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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pr 29. 2022

코고나다, <애프터 양>

어둠은 우리에게 기억을 남기고

코고나다(Kogonada), <애프터 양>(After Yang) 

- 어둠은 우리에게 기억을 남기고  

“언제나 이런 식이다. 한동안 벽장에 처박아두었다가 때때로 다른 것을 찾으려고 뒤지다 보면 기억이 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도 금방. 그러다 벽장에 처박아두면 그 앞에도, 그 위에도 뭔가가 잔뜩 쌓이다가 전혀 떠올리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앨리스 먼로-

작년 마리아 슈라더 감독의 <아임 유어 맨>이라는 작품이 개봉했다. 본 작품은 가능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sf 로맨스로, 나의 욕망으로 구성된 휴머노이드와 3주간 동거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왜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갈망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사랑이 상대방을 진정 아끼고 헤아리는 이타적인 사랑이 아닌, 제 자신의 들끓는 정열적인 심장과 성기를 바라보는 욕망에 가깝기 때문이다. 휴머노이드는 주인공 알마의 기억으로 구성되고, 또 보편적인 여성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꿰고 있다. 그래서 휴머노이드는 인간과 달리 알마의 욕망에 충실하게 봉사한다. 더욱이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기가 어렵고, 제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이 쉽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충돌로 가득하리. 한 중년 여성이 휴머노이드와 대화를 나누자, 그녀는 환호한다. 몇 십 년 만에 제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다며,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은 상대방의 얘기를 듣기보단 제 마음대로 곡해하기 일쑤이므로. 그래서 실험에 참여한 한 늙은 참가자는 매우 호의적이다. 비로소 나를 이해받는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마는 휴머노이드가 영 못마땅하다. 휴머노이드는 여성이 바라는 모든 환상을 실현하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다. 불가능하기에 감질나는 환상이 모두 실현되자 되레 감흥이 사라지고, 더욱이 보편적인 여성이 좋아하는 데이트를 즐김에 특유한 알마 자신을 잃는 기분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생산된 휴머노이드, 그들과 관계를 맺는 인류도 똑같아지지 않을까. 더욱이 인간은 객관이나 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 불완전하고 무용한, 그런데도 단지 자유로운 감정도 삶의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이성적인 휴머노이드의 지나친 지시도 인류가 바라는 자유에 거슬린다. 한편 휴머노이드가 알마의 기억을 인지하여 보편적인 여성의 이상형이 아니라, 알마만 알고 있는 옛 연인 토마스를 닮게 되자 빠져든다. 더욱이 알마도 지나치게 이성적인 도그마를 고수하지 않고, 솔직하게 빠져드는 감정을 열어둠에 휴머노이드에게 호감이 간다. 인간은 이성만이 아니라 감정으로, 몸으로, 그리고 유일한 나로서 살기를 바라므로…     


이렇게 <아임 유어 맨>에서 휴머노이드를 탐구하며 길어낸 것은 불완전한 인류의 본성, 그리고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이를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애프터 양> 또한 휴머노이드와 관계 맺는 인간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태생의 미국 영화감독인 코고나다는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영화사 속 거장들의 비디오 에세이를 제작하며 비평가로 활동했다. 비평을 시각적,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코고나다의 활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와 동시에 2017년에는 <콜럼버스>라는 장편을 내놓으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오히이오의 주도인 콜럼버스를 누비는 재미교포를 그려내며, 구성원임과 동시에 이방인이었던 자신의 삶을 투영한다. 또 그의 비디오 에세이에서 크나큰 존경심을 표현한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숏이나, 로베르 브레송의 즉물적인 연출이 반영된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그의 연출은 고정된 카메라 아래서 회화적으로, 또 사진처럼 정교하게 정돈되어 있다. 코고나다는 이러한 연출로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과 인물들의 관계를 엮어서 주목한다. 모더니즘이라는 사조 자체가 예술 매체 각각의 본질을 추구했지만, 그것에 얽매인 나머지 진정 자유로워 마땅할 예술을 편협한 강령에 가두었다. 어쩌면 인간관계도 코고나다가 포착하는 모더니즘 건축과 같을까, 교수와 학생의 수직적이고도 딱딱한 관계, 어머니에 대한 의무 때문에 콜럼버스를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 아버지 때문에 콜럼버스로 오게 된 진 등 영화 속 인물들은 특정한 의무, 정해진 지위나 목적에 엄해서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서로는 하나의 도시에, 또 특정한 관계에 얽혀있지만, 정작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선은 피상과 목적에 그친다. 일례로 케이시와 진은 상황이 서로 상극이다. 내지인과 외지인,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와 가족보다도 개인을 우선시하는 태도, 아날로그의 선호와 기술 지향적인 태도가 다르다. 이러한 단절을 모더니즘 건축으로 유명한 콜럼버스의 로컬성을 적극 살려 공간으로 이들을 가르며 가시화한다.     


하지만 대화가 서로의 벽을 넘어서게 만든다. 이러한 타자와의 접촉은 유한하고 특정한 상태에 머물러있던 자신을 넘어서게, 진정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실현하게끔 만든다. 떠나고 싶지만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우려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케이시는 떠나도 괜찮다는 것을 진에게 확인하고, 반대로 진은 케이시를 통해 아버지가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는 남아야겠다는 의무를 깨닫는다. 그렇게 오직 자신이 생각하고 상정한 본질로만 살던 인간의 모더니즘을 대화로 극복하는 작품이 <콜럼버스>였다. 모더니즘 건축을 인간과 환유하며 관계와 삶, 자유를 고찰한 코고나다, 과연 <애프터 양>에서 휴머노이드(=컬쳐 테크노)는 우리에게 어떤 인간을 보여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양이 제이크, 키라, 미카의 사진을 찍어주는 숏에서 시작된다. 사진 촬영하는 본 장면에서 고정된 카메라가 가족을 섬세하게 담아내는 것처럼, 본 작품도 사진가가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고정된 카메라로 코고나다가 그려내는 근 미래를 담아낸다. 정교하게 공간과 대상을 담아낸 정적인 숏, 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차분한 연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점차 카메라 워킹이 등장하는데, 이는 포착되는 대상에 따른 형식의 변화다. 일단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숏에서 사진가-피사체 각각의 목적이 엄격하듯, 영화 속 인물들은 자기 직업, 인간이라는 종에 철저하다. 이에 가족, 클론, 휴머노이드는 소외·단절된다. 하지만 그러한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융화된다. 다른 가족과 다른 종의 세계로 ‘발을 디딜 때’, 카메라 워킹이 동반된다. 영화의 핵심 개념인 ‘접목’을 통해 혈육, 종을 초월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할 때, 새로운 이방인인 에이다가 제이크의 집에 나타나는 장면 등에서 말이다. 즉 기존 상태로부터 발전하고, 고정된 목적에서 자유로울 때, 마찬가지로 이에 상응하는 감각인 '이동'이 등장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안정적이지 않다. 제이크와 양의 대화, 키라와 양의 대화에서 영화의 움직임은 안정적인 그간의 스테디캠이 아니라, 흔들리는 핸드헬드다. 가늠조차 할 수 없던 타자의 세계를 접한 심리적 동요임과 더불어, 그간 자유롭고 감정적인 인간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로소 인간이 된 듯한 ‘불완전한 살 떨림’처럼 느껴진다.      


또 핸드헬드는 제이크, 키라, 각자가 견고하게 쌓아 올린 표상, 의식이 녹아내리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대화를 통해 스르르 녹아 양의 세계와 융화될 준비가 돼 듯, 본 작품은 사진적인 미장센에서 영화다운 미장센으로 변모할 때의 ‘운동감’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 한편 사진적인 미장센도 결코 괄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미장센에선 따스한 조명이 반복 사용된다. 사진적인 숏들이 매우 딱딱하고 건조하기에 주홍빛의 온유한 조명은 더욱 눈에 띈다. 본 작품에서는 휴머노이드인 양 보다, 다른 인간들이 더 건조하다. 어린아이로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미카의 디렉팅만 생기발랄하다. 극의 중심이 되어 양의 기억을 따라가는 제이크를 맡은 콜린 파렐의 경우, 그가 출연한 여러 작품에서도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나 <킬링 디어>의 사무적이고 뻣뻣한 연기가 떠오른다. 코고나다는 이 같은 디렉팅을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목적, 즉자, 사물화되어 딱딱해진 세계를 표현하기위해, 그가 비디오 에세이에서 조명한 로베르 브레송의 즉물적 디렉팅을 빌려온 듯 보인다. 이러한 브레송의 유산을 차용하여 영화 내내 삭막함을 가득 차게 만들고, 이후 간간히 튀어나오는 절제된 감정은 감상자의 마음에 적지 않은 울림을 전한다. 이러한 무감함과 절제된 감정 사이에서, 따스한 조명은 그들이 차가운 사물이 아니라, 온기와 감정이 있는 인간임을 환기한다. 이렇게 코고나다의 연기 디렉팅이 브레송을 연상케 하는 것처럼, 외에도 코고나다가 비디오 에세이에서 다룬 여러 거장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영화의 화면비는 2.35:1과 1.33:1, 그리고 1.85:1이 망라되며, 사실상 영화사의 모든 화면비가 사용된다. 그리고 각각의 화면비가 시간이나 옛 선배들의 기법과 조우하는데, 일단 2.35:1의 화면비는 현재에 활용된다. 이러한 널찍한 화면비에서 공간을 풍부하게 담아내 인물과 상호영향을 주고받고 공명하게 만든다. 흡사 상징적인 공간과 심리적 영향을 주고받는 인간의 초상을 정교한 롱숏에 포착하던 안토니오니처럼 말이다. 이는 <콜럼버스>에서도 일련 드러난 코고나다의 특징이다.   


그리고 1.33:1의 화면비는 인물들이 서로의 눈높이에 맞춰 화상통화 할 때 활용된다. 이는 일본 문화에서 비롯한 특징적인 시점 숏인 다다미 쇼트를 발명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인 듯 보인다. 그리고 1.85:1의 화면비는 기억을 담아내고 있는데, 향수를 자아내는 감미로운 기억을 파편적으로 구성한 편집은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와 그 이후 작품들에서 노스텔지어를 구현한 시퀀스를 연상케 한다. 또 아이다의 원형과 얽힌 양의 기억은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이나 <잠입자>를 연상케 한다. 목조 건축과 자욱한 숲, 뒤죽박죽 뒤섞인 추억과 아스라한 대상의 초상… 이렇게 포착하는 대상, 시대에 적절한 화면비를 선택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연출을 고민한다. 이러한 연출로 그려낸 휴머노이드, 상상할 수 있을 만한 미래는 마냥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영화 속 관계가 순수한 우정, 무의미하지만 그저 즐거울 뿐인 친교가 아니라, 서로 간의 목적, 유용함, 기능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단 양은 휴머노이드로 인간 동생인 미카에게 중국 문화를 전수해주기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명칭은 미카의 오빠지만, 마냥 자유로운 오빠, 가족은 아니다. 미카에게 중국문화를 전수해주는 목적, 미카의 보호자이자 관찰자, 가족의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으로 그의 역할은 규정되어 있다. 근 미래에 사람들은 패드나 키보드를 두드리기보다는 컴퓨터, 기기를 향해 말로 지시하고 있다. 제이크나 키라가 말로 컴퓨터에 지시하는 것과 양에게 말을 건네는 억양, 어조는 별다르지 않다. 상호 소통하는 인간은 서로 자유롭게 청자와 화자를 뒤바꿀 수 있는 반면, 양은 언제나 청자이거나 제한된 화자다. 소유자의 질문에만 답변하기에 제한된 화자로, 그가 어떤 생각과 기억, 경험을 품고 있는지는 스스로 발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딱딱함이 곧 인간관계로도 이어진다. 양을 고치기 위해 사람들을 수소문하는 제이크의 인간관계는 자유로운 감정 교류, 서로의 삶의 교감이 아니라, 언제나 목적을 제안하고 돈을 내는 딱딱한 관계로 제한된다.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 그런데 이는 가장 목적에서 느슨해야 할 가족에게도 적용된다. 안토니오니적인 영화 속 상징적인 '집'은 문, 창, 복도 등이 닫혀있거나 직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이에 서로의 공간이 단절된 분위기를 풍긴다. 잠들어버린 양을 계기로 인물들은 여러 번 ‘터널’을 넘나들며 다른 차원으로 고양되며 비로소 구성원을 알게 된다. 그 이전까진 서로에 대해 요원했다. 제이크는 미카가 밤마다 물을 마시는 것도 몰랐다. 부모는 딸을 양의 책무로 떠넘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딸이 놓인 방의 복도, 문턱을 제이크는 넘지 못한다. 이렇게 서로는 너무나도 멀리 있다, 낯설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목적으로 사는 존재에게 목적이 사라진다면, 그의 존재 의의 또한 상실된다. 제이크는 양의 기억을 그의 시점 숏으로 확인해본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이별을 목도한다. 디디라는 중국인 소년을 보필해야 하지만, 소년은 양에게 관심이 없다. 요양하는 할머니, 사귀던 아이다의 원형도 먼저 떠나갔다. 그래서 소원한 디디, 떠나간 할머니, 아이다의 선조로부터 비롯한 양은 궁핍하다. 영화에서는 양이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이 계속 반복된다. 언제나 타인이 바라보고 지시함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받은 양,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타인이 사라진다면 자신은 누구인가, ‘내가 바라보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양의 표정은 모호하다. 하지만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미소가 돈다. 그래서 이들은 ‘이름’을 가져야 한다. 휴머노이드라는 사물은 공통되고 보편적인 목적을 갖는다. 하지만 일반적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면 보편적인 사물과 마냥 같지 않다. 이는 제이크가 양의 여자 친구인 에이다를 찾으러 다닐 때, 친구의 딸이 그녀는 클론이 아니라 '에이다'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강조된다. 제이크가 그녀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 따르지 않고, 에이다 이전의 천편일률적인 클론이 아니다. 클론은 원형이랑 똑같지만, 이름을 가짐으로써 마냥 똑같이 살지 않는다. 클론 에이다도 양이랑 사귀긴 하지만, 그가 먼저 떠나간다, 양에게서 먼저 떠난 선조 에이다와 달리 말이다.    


사물은 즉자다. 규정, 본질, 역할, 목적에 얽매여 있다. 그것을 위한 도구다. 하지만 인간은 대자다. 상정해놓은 이러저러한 개념에만 예속되지 않는다. 양이 겪는 권태와 우울은 즉자가 된 대자의 갈증이다. 영화의 도입부,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댄스 경연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식구들은 하나의 군무, 경쟁이라는 목적에 따라 특정한 시간에 모두 같이 춤을 춰야 한다. 그리고 음악이 멈추면 마찬가지로 춤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양은 중단하지 않는다. 고장이 나서 계속 춤을 춘다. 그리고 잠든다. 인간은 그가 경연이 끝나고도 춤추기를, 잠들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양은 바랄지도 모른다. 댄스 대회라는 목적 없이도 춤추기, 잠들어선 안 될 시간에 잠들어 있기, 자신은 이별 앞에서 남아있어야 하는 반면 마음대로 떠나갈 수 있었던 인간들을 닮기, 인간은 잠든 양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 언제나 깨어서 봉사하는 휴머노이드이어야 하기에, 인간에 의해 수리되고 교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은 더 이상 깨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들도 양이 깨어났으면 좋겠지만 더 이상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동등하게 말하기, 마냥 듣기만 하지 않는 대화가 서로에게 강조된다. 미카의 오빠이자 가족 구성원 중 하나인 양, 가족이라면 그 누구보다 구성원을 친밀한 거리에서 잘 알 수 있는 만큼, 그들이 바라는 것을 진정 존중해줘야 할지다. 양은 삶의 막바지에 미카의 오빠로 입양되었다. 언제나 타인을 위한 목적, 장치로 전락하던 양, 하지만 그는 마냥 목적을 따르지 않고 감정을 추구하는 기억을 쌓기 시작했다. 목적에 따른다면 무용한 것들, 하지만 나의 자유를 위해서는 감정, 기억, 경험이 더 유용하다. 기억이 모인 저장장치는 흡사 숲, 우주처럼 묘사된다. 무한하게 가능함을 증명하는 기억의 숲, 그것이 대자의 자유를 증언한다. 또 인간의 삶도, 휴머노이드의 삶도 유한하다. 끝이 있다. 망가지면 고치기 어렵다. 그렇게 유한하다면, 최대한 값지게 많이 누리는 것이 삶의 미덕 아니겠는가. 무언가를 위한 목적으로 하나의 일만 반복 노동하는 것이 아닌, 무수한 관계와 경험을 축적하면서 풍요로운 단 한번 뿐의 삶을 누리기.      


이를 누리기 위해선 서로의 다름을 긍정해야 한다. 우스꽝스러워 영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댄스 씬을 다시 살펴보자. 하나의 춤을 추는 것은 맞다. 한 가족, 이를 넘어서 무수한 가족이 똑같은 하나의 안무를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묘하게 다르다. 똑같은 동작이지만 느리거나 빠르거나, 어설프거나 확실하거나, 또렷하거나 흐릿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가족은 그러한 ‘서로 다름’을 알아야 한다. 가족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공통된 춤을 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춤을 모두 다르게 수행하는, 다른 삶을 살고 있기에 말이다. 나와 다른 타자인 가족을 존중하기, 영화는 이를 '대안 가족'으로 보여준다. 중국인 미카는 백인 제이크와 흑인 키라 사이에 입양되었다. 전통적인 친부모가 낳은, 혈육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다. 또 거기에는 인간을 넘어선 휴머노이드, 클론까지 껴있다. 그리고 미래라 할지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입양 가정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친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미카를 배척한다. 또 인간 제이크가 보기에 클론들도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서 감독은 '접목' 개념을 인용한다. 이를 인용하는 양은 새롭거나 이질적인 나뭇가지가 다른 나무의 몸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영화 속 접목은 제이크가 업으로 삼고 동경하는 중국의 차 문화, 양의 취미인 나비 표본 수집, 이들이 입고 있는 의복, 음식 등 미국에 이식된 동북아의 문화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의 혀와 눈에 자아내는 새로운 감각, 중국의 차를 마시며 상상하는 숲의 풍경과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등, 접목은 우리의 의식을 넓힌다. 타자는 이처럼 나의 인식을 확장한다. 백인, 흑인, 인간에서 기인한 유한한 시선을 확장한다. 더 많은 것을 포용하게 만들어, 더 많은 것을 즐기게 해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입양'에만 그쳐선 안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로는 잘 모른다. 부모들이 중국 문화를 즐기고 있긴 하지만, 미카를 아시아의 뿌리와 이어주고 본인들은 직업에 집중하기 위해 양육을 양에게 일임한 상태다. 하지만 입양이 형식적인 수준에만 그친다면, 중국에 대한 새로운 앎을 스스로 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 서로에게 뿌리내리는 접목은 불가능하리.      


철학자 가다머는 역사학자 딜타이와 요르크 백작의 말을 인용하여 타자와 경험을 논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낯선 타자로부터 삶의 자양분을 얻는다. 이러한 자양분은 이해에서 기인한다. 독어에서 이해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능력을 가리키는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떤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 할 수 있고, 스스로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에 대한 이해란 상대방을 이해하고 파악하면서, 기존의 자아가 타자 의식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 영화에선 타자와의 대화를 강조한다. 이를 위해선 일반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되감기'다. 제이크는 양이 사진 촬영을 해주던 장면을 되감기 한다. 양과의 대화에서 상대의 말과 입에 주목하여 반복하고 곱씹는다. 내가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것, 양이 사진을 찍어주고 우리는 촬영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되감아서 다시 본다. 나의 시점에서 당연했다면, 양의 시점에서는 대화며 촬영이며 마냥 당연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되감기는 문장을 두 번씩 말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한번은 듣기, 한번은 입으로 따라 하기, 나를 중단하고 타자의 시점에서 되감기함에 양의 소외, 그의 입장에서 달리 느껴지는 문장의 의미들이 떠오른다. 이를 통해 키라는 인간의 내세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 휴머노이드의 죽음 인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코고나다는 타자 이해를 위해선 상대의 ‘기억’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 작품의 중반부에서 인상적인 연출은 디졸브다. 양이 가지고 있는 에이다에 대한 무수한 기억이 부드러운 디졸브에 의해 현실로 이어진다. 양에게는 에이다에 대한 최초의 기억, 아주 ‘특별한 상(狀)’이 있다. 에이다에 대한 최초의 특별한 기억을 바탕으로 양은 지속해서 이와 유사한, 에이다를 바라보는 기억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본 기억을 목도한 제이크의 현실로 이어진다. 양의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던 디졸브는, 이윽고 양의 기억이 곧 제이크의 의식으로 확장되어 에이다가 일하던 카페로 연속된다.    

  

즉 아주 특별한 상 하나에 동일한 상 다수가 지배받고, 현재에 우리가 지각하는 것도 이러한 기억의 영향을 받는다. 이는 베르그송의 주장이다. 그래서 완전히 순수한 지각은 없다. 최초의 특별한 상으로부터 지각 또한 파생된다. 양이 클론 에이다와 사귀게 된 것은, 원형 에이다와 사귀었던 특별한 상이 만들어낸 경험이랴.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것을 지각하더라도 각자가 다르게 느낀다. 이에 우리가 타자의 눈을 알기 위해선 기억, 특히 최초의 특별한 기억을 알아야 한다. 키라에게 양의 기억은 사물이다. 주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타인이나 기업에게 보증 받는 대상이다. 하지만 미카에게 양은 선물로 치환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똑같이 양의 부재를 경험하더라도, 양에 대한 최초의 기억과 상에 따라 지각은 상이하다. 이러한 최초의 상이 양을 중국인 휴머노이드, 보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질문 중 하나인 '어떻게 아시아인이 되느냐', 그것은 바로 기억이 좌우할지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쌓여져온 부모, 민족, 국가의 역사, 그것이 곧 현재를 어떻게 바라볼지 좌우하는 특별한 최초의 상이 되어 이와 동일한 무수한 상을 생산할지다. 즉 타자를 경험하더라도 기존에 가진 최초의 상을 통해 타자 경험을 생산한다면, 이전과 별다르지 않다. 그래서 타자가 최초의 상을 통해 어떻게 지각하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양의 기억을 거슬러 내려가며, 미카를 위한 존재에 불과했던 양이 비로소 ‘아들’이 된다. 그의 특별한 상을 헤아리니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수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은 붙잡는다. 휴머노이드든 인간이든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나는 상실을 직면하는 우리는 공허하다. 우리도 언젠가 떠나갈 것이라 생각하면 허무하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이후, 내세,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 그렇게 무로 되돌아가든 다른 존재로 되살아나든, 여하간 지금의 나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우리의 기억은 남는다. 아시아인을 형성하는 길고 긴 역사적 축적, 양은 떠나갔어도 기억이 제이크가 그의 시선으로도 살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그래서 인간이란 기억으로 유의미하고, 오래도록 번성하며 생존한다.      


이렇게 감독은 근 미래의 미국이 향해야 할 이상적 형태를 구축한다. 입양, 대안 가족의 가능성을 적극 긍정한다. 상대를 진정으로 알아서 서로 뿌리를 내리는 접목을 말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억을 헤아린다. 대상의 지각을 구성하는 기억을 알아야지만 진정한 타자의 의식, 관점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나의 일반적인 의식과 시선을 되감기 하여, 대상의 시점에서 보는 시도가 필요하리. 그래야만 진정 아버지 백인, 어머니 흑인으로 구성된 미국에서 동양인이 접붙이게 되리. 다만 본 작품은 대자로의 해방이란 관점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에 다시 즉자로 붙잡혀 기억이 전시되고 연구되는, 다시 '목적에 의해서 전시'되는 결말을 마냥 긍정할 수 있을까. 인간을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던 양은 결국 죽음조차도 인간의 연구욕심에 붙잡힌 것은 아닌가. 목적에서 벗어난 기억을 축적해가며 대자를 실현한 양을 굳이 박물관에 전시되는 즉자로 전락시켜야 할까. <아임 유어 낫>에 비해 인간의 시선을 넘어서는 듯 보였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박물관이란 아집에 붙잡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이 자기중심적 존재임을 솔직하게 시인한 <아임 유어 낫>이 덜 위선적이지 않은가. 또 아시아 접목을 위해 언급한 차 문화, 나비는 원주민의 삶을 헤아린 결과인지, 아니면 오리엔탈리즘을 의식한 노림수인지 의심이 든다. <콜럼버스>에서도 현재 한국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은 장례 풍습을 한국계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현재적으로 언급하였으니 말이다. 차를 마시고 느끼는 풍류는 서구가 동양에 기대하는 전형적인 신비, 굳이 접목할 필요도 없는 ‘서구가 바라는 동양’이 아닌가. 진정 적지 않은 시간에 거친 접목을 하려거든 서구가 단번에 수용하기 어려운 낯선 문화여야 하지 않겠는가. 서구의 눈을 의식하여 선별된 동양은 극과 모순되지 않은가? 아니면 이전 작품부터 탐미주의로 유명했던 그의 아름다움을 위해 동양은 선별된 것인가? 실존과 자유, 타자의 기억과의 접목, 그런데 정작 그 수행이 감독 본인에게도 이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본인에게 그가 말하는 바가 유리되어 있다면 이는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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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429 전주국제영화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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