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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9. 2022

파나 파나히, <길 위의 가족>

인생: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파나 파나히(Panah Panahi), <길 위의 가족>(Hit the Road) 

- 인생: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우린 서로 떨어져 있었던 편이 낫지 않았을까? 어차피 같은 길을 걷게 돼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뮈엘 베케트-

동시대에 활동하는 영화감독 중에는 아버지를 닮은 아들들이 여럿 있다. 일단 소련의 거장 알렉세이 게르만의 색채를 그의 아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가 오늘날에 계승하여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 따라 아들도 소련 시기부터 러시아까지 역사에서의 비자유, 전체주의에 의한 개인 희생, 국가의 야심을 위한 삶의 착취를 고찰한다. 연출도 롱테이크, 소격효과, 비선형적이고 비이성적인 전개 등 아버지의 명성을 알린 형식을 이어서 탐구한다. 한편 소란스럽고 산만한,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세계를 전시하는 듯한 롱숏으로 촬영하는 경향은 아버지와 다른, 아들만의 변주다. 또 다른 아들로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있다. 그는 캐나다의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아들이다. 브랜든은 데뷔작 <항생제>에서 단일한 이데아에 빠져들며 자유롭고 개성적인 개인을 포기하는 인류를 예고하고, <포제서>에선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여 상호 영향 받는 양자를 고찰하며, 기술발전에 따른 인간상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간다. 다만 아버지가 당시의 시뮬라크르인 영상 매체나 게임에 지배되는 인류를 그렸다면, 아들은 AI나 알고리즘, 무한 복제되는 동시대적 매체에 주목한다.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이 데뷔한다. 바로 이란의 거장 자파르 파나히의 아들, 1984년 태생의 파나 파나히가 <길 위의 가족>에서 길을 떠나며 장편 데뷔한다. 이란 영화에서 길은 인생 그 자체였다. 자파르 파나히도 그렇고, 파나히의 선배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차를 타고 언제나 길을 나섰다. 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직선이 아니라 굽이치는 곡선, 이에 주인공들이 기대한 축구장, 친구네 집, 배우의 집, 장례식 등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삶에 대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길에서 나의 기대에 들어맞지 않는 외국어를 쓰는 타자들과 다양한 삶의 형태를 만난다. 길은 끝이 없다. 키아로스타미의 대부분 영화,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의 근작 <3개의 얼굴들>에서 결말까지 인물들의 길은 끝나지 않아, 숨이 붙어 있다면 우리는 굽이치는 여정을 떠난다. 그렇기에 삶은 풍요롭다.      


이러한 ‘이란의 길’을 또다시 나서는 자파르 파나히의 아들, 파나 파나히는 길에서 어떤 인생을 보여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에서부터 눈에 띄고, 이후까지 지속되는 형식은 고정된 카메라, 롱테이크, 패닝이다. 시작과 동시에 멈춘 차가 포착된다. 그래서일까, 마찬가지로 카메라가 멈춘다. 차가 멈추니 부모님은 잠들었고,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다리에 착용한 깁스에 장난을 치며, 큰아들은 바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각각의 얼굴을 고정된 위치에서 그저 회전할 뿐인 패닝으로 부드럽게 조명한다. 이윽고 길을 나서지만 여정에 상응할 법한 트래킹 숏 내지는 달리 숏은 영화에서 드물게 사용된다. 흡사 이들의 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듯이, 큰아들을 망명시키려는 목적, 정치권력의 눈을 피해야 하는 태도가 마치 고정되어있다는 듯이. 이러한 계획, 고정으로부터 우연, 즉흥을 띨 때, 그렇게 목적지 없이 굽이치는 인생이란 길을 떠날 때, 영화는 트래킹 숏을 활용한다. 하지만 트래킹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화가 마냥 뻣뻣하지 않다. 큰아들과 이별하러 가는 서사이기에 엄숙하고 슬퍼야 할 것 같지만, 이를 모르는 동생과 알고도 내색하지 않는 부모님은 수다스럽게 '슬픈 상황'을 이탈하므로, 그렇게 하나의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향할 수 있는 ‘길’은 유연하므로. 또 영화는 대체로 클로즈업이 잦다. 개개인의 확실한 얼굴을 가까이서 포착한다. 이들은 가족이기에 서로를 더더욱 잘 안다고,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할 테다. 하지만 아무리 피가 섞였어도 너는 내가 아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나 어린 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죽는다.'라는 농담, 대상이 나에게서 잠시 죽더라도, 떠나가더라도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대상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낯설어지고, 이에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도 초라할 때, 롱숏이 활용된다. 세계는 드넓고 나는 작다. 그래서 확실한 줄 알았던 여정과 전혀 다른 미지의 길을 나설 때도, 롱숏은 활용된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에게 노견 제시의 오줌을 누어주고 오라고 지시하지만, 이리 튈지 저리 튈지 1초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천방지축 소년은 이를 따를 리가 만무하다. 소년과 제시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에서 그들은 멀어진다.   


이윽고 형에게 동생을 데려오라고 지시하지만, 형제와 강아지는 목적에서 멀어져 즐겁게 뛰어논다. 그렇게 대상이 기존의 앎이나 기대에서 달라질 때 롱숏이 활용된다. 또 사막에서 안개가 자욱한 목초지에 처음 진입하여, 모호한 길목에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때의 가족도 롱숏으로 포착한다. 그리고 큰아들이 부모의 품에서 떠날 때, 불가해한 하늘 너머와 내가 딛고 있는 땅 너머로,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여정을 떠날 때 롱숏을 활용한다. 외에 개개인의 의식이 지상을 넘어서 우주로 확장되고, 영화가 끝이 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여정이 멈추지 않은 가족의 길을 포착할 때, 영화는 불가해하고 숭고한 길 너머를 암시하는 경이로운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를 촬영한다. 이렇게 클로즈업으로 가까웠다가 멀어지는 가족들은 ‘같지만 다르다.’ 그래서 이들을 가르는 편집도 눈여겨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본 작품의 편집은 잦지 않다. 그런데 네 가족 모두 함께 있다가, 거기서 구성원 중 한 명이 이탈할 때, 넷이서 셋이 되고, 둘이서 하나가 될 때, 영화는 편집으로 이를 나눈다. 롱테이크로 보존되는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의 시간은 이들의 결속, 끈끈한 유대감을 보여주지만, 편집으로 이들 각각이 놓이는 숏을 나누고, 넷이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던 롱테이크 또한 분절하여 가족이지만 타자인 각각의 식구를 구별한다. 이러한 형식처럼 영화가 탐구하는 것은 가족이다. 가족은 닮았다.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지시해도, 본인도 아들 못지않게 담배를 즐겨 피운다. 어머니는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아들의 입에 공유한다. 어머니와 아들의 두 개의 입, 하지만 그 두 개의 입은 하나의 담배를 공유하며 다르지만 같은 입이 된다. 또 가족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길을 나선다. 그래서 핸드폰을 챙겨선 안 되고, 혹 누가 미행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들에게 핸드폰을 챙기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그런데 어린 아들은 핸드폰을 몰래 챙겨왔다. 팬티 안에 넣어서 말이다. 이후 아버지 또한 깁스 안에 핸드폰을 숨겨 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모자는 입이 같았고, 부자는 규칙에 저항하는 것이 닮았다. 팬티나 깁스의 목적을 이탈한다.      


어쩌면 큰아들이 보석금을 내야 하는, 영화에서 밝혀지지 않는 어떤 불법적 행위 또한 아버지의 저항정신을 닮은 것이랴. 이렇게 닮았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분신처럼, 나처럼 여긴다. 또 가장 친밀한 가족은 많은 것을 서로 꿰고 있으며 각자의 감정을 공유한다. 영화 속 반복되는 바흐의 피아노 연주곡은 아버지의 심리를 청각으로 대신 들려주고 카메라는 이를 줌인으로 집중하여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아버지의 심리를 가리키는 형식을 통해 외부의 감상자는 가까스로 이를 인지하지만, 가족끼리는 ‘형식’이 필요 없다. 작은 아들은 깁스에 그려진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하고, 큰아들이 떠나기 직전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장면에서 그는 아버지의 음악을 공유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과 같은 아들에게 알고 있는 지혜를 내어준다. 그러나 아들은 자꾸 말대답한다. 또 아버지가 입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하지 말라고 20년째 얘기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지만, 큰아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 동생에게는 형이 떠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잠시 쉬어가는 길목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문턱을 두고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큰아들의 머리카락을 간직하려던 어머니는 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아들의 반항에 토라져서 혼자 길을 나선다. 그래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속사정 일부를 볼 수 있지만, 각자는 결국 서로에게 ‘여행자’다.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가족, 이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파나 파나히는 아버지처럼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꼬집지는 않는다. 다만 미시적인 삶에 묻어나는 정치의 여파를 은근하게 담아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길을 떠나는 가족들은 타인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보여야 한다.'고 계속 시선을 의식한다. 아무렇지 않은 것, 모나지 않은 것,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을 지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행당한다. 이러한 국가의 억압은 부모와 자식에게 이어진다. 그것을 원치 않지만 살기 위해선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악순환에 빠진다. 국가가 핍박한 사람들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고자 자신을 은닉하고, 이에 점점 더 자유는 멀어지고…      


이는 목초지에서 접한 양가죽 거래와도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앞사람이 선택한 양가죽을 사고, 구매자가 선택한 양가죽은 뒷사람이 사게 된다. 그래서 앞에서 좋은 것을 남겨줬다면 좋은 것이 이어지지만, 나쁜 것을 남겼다면 나쁜 것이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에선 억압, 구속이라는 나쁜 것이 이어진다. 이에 공간은 점점 더 황무지가 된다. 영화 초반, 어머니는 아무것도 없는 건조하고 삭막한 황무지가 과거에 호수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양이 풀을 뜯고, 개울이 졸졸 흐르는 목초지에 도착한다. 그곳이 큰아들이 여정을 떠나는, 가족이 그와 이별해야 할 장소다. 국가의 시선, 경계가 미치는 곳은 황폐해지고, 미치지 않는 곳은 풍요롭다. 졸졸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것, 그리고 부모의 손에서 떠나는 큰아들이 건장하다. 큰아들을 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여정은 대지가 쩍쩍 갈라진, 조금의 물기도 없는 황무지다. 이러한 황무지로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면, 저항해야 하리라. 안 좋은 양가죽을 사게 되었더라도, 뒷사람에게 좋은 양가죽을 남겨야만 한다. 그렇게 황폐함과 부정이 반복되는 공간에 우리는 선한 수분을 적셔야 한다. 이러한 저항을 순수한 소년을 통해서 깨우친다. 소년은 엄마가 원하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 핸드폰을 가져오지 말라는 규칙에 모두 저항한다. 또 소년은 마을에 있는 여자 친구와 결혼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빠는 여자 친구의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할 것이라 예상하지만 이에 기죽지 않는다. 차가 앞으로 향하기 위해 후진하더라도, 소년은 '앞으로'라고 외친다. 또 병든 제시를 아버지는 동물병원에 두고 왔지만, 제시는 이를 거부하여 가족에게 되돌아왔다. 휴게소에서 제시를 의자에 묶어놨는데, 제시는 자신을 묶은 의자에 굴하지 않고 질주한다. 이렇게 소년과 제시는 가로지르거나 반대로 가며 저항, 불복종한다. 이는 굳이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자유다. 반면 어른들은 그렇지 못한다. 아버지는 거리 위에 놓인 빈 캔을 줍고 싶다. 그것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하는 저항이다. 하지만 차가 위험하게 달리는 도로를 수직으로 가로질러 감히 캔을 줍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해야 할 것을 되찾아야 한다. 영화에서 이는 타자와의 접촉으로 가능하다. 길 위에서 한 사이클 선수를 만난다. 이윽고 가족이 탄 차와 경미한 접촉 사고가 나서 그가 쓰러졌다. 그를 태운다. 사이클 선수는 그가 닐 암스트롱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가 약물을 남용했으므로 존경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이클 선수는 이를 인정함과 더불어, 죄의 경계선에 엄격하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고가 막히기 때문이다. 사이클 선수와의 만남은 내가 하지 못하던 것을 하게, 생각할 수 없던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사이클 선수에게 가족도 마찬가지로, 그를 그냥 두고 가자는 의견에 반대하여 태우는 것이 비로소 멈추고 도로를 가로질러 '주울'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유한한 나는 타자와 접촉하지 않는다면 끝없이 하던 것을 계속한다. 하지만 나의 반복으로부터 ‘다른’ 타자는 새로운 것을 하게 만든다. 또 나는 자신을 볼 수 없다. 나를 볼 수 있는 타자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가족을 미행하는 줄 알았던 한 운전자는 그들의 차에 기름이 새고 있다는 것을, 차의 내부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알려주려고 따라왔다. 또 어머니가 큰아들에게 질문함에, 그는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는 영화를 다시 고민해보았으며, 그에게 버릇이 있다는 것도 밝힌다. 이는 국가의 구속, 미행과는 다른 관계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을 계속 가르치려 하지만, 자식의 고유한 자유를 바꿀 순 없다. 큰아들은 불현듯 떠나가고 버릇을 끝내 바꾸지 않으며, 작은 아들은 차에서 버스로 갈아타서 마을로 향한다. 이렇게 나에게서 저항하고 달아나는 타자를 존중할 때, 우리에게도 더 좋은 양가죽이 돌아오게 되리. 사이클 선수에게 ‘병이 있으면 어떡하지’와 같은 편견 대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마주할 때 우리도 존중받게 되리. 아들은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줄곧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뒤편으로 새 떼가 날아가는 것처럼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무리에 속한다고 해도 우리는 타자다. 무리에 빨리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그걸 아는 아버지는 늦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편집, 가족들이 함께 놓인 숏에서 이탈하는 이유는, 가족이고 서로 닮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결국 타자이기 때문이다. 식구들 각각이 어디로 향할지 가족조차 알 수 없다. 큰아들이 향하는 길목에는 안개가 잔뜩 껴있다. 그리고 길 너머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미지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 마냥 불안하다. 거대한 대지와 하늘 사이의 왜소한 어머니는 떠나게 될 아들에게 갖가지 용품을 챙겨준다. 불가해함과 미지를 조금은 극복할 수 있게끔, 하지만 거대한 세계는 준비를 배반한다. 큰아들은 좀 더 일찍 떠났고, 정식으로 이별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불발된다. 우리의 운명은 안개 낀 미지, 굽이치는 곡선, 너무나도 거대한 우주로 향하는 길에 놓여있다. 죽는다면 길은 멈추게 되리, 결말에서 제시가 사망하고 묻혀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면 우리는 길을 떠난다. 내가 어디로 향할지 나조차 알 수 없다. 영화에서 가장 황홀한 숏 중 하나는 모자가 우주를 바라보고, 또 작은 아들과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며 우주로 의식을 확장하는 숏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진실을 전할 수 없어서 형이 결혼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망명한 형에서 결혼한 형으로 확장되고, 소년은 형이 베트맨을 만나고 더 나은 미래를 살 것이라 무한한 상상을 펼친다. 인간의 길이 이와 같다. 무한히 열려 있음, 상상할 수 있음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긍정해야 한다.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 그가 말하는 희망의 조건이 다름 아닌 ‘열림’, 그리고 ‘열망’이다. 소년은 결혼할 형을 단지 '유부남'에 그쳐서 상상하지 않는다. 소년은 인습적인 결혼, 보편적인 혼인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과 결합하여 새롭게 출발할 더 새로워질 형의 미래를 상상한다. 그렇게 상상하는 시공간은 과거, 현재가 아니라, 미래 그리고 우주다. 분명 현재에서 연속할 테지만, 아직 여지가 닫혀있지 않은 무궁무진한 시공간에, 분명 살아있지만 떠나서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을 상상으로 그린다. 그리고 열망한다. 소년이 미래에 여자 친구와 결혼할 것이라며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는 것처럼, 현재의 목마름과 허기가 미래의 목표를 상정하고, 그렇게 우리는 열려있는 미래에 우리의 욕구를 그리며 현재 그 이상에 도달한다.      


부모님들은 달라진 길, 안개, 모호한 목적지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이는 항상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길에 입을 맞춘다. 길을 떠날 때마다 항시 ‘끝내준다’고 외친다. 아이는 앞선 자신의 계획이나 기대에서 달라졌다 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호수가 황무지가 되었으니 물에 안 젖는 것은 장점이라며 바꿔서 생각한다. 사막을 바라보며 케이크를 상상하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화면에서 연주하며, 빈창에 그림을 그리는 등 아이는 무에서 유를 끌어낸다. 소년의 기존 앎을 뛰어넘거나 부정하는 새로운 경험이야 말로, 소년이 현재와 다른 미래의 희망을 맺게 하는 원동력이다. 제시가 떠난 그 순간에 슬픈 노래를 부르며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이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부르며, 슬픔이라는 하나를, 끝의 슬픔과 시작의 기쁨이라는 둘로 확장한다. 앞서 언급한 저항, 그것이 곧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음에 가능할지니. 우리는 저항 정신을 상상하는 아이에게서 길어온다. 아이가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기고 거짓말하지만, 실은 아이만큼 새롭게 주어진 것을 잘 수용하고 극복하는 존재도 없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길을 이탈하며, 그렇게 자유롭게 유한을 극복하며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 그래서 슬프지만 기쁘다. 아들과의 이별이 슬프지만 억지로라도 기뻐하는 어머니, 항시 죽음을 말하며 공허, 허무를 상기하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한 것을 채워나가는 부자, 이별과 무덤은 진짜 끝이 아니므로, 또 다른 시작이므로. 

이렇게 파나 파나히는 아버지의 초기 영화처럼 아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다. 길을 이탈하고 다른 차를 타며, 굽이치는 곡선과 안개에 몸담는 것이 두렵지 않는 자유로운 아이들은 유한과 한계를 초월하며 무한한 자신의 희망을 본다. 이러한 길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처럼, 키아로스타미의 <텐>처럼 낯선 타자들을 존중하며 의식을 확장해간다. 구속한다면 구속이 순환하고, 존중한다면 존중이 순환하기에, 그렇게 존중과 자유를 순환하며 실로 무한할 수 있도록. 이렇게 인생동안 무한히 길을 나서는 삶을 가족을 통해 바라본다. 네가 곧 나와 같은 식구에겐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다. 아들을 위해 집을 처분하고, 위험한 여정에 다 같이 동참한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부모조차도 자신의 심란한 고뇌에 오롯이 ‘줌인’할 수 있어야 한다. 유사성, 같아짐은 가족이란 이유로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의 나와 다른 감정을 깊이 이해한 결과여야 한다. 이러한 지론은 파나와 자파르의 관계에도 해당하는 것 같다. 길 위에서, 차 안에서 펼쳐지는 영화는 아버지나 키아로스타미를 닮은 듯 보여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는 영화가 아니라, 상상과 저항의 영화를 추구하는 것이 '가족'들과 유사하면서 다르다. 소년이 슬픈 가사 속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찾듯, 파나는 지상에서 우주를, 유한에서 무한함을, 단순함에서 복잡함을 본다. 또 미시적인 삶에 스며든 정치의 여파를 녹여낸다는 점도, 사회참여에 강성인 아버지와 다르다. 전통을 따르면서도 본인만의 길로 향하는 파나 파나히의 장편 데뷔작, 그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진지하면서 경쾌하고, 슬프면서 기쁜 인생의 모순이 매력적인 본 작품은 이란 영화를 대표할 차세대 시네아스트의 탄생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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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29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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