실히 따른 결과, 하지만 자신에게 의존하라고 선교한 대상들은 결코 그의 죗값을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다. 또 신묘한 의식은 단지 신묘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구원은 없다. 어디에나 있는 시선은 그를 굽어본 것이 아니라, 착취하고 적출하려 호시탐탐 노리는 시선이었으니, 그래서 우리는 무의미하고 위험한 현실 너머가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와 대비해야 한다. 이렇게 감독은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현실 너머로 줄곧 이탈하는 인간의 심리를 허구적이고 복고적인 양식에 담아서 탐구한다. 나약한 심리의 원인은 우리를 곳곳에서 쏘아보는 눈들이, 의존적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과거에는 종교를, 오늘날에는 기업을 따른다. 그렇게 기업, 단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UFO를 보고 싶은 욕망은 그들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리. 흐리멍덩한 그들의 멍한 눈에 주입한 것이랴. 그렇게 욕망을 따라간 결과와 책임을 시선을 조종한 주체들이 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기댄 것이 아니라 착취당했음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책임져야 할 욕망이 들이닥쳐 내 삶은 멈추게 되리니. 우리는 분명 현실 너머를 꿈꿀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이어져야지, 현실을 아예 저버린 결과물이어선 안 된다. 더욱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문제는 결국 현실에 참여하는 우리가 해결할 몫이요,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 도움을 바라는 외부 또한 우리의 상상이자 낙관일 뿐이기에. 비관적인 결말이지만 크레딧의 쿠키 영상은 영화가 촬영되는 현장의 푸티지다. 이바라는 종교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다시금 굴종하는 인간을 비관적으로 여기면서도, 픽션이라는 허구에서 현실로 돌아오며 마냥 좌절하진 않는다. 아직까진 허구가 아닌 현실을 바라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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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28 집에서(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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